(민14:4-10) 예수님의 무덤을 밟고 지나가는 이성적인 믿음 

구약성경강해(25) / 민수기강해(15) - 가데스 바네야의 불순종(5)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민14:4-10)

 

과연 이성은 나쁜가?

 

일부 목사님들이 이성은 믿음과 모순 내지 상충되므로 믿음의 성숙에 방해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교인들도 실제 현실에서 이성으로 이해가 안 되는 현상 사건 고난이 종종 발생하니까 이성이 믿음에 나쁘다는 그런 가르침이 옳은 것처럼 여겨집니다.

 

반면에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지성적으로 따지고 들면 아주 잘못된 양 매도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도리어 반드시 이성을 동원해서 더 깊고 넓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을 통찰하여 현실 삶에 적용하는 실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열 명의 정탐꾼의 선동에 넘어가 밤새 곡하다가 애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모세 대신에 한 장관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백성들의 그런 결정과 시도에 대해 모세, 아론, 여호수아, 갈렙이(이후로 네 명 다를 말할 때는 모세 일행으로 칭함) 보인 반응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먼저 그들을 만류하려고 온 회중 앞에 엎드렸습니다. 가장 어른이자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이 그러는 모습을 본 여호수아와 갈렙은 옷을 찢고 온 회중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약속대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니까 그분을 거역하지 말고 가나안 족속들 두려워 말라고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이미 사탄의 노예가 되어버린 백성들은 하나님께 역사상 최대의 사악한 거역을 했습니다. 네 명의 지도자들은 정말로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둘은 완전히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습니다. 믿음이 더 좋고 덜 좋은 차이가 아닙니다. 서로 화합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정반대에 위치한 양극단입니다. 중간 위치에 설 수 있는 희미한 상태의 신앙은 없습니다.

 

그럼 이성이 믿음에 대비하여 과연 이만큼 극단적인 차이를 만들 만큼 나쁜 것입니까? 반대로 믿음만으로 이런 정반대의 거룩하고 의로운 모습을 연출해낼 수 있습니까? 이성이 정말로 나쁘다면 모세 일행의 순종에 이성이 전혀 작용하지 않았어야만 됩니다. 그러나 본문을 잘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성이 믿음의 순종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는커녕 오히려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어차피 죽어야 할 모세

 

먼저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백성들이 모세 대신에 새 장관을 세우려 한 것도(4절) 그들로선 이성에 따른 아주 합당한 판단이었습니다. 대체로 이런 경우에는 모세 일행을 다 죽이고 그 머리를 갖고 가서 바로의 환심을 사거나 사슬에 묶어서 데려가 바로에게 처분에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애굽을 탈출했다가 다시 돌아가는 자기들의 안전이 보장됩니다.

 

그러나 그동안에 모세 일행의 수고를 아니까 일말의 동정심은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얼마든지 기습적으로 밤중에 죽일 수 있었는데도 새 장관을 세우겠다고 나섰습니다. 모세 일행을 광야에 남겨두고 가겠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너희 갈 길을 가고 우리는 우리 갈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바로를 만나면 얼마든지 핑계를 대거나 거짓말로 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에게 모세가 우리의 왕이 되려는 욕심으로 우리를 속였다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모세가 기껏 끌고 간 곳이 먹을 것은 물론 물도 없는 광야였습니다. 겨우 그곳을 통과했더니 군대와 무기가 형편없는 우리더러 너무나 강력하고 거인 족속들인 가나안과의 전쟁에 몰아넣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버리고 우리끼리 돌아왔으니 지난 잘못은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삼시 세끼와 편안한 잠자리만 주시면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무엇이든 시켜주시고 죽이지만 말아 주십시오.”라고 읍소하면 됩니다. 바로로선 다시 굴러 들어온 공짜 떡인데 마다할 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곧바로 모세와 아론이 그들 앞에 엎드렸습니다.(5절) 모세로선 백성들의 생각이 어떠하고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지도 잘 압니다. 아무리 말려도 결국에는 자기들을 죽이고라도 갈 것이며, 새로 뽑힌 장관이 바로에게 잘 보이고 자기 권위를 세우려고 죽이라고 명령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자기들을 끈질기게 가로막는 모세 일행을 돌을 들어 쳐서 죽이려 했습니다.(10절)

 

