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14:26-35) 예수님을 위해 가족을 버리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다.
구약성경강해 (29) / 민수기강해(19) - 가데스 바네야의 불순종(9)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단정코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민14:26-35)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어야하지 않는가?
모세는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주고 가나안으로 진군할 것을 허락해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목숨은 살려주어서 그 기도의 반만 응답해주셨으나 광야로 되돌아가라고 명함으로써 모세의 기도의 반은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불의라고는 단 한 치도 개입되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이스라엘이 열 번이나 거역했으므로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27절)는 하나님의 분노도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후대의 신자들이 보기에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셨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습니다.
당신의 인자가 광대하므로 무조건 용서해주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를 지은 당사자들로 회개시키면 원래 맡은 소명에 더 충성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거기다 이스라엘은 처자식이 사로잡힐 것이 너무 염려되어 하나님을 거역했고 하나님도 바로 그 때문에 진노하셨다고 밝혔습니다.(31절)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가족을 위한 일이었다면 한 번쯤은 더 기회를 줄만한 여지가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고대의 전쟁은 일대일 백병전인데 슈퍼 거인 족속과 싸우면 승산은 없습니다. 주목할 사항은 아버지가 목숨을 바쳐 희생한다고 해서 처자식을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도 죽고 처자식은 노예, 첩, 강간 등 상상하기도 싫은 잔혹한 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밤새도록 울며 괴로워한 것입니다.
밤새도록 울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무리 궁리해 봐도 하나님 대신에 가족을 택하는 길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그와 같은 처지에서 모세나 갈렙 같이 가족을 버리는 결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랑이 식은 것도 아니며 순종할 마음도 큽니다. 그러나 가족에게 엄청난 피해가 심지어 죽음이 닥친다는 것이 눈에 빤히 보이는데도 앞으로 진전할 수 있을지 저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당신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이는 당신의 제자로 합당하지 않다고 선언했습니다. 제자가 선교사나 목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 명령을 주실 때에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고 했으니 모든 신자가 제자입니다. 그럼 가족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제자 즉, 신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출애굽의 소명을 받아 애굽으로 들어갈 때에 처자식을 미디안의 처가로 돌려보냈습니다. 아무리 모세를 찾던 자가 다 죽었으니 안심하고 돌아가라고 하나님이 가르쳐 주었어도 만에 하나 위급한 경우가 생길 것을 대비해 가족부터 챙긴 것입니다. 바울도 과부나 미혼인 자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고전7:8) 권면했습니다. 선교의 위험을 가족에게 지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미국 남침례교 교단에선 어린 자녀가 있으면 해외선교사로 파송하지 않습니다.
그럼 모세, 바울, 남침례교단 모두 비성경적이며 예수님 말씀을 거역한 것입니까? 이참에 주님이 당신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의 뜻을 정확히 정리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또 그래야만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뜻이므로 우리 모두 과연 그러한지 우리의 믿음을 진지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상대적인 인간사회의 윤리
안중근 의사가 할빈 역에서 한일합방의 원흉 이등박문을 암살해 여순 감옥에 갇혔습니다.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가 “엄마보다 먼저 죽는 것을 절대 불효라고 여기지 말라, 항소해서 일제에게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나라를 위해 당당하게 죽으라.”고 권했다고 전해집니다.
두 모자가 우리 같은 범인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대단한 의로움을 실현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따져서, 말하자면 가데스 바네야의 이스라엘에게 벌을 내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조금 더 깊이 살펴봐야 할 여지가 있습니다.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두 분의 의로움을 폄훼할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귀하게 여기는 모든 덕목들, 효도 우정 의리 자선 평등 포용 희생 애국 등등 심지어 사랑까지 상대적 가치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각각 나라와 시대와 문화 등에 따라 우열(優劣)의 구분이 있고 그에 따라 그 실천에 우선적인 순서가 생깁니다.
