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13:25-33) 역사상 최대 불순종의 진짜 이유
가데스바네야의 불순종 (2)
구약성경강해 (22) / 민수기강해(12)
“사십 일 동안에 땅을 탐지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회보하고 그 땅 실과를 보이고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25-33)
인류 최대의 거역
가데스 바네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은 성경 전체에서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사건을 제외하고는 최고의 거역 사건입니다. 말하자면 인류 역사상 최대의 불순종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것이 더 큰 거역일 것 같지만 그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까닭이 사탄에 미혹되어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려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은 십자가 구원의 진리에 대해 전혀 무지했습니다. 무엇보다 순종해야 할 구체적인 명령이 없었기에 엄밀히 말해 거역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달라고 성부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눅23:34)
반면에 가데스 바네야에서 불순종한 세대들은 40 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다 모두 죽는 벌을 받았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역한 인원도 사상 최대로 많았습니다. 그보다 정말로 더 큰 잘못은 모든 열방 앞에 당신만을 왕으로 섬기는 제사장 나라를 세우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령한 계획을 한순간에 휴지조각으로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 5백 년 전에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선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당신의 백성이 이방의 노예가 되어 고생을 치르는 것도 감수하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으로 그들을 구출하여 시내 산에서 피의 언약을 맺기까지의 그 모든 역사가 헛수고가 되었습니다.
이 거역을 확대 적용하자면 실질적으로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신 목적 자체를 물거품으로 만든 것입니다. 죽음의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시 새로운 세대에게 그 과업을 맡기셨고 당신의 이름을 걸고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고야말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와와 갈렙을 제외한 모두가 불순종했습니다. 우리가 본문의 현장에 있었어도 당장 저부터도 동일한 거역을 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잘못한 이유를 정확히 살펴서 우리 신앙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두려움은 죄가 아니다.
지난 주 모세는 가나안 정복전쟁의 승리를 하나님이 보장했다고 확신했기에 그 과정에 대해서도 염려는커녕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실 결과를 미리 맛보라고 가나안 땅의 과실을 따와서 백성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시도가 아무 효력도 발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의 방어 태세와 무기 체계는 아주 견고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백 년간 노예로 살았으므로 전쟁 무기라곤 거의 없거나 아주 변변치 못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최고의 전쟁 훈련을 받은 모세가 최고 사령관이었고, 천부장 백부장 제도를 확립했고, 민수기 2장에선 열두 지파의 배치와 행군 순서를 여호와께 지시 받았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후 시내 산으로 오는 도중에 아말렉 족속과 전쟁에 승리한 것이 유일한 전쟁 경험이었습니다.(출17장) 무기와 전술에서 가나안 족속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이 열등했습니다. 처음으로 대규모의 본격적인 전쟁을 치러야 하니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숫자만 60만 명의 대군을 자랑할 뿐입니다. 그 많은 군대가 오합지졸이라는 것은 희생자가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먼저 확실히 해둘 사항은 그들이 두려워한 것 자체는 결코 죄가 아니요 잘못도 아니며 불신앙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담대한 믿음의 영웅 바울조차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 심히 떨었다고 고백했습니다.(고전2:3)
믿음이란 두려운 일이 안 생기게 하거나 두려움을 순식간에 없애는 실력이 아닙니다. 죄에 찌든 세상에 사는 인간은 누구라도,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두려운 일은 계속 생기게 마련이고 때로는 언제 끝날지도 모릅니다. 믿음이란 그래서 두려움 속에서도 눈앞에 닥친 현실에 어떻게 올바르게 반응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믿음은 두려운 세상을 무조건 부인하며 두려움이 없애는 싸움이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서도 하나님을 따르는 여정입니다.