모세는 앞으로 닥칠 위험을 충분히 예견했습니다. 그럼에도 엎드렸다면 무슨 뜻입니까? 시쳇말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죽어도 못 간다. 정 가고 싶다면 차라리 나를 죽이고 가라. 내 무덤을 밟고 지나가라.” 안 그래도 걸림돌이 될 것을 알고 모세 일행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백성들로선 당장 여기서 죽이는 것이 여러모로 편하겠다고 쉽게 결정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그 긴급한 와중에 엎드려서 기도해본 후에 믿음으로 결단하고 행동으로 옮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기필코 세워야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계획을 세우고 삶의 모든 분야에서 자기들 모든 것을 걸고 그 계획을 이루려 노력했습니다. 이제 그 모든 일들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자기들은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기에 죽음으로도 말려야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흘러간 즉, 이성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앞장서서 죽겠다는 여호수아와 갈렙

 

모세와 아론은 이미 80이 넘어 살 만큼 살았으므로 목숨이 아깝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속단해선 안 됩니다. 이제 40대 장년인 여호수아와 갈렙도 목숨 걸고 순종했습니다. 모세 일행에겐 가나안에 가서 왕이 되거나 높은 자리 차지하고 싶었던 사적 욕심이라곤 털끝만큼도 없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자기들 옷을 찢었습니다.(6절) 알다시피 옷을 찢는 것은 극도의 슬픔의 표출, 엄청난 죄에 대한 통한의 회개,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헌신 간구하는 행동입니다. 제발 애굽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한 것입니다. 이들도 모세와 아론과 함께 백성들의 미움을 싸서 죽을 수 있다는 점을 잘 압니다.

 

거기다 늙은 모세와 아론은 그러지 못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전쟁을 진두지휘하며 최전방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자들입니다. 실제로 출애굽 후 시내산으로 오는 도중에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모세와 아론은 산 위에서 손을 하늘 높이 쳐들고 하루 종일 기도만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앞장서서 전투에 참여하여 큰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지금도 모세와 아론은 백성 앞에 엎드려 여호와께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백성들에게 권면하는데 숨겨진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너희보다 가장 앞장서서 전쟁에 나갈 것이다. 죽어도 너희보다 우리가 먼저 죽을 것이다. 그리고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후에 우리 모두 여호와 닛시 즉, 승리의 깃발이라고 그분의 이름 지어서 외치고 감사했지 않느냐? 이번에도 전쟁에 승리를 주시는 바로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느냐?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따르라!”

 

그러나 불행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백성들은 돌을 들어 이 네 사람을 쳐 죽이려 덤벼들었습니다. 본문에 이르게 되는 일련의 배경과 과정과 결과를 살펴보면 모세 일행도 철저하게 이성을 동원해서 분별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단순히 믿음으로만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성은 믿음에 나쁘니까 완전히 배제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 나름의 이성적인 판단을 했습니다. 가족을 위하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한 것입니다. 가장이 제일 먼저 또 평생을 두고 행할 의무이자 소명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로 그런 판단으로 이끈 이성 자체는 결코 나쁘지 않다는 뜻입니다.

 

믿음과 이성의 관계

 

그럼 이성과 믿음의 상관관계를 대체 어떻게 정리해야 합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없이 이성만 가지고 판단하면 결론은 항상 가족들의 안위와 자신의 형통이 삶에서 붙들 유일한 가치와 의미가 됩니다. 믿음이 없는 불신자들의 인생 목표가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또 그럴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지었습니다. 인간으로 이 땅을 당신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릴 자로 세웠습니다. 인간을 당신과 교통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든 것이 이 땅을 창조하실 때부터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 완벽한 계획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 당신이야말로 참으로 이성적인 존재임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그 형상의 일부를 인간에게 부여했기에 인간 또한 모든 피조물 중에 유일하게 이성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성이 하나님의 형상인데 어떻게 나쁘고 믿음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까? 오히려 그 반대여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최초 인간은 그 좋은 이성을 사탄의 꾐에 빠져 하나님을 거역하는 방향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헤아려 봤습니다. 시쳇말로 머리를 굴렸습니다. “하나님이 왜 선악과만 못 먹게 했지,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싫어하는가? 우리를 혹시 미워하는가? 선악과야말로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정말로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데도 먹지 못하게 했으니 사탄의 말이 맞는 것 같아!”

 

문제는 이미 그들 마음에 하나님 그분을 배제했기에 이성은 자기를 높여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리에까지 올리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원죄 하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항상 목청 높여 부르는 노래의 제목은 “내 인생은 나의 것”입니다. 삶의 목표도 버킷리스트와 욜로 인생을 즐기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타락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태생적으로 지니는 본성입니다.