예컨대 백여 년 전만 해도 여성은 정치참여를 못했고 그렇게 금지하는 것이 대중이 인정하는 선이었습니다. 지금은 여성이 대통령인 나라들도 많습니다. 이조시대 한국은 칠거지 악(七去之惡)에 따라 아내를 버리는 것이 선이며 남편에게 잔소리하는 것조차 악으로 치부되었습니다. 지금도 여성에게 운전면허를 주지 않고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사회 혹은 나라 전체가 이성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아직 덜 발달된 탓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상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 더 결정적인 흠이 되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동일한 사회 내에서 그것도 한국과 미국 같이 깨인 나라에서도 여전히 윤리에 도덕적 우열과 순위가 매겨지며 그 결과 하나를 선택해 실현하면 반드시 다른 쪽에서 부정적 영향이 나타납니다.
안중근 모자의 경우는 애국을 최고이자 최우선으로 시행해야할 선이라고 선택했습니다. 비록 조마리아 여사가 그렇게 죽는 것이 효도라고 말은 했으나 평생 당신의 가슴에 슬픔은 지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 본인은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만 만에 하나 항소해서 사형이 되지 않고 무기징역의 선고라도 받았으면 또는 재판 기간이 늘어져 복역 중에 해방이 되면 남은 인생에 더 큰 업적을 쌓았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족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라고 해서 주님을 70%, 가족을 30% 나눠서 사랑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어떤 내용을 특별히 더 강조하려는 뜻으로 비교급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히브리어의 관용적인 어법입니다. 무엇보다 당시 제자들의 수준에선 주님이 구체적인 의미를 설명해봐야 정확히 못 알아듣기에 이해하기 쉽도록 간단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로 설명해서 알아듣고 그대로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당연히 그랬을 것입니다. 알다시피 주님은 설명보다 비유로 가르쳤고, 무엇보다 몸으로 치유와 섬김으로 가르쳤습니다. 결정적으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만 당신의 온전한 뜻을 온전하게 계시했습니다. 그마저도 진리의 영인 성령이 제자들에게 강림 내주 간섭함으로써 비로소 깨닫도록 해주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혹시라도 주님이 당신을 더 사랑하라고 했다고 교회봉사를 위해 가족은 뒷전에 두어도 된다고 해석해선 안 됩니다. 당신으로 인해 가족 안에 원수가 생긴다고 해서 교회 출석하는 문제로 가정에 분란이 생기고 이혼해도 된다는 식으로 적용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됩니다. 주님은 심지어 아버지의 장례식도 치르지 말고 당신을 따르라고 했는데(마8:21,22) 문자적으로 그대로 적용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간혹 목사님들이 신자는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제가 누차 가장 강력하게 말씀드렸듯이 신자는 주일을 포함한 일주일 내내 자신의 삶에서 자기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교회 중심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쉐마가 무엇을 말하는가?
구약성경에서 지금도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구절인 쉐마가 어떻게 말합니까?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다하라’고 즉, 100%를 동원하라는 말을 세 번이나 되풀이해서 강조했습니다. 마음과 성품과 힘은 지정의와 육체적 능력을 포괄합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70%, 가족을 30% 사랑하라는 뜻은 아예 없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앞 4절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고 합니다. 유일신 사상을 주장하는 숫자 개념에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기 전부를 동원해 사랑해야 할 유일한 존재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이 세상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들과 연결되므로 사랑은 하되 앞에서 말한 대로 상대적 사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상대적 사랑이라고 해서 그 사랑의 순수성이나 열정에서 모자란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한 쪽을 사랑하면 반드시 반대편에 부정적 결과나 영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100% 사랑하면 그분에게서도 100% 사랑이 되돌아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아무도 그분을 100% 사랑할 수 없고 또 온갖 탐욕이나 불순물, 심지어 죄악도 섞여있지만 그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에는 전혀 그런 것이 개입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그분이 먼저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었기에 우리도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그분을 사랑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오직 그분에게서만 오고 그분이 신자에게 베푸는 것에 온전한 사랑이 바탕을 두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꼭 기억해야 할 진리는 이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이며 또 그래서 절대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인간처럼 당신의 정성을 최대한으로 베풀어주어서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유일한 절대자께서 주시는 절대적 사랑이므로 온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이 땅에서 반드시 가장 먼저 절대적으로 찾아서 받아 누려야 할 유일한 사랑입니다. 한 인간이 살아가야만 할 유일한 절대적 가치와 의미는 하나님뿐이라는 것이 “오직 하나인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삶에 문제가 생기고, 그분을 모르고 살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 금령의 선포대로 정녕, 진짜로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분의 사랑과 비교해서 우열을 가리거나 우선순위를 둔다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완전히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제자들의 이해 수준에 맞추려다보니 당신을 더 사랑하라고 말한 것뿐입니다.