심히 크게 두려워했던 바울이 나중에는 믿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 자랑했습니다. 그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 약한 것들을 자랑했으니 여전히 고난 중에 두려워한 것도 그 약한 것에 포함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약할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해지고 자기에게 머물게 된다는 진리만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체득한 것입니다.(고후12:9) 당장 자신은 힘들고 두려울지라도 주님의 능력이 더 온전해지니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체질이 진토 같고 연약한 성정을 지녔습니다. 두려움이란 외부로부터 자기 능력에 지나친 자극이 가해질 때에 자기를 방어하려는 지극히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두려움은 사람들이 새롭고 중요한 일을 할 때에 세밀하게 대비하도록 만드는 하나님이 부여한 일반은총입니다. 신자에게 두려움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게끔 겸손한 믿음으로 이끄는 특별은총입니다. 두려움을 없애야만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닥칠수록 자신은 더욱 낮아지는 것이 순전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 이스라엘
물론 오늘날의 신자가 보기에는 본문의 이스라엘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점도 분명 있습니다. 애굽에서의 탈출은 현실적으로 그 가능성이 제로였는데도 하나님은 말씀만으로 이루셨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초자연적 이적으로 인도해 오셨습니다. 지금도 만나를 먹고 있는데도 하나님께 불순종했으니 고개가 갸웃하고 참으로 완악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만나는 매일 아침 들판에 늘려져 있으니 단순히 일상의 삶으로 간주했을 수 있습니다. 지금쯤은 하나님의 특별한 권능 내지 은혜로 여겨지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만나를 주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다 굶어죽어야 하니까 하나님이 마땅히 해줄 최소한의 조치라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비유컨대 아이들이 부모가 밥 먹여 준다고 특별히 고마워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막상 가나안 전쟁을 수행하는 것과 만나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이들은 매일매일 부모가 베푸는 은혜에는 관심도 없고 이웃집 아이와 비교해서 최신 스마트폰 안 사주는 것이 가장 큰 불만이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상 출애굽 때만큼 단기간에 한 민족에게 엄청난 기적을 최고로 많이 베푼 적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누차 강조한 대로 애굽을 회개하도록 열 번이나 기다려준 그분만의 인내였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을 당신의 권능과 주권과 섭리에 철저히 신뢰하게끔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거기다 이스라엘이 지금 가나안 전쟁에 두려워할 것까지도 미리 아셨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당신의 언약 백성과 함께 할 때에 하나님은 얼마든지 큰 역사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게 한 것입니다. 당신의 입에서 나온 약속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성취된다는 점을 믿게끔 한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그만큼 가나안 땅에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당신에게는 물론 이스라엘에게도 너무나 중차대한 일임을 깨닫게 해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권능을 너무 쉽게 잊은 것이 가데스 바네야 거역사건의 첫째 원인이라고 흔히들 분석해왔습니다. 결과적 모습만 보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많이 부족한 해석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 홍해의 기적을 잊을 리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세계에서 아이큐가 제일 높은 똑똑한 민족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겪은 그런 기적을 단 한 번도 맛보지 않은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에는 전혀 의심하지 않고 또 잊지도 않습니다. 예수를 처음 믿고 얼마 동안은 기도한 대로 응답이 잘 됩니다. 우리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다 듣고 계신다는 증험을 쌓게 하려는 뜻입니다.
차츰 기도한 대로 이뤄지지 않는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거기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고난도 겹칩니다. 하나님이 이전에는 그렇게도 쉽게 해결해주었는데 왜 이러나 싶습니다. 지금 믿음도 자라고 교회 봉사 헌금 기도 많이 하는데 왜 이 간단한 문제도 해결 안 해주는지 새벽마다 불만과 의심이 쌓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능만 더 세게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수많은 기적을 보여준 것이 어쩌면 이스라엘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애굽을 말씀만으로 열 번이나 굴복시키고 바다를 가르고 반석에서 생수를 내시는 분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또 밀어 넣는지 이해가 안 된 것입니다.
믿음에서 치명적인 오류
본문의 이스라엘과 오늘날의 우리는 성정이 동일하고 연약한 믿음을 지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연약한 인간으로써 갖는 한계이자 믿음 생활의 결정적 오류는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호 인도하고 있다는 증거를 현재 되어져 가는 상황에서만 찾으려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데스 바네야 거역의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당장 눈앞에 가나안은 강력한 무기와 방어 체계를 갖추고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버티고 있습니다. 군인들은 모두 장대한 기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가 없어졌거나 약해졌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잊은 것이 아니라 눈앞의 상황에 생각이 함몰되어 그 생각이 자기를 지배한 것입니다. 가뜩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뒷전이 되었고 순간적으로 망각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스라엘은 고의로 그분을 잊은 것입니다. 일부러 그분을 떠올리려 하지 않은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이스라엘은 전쟁을 치르고 싶지 않은데 그 핑계를 현재 상황에 돌린 것이며 그 궁극적 원인을 하나님 탓으로 돌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꾸만 우리가 원하지 않는 너무나 힘들고 귀찮은 일만 하라고 요구하기에 눈에 보이는 어려운 여건을 구실로 삼아서 자기 책임을 모면하려는 것입니다. 다시 아이로 비유하면 청개구리이자, 베짱이 같은 것이 인간 존재의 근본특성이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신앙과 불신앙, 순종과 거역이 바뀌는 경계선은 지극히 얇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뜻입니다. 추악한 죄를 저질러서 불순종하는 것도 아니요, 역으로 따져서 기도 말씀 많이 본다고 순종을 잘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 그분은 우리 눈에 안 보입니다. 거기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든 상황을 풍요 안일 형통 편리하게 마련해주지 않습니다. 실은 죄에 찌든 인간들이 그렇게 만든 것인데도 그분께만 핑계를 댑니다.