 

그런 배은망덕한 죄를 범했음에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셨다는 것은 한 죄인을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리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배제한 채 자기와 가족만을 위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던 이성을 그 반대로 향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이는 당신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의 이성은 어떠해야 합니까? 성령이 간섭하여 구원을 주시고 또 성령이 그 신자에게 내주하면 이성은 어떻게 변화됩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나님을 가족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모세 일행처럼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이 됩니다.

 

예컨대 선교사로 헌신할 때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묻고 또 묻습니다. 그분의 직접적인 음성 계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중에도 자신의 현재 위치와 앞으로 전개될 상황과 혹시 너무나 열악한 환경으로 중병에 걸려 죽거나 핍박으로 순교할 최악의 사태까지 헤아리며 깊이 고뇌합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지성 감정 의지를 모두 동원해 그 갈등한 내용들을 성경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이성적으로 비교 분별 판단 결정 헌신합니다. 어떤 결정입니까? 가족에게 큰 희생이 따르겠지만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에 선교를 가겠다는 것입니다. 가족들도 나와 같은 믿음을 갖도록 최선을 다해 섬기고 가르치겠다고 작정하고 실천합니다.

 

처음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를 믿게 되는 과정은 우리는 모릅니다. 예수님이 주는 것 없이 싫다가 아무 이유 없이 좋아진다는 것이 가장 합당한 설명입니다. 지정의로 자신이 거듭났다는 사실을 인지한 후로는 즉, 예수 믿어서 구원 받은 후부터 비로소 이성이 하나님 쪽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앞으로는 그분의 뜻대로 살기로 하고, 신자들의 공동체에 참여하고, 성경의 진리를 배우려는 결심하는 데 그 모든 과정에 인간의 지정의가 총체적으로 동원된 것입니다. 그러고 싶은 소망이 생기게끔 하고 그렇게 결단할 힘은 성령이 주시지만 그에 반응하여 행하는 것은 신자의 이성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히 들어온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만 이성이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또 점점 온전해지는 이성은 더욱 온전한 믿음으로 성숙시킵니다.

 

하루아침에 죽기까지 순종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모세 일행처럼 생명을 걸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싶습니다. 세상과 불신자들 앞에 당당하게 내 무덤을 밟고 지나가라, 내가 죽더라도 당신의 영혼을 주님 사랑으로 살리겠고 선언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매번 실천은 더딜 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 꽁무니 빼기 바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불신자 시절의 죄의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악한 죄를 저지르고 싶은 마음이 남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멀리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자꾸만 자신과 가족이 더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불신자 시절에 이성이 작동했던 타성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럼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삶에서 온간 고난을 통해 다른 모든 것은 포기해도 절대로 그분만은 놓을 수 없고 놓는 순간 철저한 실패와 사망이 따를 뿐이라는 사실을 자꾸자꾸 절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믿음이 자신의 체험을 통해 완전히 각인되어져 있어야 합니다. 바꿔 말해 죽음으로 내몰리는 위급한 경우를 겪으면서도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오묘하고 완벽한 주권과 섭리를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이성적으로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내 무덤을 밟고 지나가라는 믿음의 선언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지도 않고 또 그것이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모세 일행 모두는 죽음 문턱 앞에까지 갔고 그곳에서 정말로 귀하고 귀한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체험적으로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모세는 알다시피 바로의 궁정과 미디안 광야에서 80년간 인생을 허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로 나중에 바로와 상대하고 백성을 광야로 이끌도록 하는 예비 된 훈련이었습니다. 막상 본인에겐 너무나 괴로운 시절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에 대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아무리 묻고 따져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부재했습니다. 그 긴 세월을, 인생의 전부를 육신은 살아도 영혼은 죽은 채로 지냈습니다.

 

그러다 떨기나무 불꽃으로 여호와를 대면하여 출애굽의 소명을 받았고 목숨을 걸고 애굽에 돌아왔더니 그분의 말씀이 단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성취되었습니다. 잃어버린 80년을 하나님 안에서 되찾았습니다. 완전한 죽음에서 완전한 생명으로 바뀌었습니다. 정말 자기 전부를 걸고 죽어도 될 만한 궁극적 실재를 만났고 또 인생으로 그만큼 큰 영광이 없기에 반드시 해야만 할 일도 발견한 것입니다.