정작 선포하고 싶은 유일한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는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던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죄에 찌든 모든 인간은 그 유일하고 완전하며 절대적인 사랑 앞에 자기 모든 것을 드러내고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 심판을 받기 이전에 이 땅에서도 평생토록 온전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며 또 그래서 인간 사이에도 단 한 번도 온전한 사랑을 실현해 보지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죽음입니다.
아버지더러 죽으라고 명하는 아들
안중근 의사와 비슷한 경우이지만 내용적으로 완전히 다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오리겐의 아버지가 로마황제 숭배를 거절하는 바람에 투옥되었습니다. 오리겐도 함께 체포되어 순교하기를 바랐으나 그 어머니는 아들의 옷을 숨겨서 외출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오리겐이 옥중의 아버지에게 혹시라도 가족을 걱정해서 로마 황제에게 굴복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고 예수님의 믿음을 버리지 말라는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들이 아버지보고 떳떳하게 죽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을 낳았기에 아들 생명에 대한 권리가 일부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자식은 전혀 처지가 다릅니다. 자기에게 생명을 주신 부모더러 죽으라고 말할 권리는 아예 없습니다. 그럼 인간 세상에서 최악의 죄이자 싸이코패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경우는 애국과 효도 중에 애국을 택했습니다. 둘 다 인간 사회에 국한되는 도덕입니다. 반면에 오리겐의 아버지가 황제에게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거역하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만 하나님을 따름으로 죽음을 겪는 것과, 로마 황제에게 굴복하여 생명을 얻는 것 사이에 하나를 택한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비교할 대상이 없으며 비교하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인간은 욥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일 뿐입니다.
순교는 그래서 엄밀히 말해서 인간 쪽에서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을 또 꼭 그래야만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경우에 한해서 하나님이 이끄는 것입니다. 종교 계명을 지켜야 하는 신자로서 의무이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갚으려는 신의의 차원도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인간으로써 아주 큰 교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이 땅을 살아갈 가치와 의미가 하나도 없음을 몸으로 증명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 밖에 있으면 생물학적 분류로는 호모사피언스이긴 해도 짐승이나 물질과 같기에 그렇게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리겐의 아버지가 한번만 눈 질끔 감고 황제에게 굴복하고 풀려나왔다 쳐도 포악한 강도나 살인자로 살아갈 리는 만무합니다. 여전히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의인으로 살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황제와 하나님 중에 하나를 택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밖으로 나가느냐 하나님 안에 남느냐 중에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은 다시 말하지만 비교할 대상이 없고 절대적으로 전혀 다른 영역에 위치해 두어야 합니다. 신자가 겪는 모든 사물 사건 사람 환경 등을 예수 십자가 구원이라는 반석 위에서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열쇠 하나로만 해석 분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신자 인생의 출발지이자 도착지여야 합니다. 한마디로 신자는 범사를 그분 중심으로만 인생을 꾸려가야 합니다. 오리겐과 그 아버지는 하나님 밖에서 살아가는 것은 죽으면 죽었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라는 믿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약해졌다는 차원으로 봐선 안 됩니다. 가나안으로 진군하느냐 마느냐, 애굽으로 돌아가느냐 마느냐, 심지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느냐 마느냐 사이에 하나를 선택하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들이 거역한 이유는 오직 하나 처자식을 살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적 윤리로 결코 하자가 아니며 오히려 칭찬 받을 일입니다.