그럼에도 기억할 것은 그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은 거룩하게 역사하면 특별히 당신의 백성과 한 시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에 안 보이는 그분의 주권과 섭리를 잘 분별하여서 진정으로 자기 전부를 그분께 헌신하는 몇 안 되는 그분의 남은 자들을 통해서만 큰 역사를 이루십니다.
범사를 그분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믿음이 성숙한 신자는 사방이 흑암으로 둘러싸여 있어도 오직 한 줄기 빛을 비취는 그분께만 모든 소망을 겁니다. 하나님도 그런 신실한 신자에게 엄청난 고난의 와중에도 당신이 함께 하여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시적 증거로 보여주십니다.
지금 가데스 바네야 사건에서도 그랬습니다. 심지어 정탐꾼 열두 명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 전부에게 당신께서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주었습니다. 정탐꾼들이 그 땅의 과실을 따서 보여주며 어떻게 말했습니까? 과연 젖과 꿀이 흐르고 있다고 했습니다.(27절) 하나님이 모세를 출애굽 소명으로 불러내실 때에 약속하셨던(출3:8) 대로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 약속으로 백성들을 위로 격려 고무시켰을 것인데 지금 모두가 그 약속의 땅이 틀림없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과 이후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어지는 28절에 “그러나 그들은 너무 강력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우리 믿음에서 항상 ‘그러나’가 문제입니다. ‘그러나’는 핑계를 대려면 반드시 붙여야 하는 접속사입니다. 열두 명 중에 열 명은 그러나 이후의 믿음으로 완전히 넘어가 상황에 핑계를 대었습니다. 두 명만 그러나 이전의 믿음에 남아서 상황을 구실로 삼지 않았습니다.
주목할 것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도 가나안이 강력하다는 사실을 부인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에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30절) 가나안이 약해 보였다면 이런 논의를 할 필요조차 없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당장에 진군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무사 안일하면 자기 믿음이 좋은 양 믿고 교회 활동에 아주 열심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열두 명의 정탐꾼들에게 똑 같이 두 가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엄청난 크기의 포도와 가나안의 강력한 군대였습니다. 포도는 당신의 약속이 반드시 이뤄진다는 증거였고 그것을 차지하려면 가나안 정복 전쟁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 족속을 우습게 취급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도 포도를 별로라고 여긴 것도 아닙니다. 똑 같은 것들을 보고 다르게 생각한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열 명은 하나님의 과실보다 가나안 적군을 먼저 본 것입니다. 두 명은 가나안 적군보다 하나님을 먼저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보호 인도한다는 증거를 보이는 상황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믿음이 연약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당신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언제 어디서 무슨 일에도 반드시 보여줍니다.
그럼 가데스 바네야에서 이스라엘이 거역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증거를 보여주었는데도 그들이 못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았으며 바로 그것이 불순종의 첫째 원인입니다.