 

아론도 불경한 두 아들이 하나님께 심판받아 불에 타죽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아들의 신앙교육을 잘못 시켰음에도 자신은 대제사장으로 택함 받고 남아 있는 두 아들도 후계자로 세워주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누이 미리암과 함께 모세를 거역하는 죄를 범했음에도 오히려 긍휼을 더 베풀어주었습니다. 아론 또한 오랜 세월의 씨름 끝에 하나님 앞에 목숨 걸고 엎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두 사람에 비해 인생의 반밖에 살지 못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도 그들과 동일한 영적 체험을 거쳤습니다. 지금껏 노예로 놀고먹다 시피 한 그들로선 아말렉과의 첫 전투에서 엄청나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모세와 아론의 쉬지 않는 기도가 있었고 여호와 닛시의 권능과 은혜가 함께 했습니다.

 

그전에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여호와가 출애굽시킬 것이라고 처음 말했을 때에만 해도 전혀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대언하는 하나님 말씀이 정확히 그 말대로 성취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계 최강 애굽을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는 노인이 말 한마디로 열 번 싸워 열 번 이기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출애굽 후에도 들어가면 죽을 수밖에 없는 광야에서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게 보호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불평 원망하는 데도 야단은 치지만 다 들어주는 은혜까지 깨달았습니다. 본문의 현장에서 지금까지 모세와 이스라엘에 베푸신 하나님의 권능을 회상함으로써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도 40년 인생 동안, 최소한 모세가 애굽에 도착한 이후로 하나님께 묻고 또 물으며 믿음이 성숙해진 것입니다.

 

변화된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인생살이는 괴롭고 고달픕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피조세계도 벌을 받았고 무엇보다 모든 인간이 서로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해 살게 되어서 인간 사회가 무한 경쟁의 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도 특별한 이유 없고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끊임없이 닥칩니다. 저절로 하나님께 의심 불평 원망이 생깁니다. 때로는 입술로 불신의 말을 내뱉고 남아 있는 죄의 본성으로 세상 안에서 자기와 가족을 높이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럴 때에도 신자가 반드시 이성으로 행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도할 힘도 마음도 없어도 젓 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그분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젓 먹던 힘 즉, 의지를 다 짜내어서 하나님께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저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입니까? 대체 왜 이런 일이 저에게만 일어납니까? 제가 나름대로 선하게 살았고 주님을 위하는 일도 그런대로 했지 않습니까?”

 

욥처럼 최소한 이렇게 고난이 겹치고 더 큰 고난을 주시는 까닭만이라도 좀 가르쳐 달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대체 어떤 분인지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이어가는지를 성경 말씀을 파고들며 읽고 또 읽어서 분별해야 합니다. 현재 일어나는 일을 기도하고 묵상했던 내용과 연결하여 따지고 따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성경의 말씀, 기도, 여건, 사건 등등을 포괄적으로 종합해서 분석하여 그분의 뜻을 알기 위해서라도 최대한의 이성적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얻은 답이 무엇입니까? 이성이 믿음을 온전케 하고 믿음이 이성을 온전케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고 실제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본문 8절 서두에 그 정답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분이 반드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고 그 땅으로 인도해 주신다고 담대히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할 수도 아니 할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순종하면 땅을 차지하고 거역하면 땅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순종만 하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순종만 하면 차지할 수 있다면 이미 그 땅을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마련해 놓았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의 백성이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해야 하는 그런 엄청난 고난에도, 그래서 설령 전사하는 일이 생겨도 여전히 하나님은 신자를 기뻐하고 또 당신의 기쁘신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기도들, 특별히 다윗의 기도를 눈여겨보십시오. 처음에는 온갖 불평 원망 심지어 불경하기까지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가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렇게 기도가 끝났다고 고난이 끝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전히 심한 고통 가운데로 들어가야 합니다.

 

기도 중에 이성으로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회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그분이 복을 줄 때 뿐이지만 그분은 나라는 사람 자체를 언제 어디서 무슨 일에서나 항상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

 