그런 인간적 윤리 이면에는 하나님은 필요 없다는 최종적인 결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바꿔 말해 이 땅의 삶이 전부라는 뜻입니다. 절대적 하나님을 버렸기에 절대적 차원에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 윤리가 긍정과 부정의 의미가 반씩 드러나는 이유도 이 땅과 그 안에 사는 인간이 상대적이고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죽음 이후의 절대적 영역과는 연결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고안한 종교로는 구원은 아예 불가능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오리겐도 그 아버지도 로마 황제에게 굴복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편하게 산다고 해서 우리 중에 아무도 잘못했다고 정죄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또 인간이 고안한 종교가 아무리 경건해도 절대로 다른 인간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그분만이 그를 심판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세상만사와 인간 일생을 절대적으로 거룩하게 통치하는 맥락에서만 이뤄집니다.
오리겐은 아버지 집안 걱정하지 마시고 제가 대신 책임지겠다는 위로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완전히 떠나서 하나님 앞에 연약한 죄에 찌든 동일한 인간이라는 입장에서 똑같은 위치에 서있는 다른 인간에게 권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게 생을 마감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도 지금 그렇게 다짐하고 있겠지만 혹시라도 가족 때문에 망설여진다면 그러지 마시라고 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자기도 언젠가 순교하여 천국에서 다시 뵐 수 있으리라 믿고 있으며 그랬으면 좋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자식에게 전해야 할 쉐마
예수님의 당신을 가족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면 가족도 그 다음에 조금 약하게 사랑해도 된다는 뜻이 됩니다. 정말로 성경이 즉,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주님보다 약 1500년 전의 말씀인 쉐마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럼 그 다음에는 가족도 사랑하라는 말이나 최소한 그런 의미를 내포한 말씀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언급은 전혀 없고 “이 말씀을 너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신6:5,6)고 명합니다. 자식도 하나님을 부모처럼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자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사랑하게끔 키우는 것이 사실은 온전한 자식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부모가 죽을 때에 자식에게 딱 하나만 물려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사랑이라는 것이다. 오리겐의 아버지가 오리겐에게 물려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선 평소에 그 아버지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았던 본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종교 생활에 열심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형통이 얼마나 덧없는지 그와 대조하여 예수 안에서의 삶이 얼마나 기쁘고 보람찬지 생생하게 눈으로 보게 해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따르고 싶다는 결단과 실천을 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 외에 인생에 아무 소망이 없음을 철두철미 알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없으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부자 관계도 사실은 상대적인 불완전하고 때로는 죄가 개입되는 왜곡된 사랑의 관계로 그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원죄 하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시편 3:3에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다.”라고 찬양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찬양인 것 같으나 그 시를 지은 배경을 보면 아주 흥미롭습니다. 표제에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들이 반역을 일으키고 황급히 피난하면서 지은 시입니다.
아비 다윗은 그럴 마음이 없지만 부자간에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하고 있고 결국은 둘 중 하나가 죽어야 결말이 납니다. 참으로 가슴이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실망감 배반감으로 극심한 분노도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매순간 이스라엘 왕이 무슨 소용이 있나 인생을 완전히 헛되게 살았다는 후회와 탄식이 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주가 다윗의 방패가 되어주면 아들은 망합니다. 그런데도 그런 주가 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인간적 윤리로는 말이 안 됩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압살롬을 미워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자신의 후처와 천륜을 거슬리는 죄를 지었어도 부하들에게 너그러이 대접하라고 했고 군대장관 요압이 그 명령을 어기고 죽였을 때는 슬픔에 못 이겨 통곡으로 지샜습니다. 오죽하면 요압이 반역자를 그렇게까지 애도하면 백성들 보기에 안 좋고 왕으로서 행할 바가 아니라고 간언할 정도였습니다.
다윗은 이미 자식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27:10)라고 고백했습니다. 실제 아버지인 이새가 자기를 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부모 자식 관계도 결코 완전한 사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버리든, 자식이 천륜을 어기며 부모를 배반하여 죽이려는 인간사회에서조차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어도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이 다윗은 자기 인생에서 절대적이고 완전한 가치와 의미가 되는 유일한 분이라고 찬양한 것입니다.
가데스 바네야에서 모세와 갈렙 등은 “하나님만이 절대적 유일한 영광이므로 내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겠고 우리 자식들도 그렇게 하도록 양육하겠습니다. 여호와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임을 그들로도 삶에서 실현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한 셈입니다. 쉽게 말해 자식들이 다 죽더라도 여호와께 영광이라고 한 것입니다. 자식더러 하나님 안에서 죽으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식들의 이 땅에서의 평안한 삶을 추구하며 살라고 즉, 하나님을 버리더라도 이 땅이 전부이고 사후의 심판과 구원은 없다고 가르치는 셈입니다.