지금 신앙생활에서 너무나 중요한 원리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은 결코 CC 카메라처럼 자동으로 24시간 360도 회전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두뇌의 지령에 따라 그 방향과 초점을 조정합니다.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강조했습니다.(마6:21,22) 네 마음이 네 보물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은 자신에게 아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부터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또 눈이 몸의 등불이므로 눈이 가는 대로 몸이 따라간다는 것으로 자기가 중하게 생각하는 것부터 보고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한 사람이 돈과 하나님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경고합니다.(24절) 눈이 동시에 두 개를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삶과 인생에 돈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면 돈부터, 하나님이 더 귀하다고 여기면 하나님부터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부터, 아니 그것만 보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간 세상에는 가시덤불이 많이 생긴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모든 이에게 그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도 당신께서 역사하고 있는 모습을 반드시 보여주십니다. 문제는 신자들마저 그 어려운 현실을 먼저 혹은 그것만 보면서 ‘그러나’라고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님의 남은 자들은 그분의 역사를 발견하여 묵묵히 순종합니다. 심지어 그러나 대신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와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리까지 헌신할 수 있습니다. 이 둘 중에 누가 하나님의 과실인 가나안의 포도를 차지할지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진짜 잘못
이제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한 이유가 분명해졌으며 오직 하나입니다. 그들은 자기기들이 보고 싶었던 것 하나만 보았습니다. 바꿔 말해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소명 의식이 전무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의 포도에는 관심도 없었고 그 안에 담긴 뜻은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이 두려움이 많아서, 혹은 믿음이 떨어져 하나님을 잊고서 불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온전한 믿음이 없었고 그래서 두려워진 것입니다. 불편하고 귀찮고 고달픈 일만 닥치면 환경에만 핑계 대는 것입니다. 그저 놀고 먹고 싶은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한 장관을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길 원했습니다.(민14:4) 다른 민족에게 노예 살이를 할지라도 시키는 일만 하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던, 다른 말로 머리 써가며 고민할 일이라고 없었던 그 놀고먹던 시절을 그리워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데스 바네야에서 전부 진멸하지 않은 것만도 너무나 다행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든 없던 자기 가치관에 따라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그럼 믿음이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 것입니까? 먼저 믿음은 하나님 중심으로 그 가치관 인생관 역사관이 완전히 뒤바뀐 것입니다. 믿음이 필요한 이유는 연약한 인간더러 평생토록 하나님 그분을 감사 찬양 경배 순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나와서 성실히 종교생활 한다고 그분께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도, 심지어 그런다고 온전한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떤 수고와 희생이 따르더라도, 설령 자기가 죽더라도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자기 인생에서 최고의 가치와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극상품의 포도가 너무나 귀하게 여겼으므로 강력한 가나안 군대와 얼마든지 싸우겠다고 각오 순종한 것입니다.
나머지 모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무 문제없이 다 해결해 놓으면 그 때 가서 순종해보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의 현실의 안락만이 믿음으로 얻을 최고 첫째 아니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대부분의 신자들도 지금은 내 코가 석자이니 조금 여유와 시간이 나면 하나님 일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하고 싶은 일만 그것도 편하게 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당장 하나님께 의심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 더러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같은 요술방망이 역할만 하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주인이고 그분이 나의 노예입니다.
가데스 바네야의 거역은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 없는, 실제로는 이미 받았고 피의 언약까지 행했음에도 그 소명을 우습게 여긴, 아니 오로지 편하게만 놀고먹으려는 가치관에 따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사건입니다. 그들에겐 온전한 믿음 자체가 없었으니 실은 불순종의 원인을 따질 필요조차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그런 신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장말로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스스로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남은 자가 되어서 그분께 기꺼이 순종하는지, 그분의 밖에서 조금만 힘들면 불평부터 하는지를 말입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이 나를 보호 인도하고 있다는 증거를 눈에 보이는 데서만 찾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그 증거조차 자기 마음에 들어야만 한다고 고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교회 생활 수십 년을 해도 그렇다면 그 얼마나 완악한 신앙입니까? 아니 신앙이라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믿음이 성숙되었다는, 엄밀히 말해 믿음 자체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입니다. 내 가치관, 인생관, 역사관이 정말로 하나님 중심으로 완전히 바뀌었는지 뿐입니다. 범사에 그대로 적용 실현하고 있는지 여부뿐입니다. 흔히 목사님들이 강조하듯 얼마나 교회 생활에 열심을 내는지, 말씀과 기도를 뜨겁게 하는지가 아닙니다.
매일 아침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지라는 뜻도 일상 삶에서 내 보물에 따라 내 눈이 가장 먼저 어디로 향하는지 점검해보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 쪽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하나님이 내가 바라는 대로 인도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아무 의심과 불평 없이 주님의 손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매일 간절히 찾지만 시선이 그분이 휘두를 도깨비방망이에만 맞추어져 있다면 아무리 종교적 도덕적으로 거룩하고 신령해보여도 실은 돈을 쫒아가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가데스 바네야에서 처참히 실패한 이스라엘의 전철을 따를 것입니다.
4/28/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