어떤 특정한 사건과 고난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 배경에 있는 깊은 뜻을 쉽사리 깨달을 정도로 영적인 천재는 우리 중에 아무도 없습니다. 기도는 물론 평소에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이성으로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내가 그분의 기뻐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 하나뿐입니다. 역사상 최고의 고난을 겪은 욥도 그 이유라도 알고자 매달렸지만 내가 그분의 기뻐하는 자라는 동일한 결론만 얻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신자에게 과거 현재 미래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이해가 안 되는 고난마저도 하나님이 신자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사랑하고 신자는 그분의 기뻐하는 자가 된 것 외에 다른 이유나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믿음 없는 이성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불신자들처럼 자신과 가족의 평안만 추구하기에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출세와 형통하려고 평생을 허비합니다. 이성 없는 믿음은 맹목적으로 작동됩니다. 고난이 닥치면 의심 불평 원망을 없애지 못하고 그저 고난만 빨리 없애달라고 떼만 씁니다. 계속 닥치는 고난마다 동일한 모습만 반복합니다. 겨우겨우 지탱해 나가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신앙입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불신자가 누리지 못하는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여 얻는 기쁨은 없습니다. 내 자신의 문제와 고난을 없애는 데에만, 그것도 이성 없는 믿음만 동원했으므로 평생을 두고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지 못합니다. 내 무덤을 밟고 지나가라는 담대한 선포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게 하려고만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반대급부로 복도 받고 무엇보다 당장의 고난에서 구출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엄밀히 이성으로 따져보십시오. 우리가 그분에게 기쁨을 받을 만한 조건 자격 공로가 하나라도 있습니까? 심지어 그럴 정도의 믿음이라도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 사건의 전후를 보십시오. 실감이 나지 않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전후를 보십시오. 아무리 따지고 따져도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한 가지 결론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요 믿음의 본질입니다.

 

이스라엘 앞에 함께 엎드린 예수님

 

놀랍게도 오늘의 본문에도 바로 그 십자가 복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담대하게 두려워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백성들에게 권면한 배경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과 권능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말렉과 승리한 그 첫 전투에서 여호와가 모세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7:16에서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고 예언했습니다. 성경의 예언은 아시는 대로 가까운 미래에서 먼 미래까지 이중 삼중으로 해당됩니다. 이 예언은 ‘대대로’ 싸우겠다고 그런 의미를 문자적으로도 밝혀 놓았습니다.

 

먼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당신의 명령을 사울이 거역한 사건은 가까운 미래였습니다.(삼상15장) 이스라엘이 망하고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다 진멸하지 않음으로써 남은 아말렉의 후손인 하만으로 인해 거꾸로 유대인들이 진멸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는 먼 미래의 일입니다. 그럼에도 반드시 에스더와 모르드개라는 두 믿음의 종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향한 그 예언이자 약속이 가장 가까운 미래인 가데스 바네야 사건에서도 정확하게 문자적으로 적용됩니다. 가나안 땅을 조사한 정탐꾼들은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민13:29)라고 보고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시나이 반도를 거쳐 가나안을 향해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아말렉인이 남방 땅에 거주한다면 가장 먼저 마주칠 적군이라는 뜻이 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미 아말렉과의 첫 전투의 주역이었기에 여호와가 이끌어주신 큰 승리는 물론 그 장래의 약속까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대대로 함께 아말렉과 당신께서 그것도 맹세하면서까지 싸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따라서 지금 마주칠 가나안의 첫 전투에 대해선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이 승리를 보장하셨고 또 함께 할 것이므로 더더욱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과감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 죽어도 우리가 가장 먼저 죽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두 사람도 모세와 아론처럼 우리 무덤을 밟고 건너가라고 선언한 셈입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에스더와 모르드개 두 믿음의 종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했듯이, 그 예언으로 지금 가데스 바네야에서도 갈렙과 여호수아 두 믿음의 종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보장한 것입니다. 실제로 40년 뒤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이 두 종을 통해 완수되었습니다.

 

바꿔 말해 이 본문의 현장에 실은 예수님도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엎드린 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비록 그 표현은 투박해도 그 의미하는 내용은 내 무덤을 밟고 지나가라는 것 아닙니까? 절대로 당신의 사랑의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고 죽음으로라도 말린다는 것이 십자가 사랑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면 과연 그 앞에 무엇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까? 바울도 그래서 분명히 선언했지 않습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도, 말하자면 전쟁 그 어떤 고난도 당신의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롬8:35)

 

이 시간 우리 모두 정말 심각하게 자신의 믿음을 되돌아보십시다. 이성으로 철저히 정확하게 분석해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처럼 믿음 없는 이성만으로 하나님을 수시로 거역하고 있습니까? 범사에 그분의 뜻을 묻고 또 물었던 이성이 바탕이 된 믿음으로 모세일행처럼 죽기까지 그분에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중간의 회색지대에 서있는 믿음으로 과연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가 될 수 있을지를 이성으로 따져보십시오.

 

5/19/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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