이스라엘의 결정적인 잘못
모세와 갈렙 등이 어떻게 그런 믿음의 자리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까? 다른 것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분명히 자기 옛사람이 죽었다 새 사람으로 되살아나는 체험을 실제로 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밖에서의 삶이 아무 소망이 없고 죽음뿐이라는 그 진리를 실제로 철두철미 겪어보지 않고는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했습니다. 당신께서 실제로 죽었기에 우리가 살았습니다. 그분은 법적으로 따지면 우리더러 얼마든지 죽으라고 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이 진리를 확신한다면, 아니 주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그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참 생명을 선물로 받은 자는 주님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기꺼이 주님 가신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만이 참 기쁨이자 의미임을 이미 몸 전체로 알고 각인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야만 바울처럼 하나님을 부득불 따른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내게 화가 된다고 당당히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도 당연히 부모와 자식을 내 몸 이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 죽음까지 불사해야 합니다. 만약 이스라엘도 자기들이 죽고 처자식이 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아주 선한 것입니다. 나아가 그럴 리는 없었겠지만 조마리아 여사가 안중근에게 항소하라고 권했어도, 오리겐이 잠시 로마황제에게 굴복하는 것처럼 하라고 편지를 보냈어도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의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짜 결정적인 잘못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까지 참아야 하느냐고 열 번이나 거역하였다고 진노하게 하여 당신의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탓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열 번을 거역할 것입니다. 정말로 슈퍼 거인 족속에게 다 죽었다고 판단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밤새 곡하면서 울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철야 기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발 도와서 살려달라고 다윗처럼 여호와가 나의 방패가 되어서 처자를 보호해달라고 매달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곡만 했다고 합니다. 장례식에 울어야 할 울음을 울었습니다. 우리 모두 다 죽게 되었다는 탄식만 밤새 했습니다. 기도를 안 했어도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는 하지 말았어야 하며, 그것도 아니면 모세 일행을 죽이려 들지는 말았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하나님은 다시 기회를 주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곁에는 밤새도록 하나님은 완전히 부재했고 그들은 인간사회 윤리조차 무시했습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회개할 기미가 보였다면 하나님이 다시 가나안 진군의 기회를 주었을 것입니다. 열 번이나 거역했다는 것도 완전 수의 개념처럼 열 번이나 당신의 명령을 어겼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열 번이나 당신의 은혜를 받았으면 그 때마다 자기들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회개했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열 번이나 거역할 리도 없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렸지만 당사자가 회개만 하면 하나님은 언제든 다시 기회를 주려고 기대하며 기다렸으나 이스라엘은 전혀 그럴 뜻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이 무엇입니까? 언제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겸비한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잘못과 죄악을 털어놓으면 얼마든지 다시 기회를 준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우리가 어떤 잘못과 죄를 저질러도 그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에는 한 치의 가감 변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 쪽으로만 향해 있고 그분의 십자가 은혜 안에 거하고만 있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봐도 너무 어리석고 수시로 죄악에 넘어지는 부끄러운 모습이지만 주일 예배 하루만이라도 신령과 예배를 드린다면 말입니다. 아니 이미 예수를 믿는 순간에 그분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사랑 안에 붙잡혀 있으니 그분의 사랑에 가감 변동이 있다는 것을 가정 상상하는 것조차 잘못입니다.
자 그럼 부모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어느 쪽이 더 중요하고 우선입니까? 부모의 장례는 인간 사회에서 최고의 덕목입니다. 예수를 따른다고 순교를 강요하지 않는 상황에 살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배타적 꼴통 어리석은 자를 넘어서 광신자라는 비방 멸시와 알게 모르게 핍박도 따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리겐 부자 같이 죽음까지 불사할 수준은 아니라도 예수님을 결코 버리지는 않습니다. 예수님만을 주인으로 삼는 것이 한 인생이 제대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요, 한 가정이 정말로 아름답고 참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6/16/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