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1:26-30) 자기 소원을 이루려 최선을 다해라.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3)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우리가 어디로 가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신1:26-30)

 

허사가 된 정탐

 

신명기는 “마흔째 해 열한째 달 그달 첫째 날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명령을 다 알렸으니”(1:4)라고 시작합니다. 출애굽 후 40년이 지난 뒤 가나안 정복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을 상대로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다시 가르쳤다는 뜻입니다. 책 제목도 그래서 한자로 하나님 ‘신’(神)이 아닌 ‘되풀이한다’는 신(申)입니다. 

 

그런데 바로 앞 2절에 “호렙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고 문맥과 상관없어 보이는 말씀이 나옵니다. 호렙산은 모세가 처음 율법을 받은 곳이고 가데스 바네아(이후 ‘가데스’로 약칭함)는 가나안 땅의 관문입니다. 출애굽에 실현된 하나님의 권능을 온전히 믿고 또 처음 받았던 율법에 계시 된 그분의 뜻에 순종했다면 열하루 후 곧바로 가나안에 입경할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아서 사십 년이나 지체되었다는 뜻입니다. 

 

잘 알다시피 가데스에서 하나님의 진군 명령을 어긴 죄로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방황하다 죽는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반역 때 전쟁에 참여할 수 없는 20세 미만과 또 광야 방황 중에 태어난 새 세대는 심판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모세는 지금 신세대에게 앞으로는 그런 잘못을 다시는 범하지 말라고 독려하려고 40여 년의 여정 동안에 있었던 많은 일들 중에 가장 먼저 그 사건부터 회상했습니다. 회상한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재평가한다는 의미이므로 오늘날 신자도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온전히 순종하려면 모세가 분석한 본문의 의미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데스에 도착하자 모세는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명령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나 정탐꾼을 먼저 보내어 정세를 살피자는 백성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정탐꾼들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이 좋더라고 보고했습니다. (19-25절) 

 

가데스 사건을 상세히 기록한 민수기는 모세가 여호와의 지시를 받고서 백성들에게 정탐꾼을 보내라고 명령했다고 말합니다.(민13:1,2) 모세가 40년이나 흘러서 기억이 가물가물해져 사실과 다르게 말한 것이라기보다는, 제안을 받고 모세가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허락해 주었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해석학적으로는 민수기는 가나안 정복이 하나님의 뜻임을 명확히 밝히려 했고, 신명기는 신세대에게 아버지 세대가 어떤 잘못을 범했는지 정확히 가르쳐야 했기에 강조하는 초점이 달라진 것입니다. 

 

모세는 그래서 너희 아버지들이 그 땅을 정탐하자고 먼저 제안했고 모두가 아주 좋다고 평가했다는 사실부터 꼬집어서 말한 것입니다. 전쟁을 전제로 정탐했다면 다음 단계는 반드시 수집한 정보에 따라 전쟁 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 정탐하자마자 곧바로 올라가기 싫다고 했으니까 시간 낭비를 넘어서, 어쩌면 처음부터 가나안에 입경할 소망이 그리 절실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원망은 핑계

 

백성들로선 그 땅은 차지하고는 싶어도 가나안 주민들은 장대하고 성읍이 견고하며 무기도 엄청나서 싸워서 이길 확률이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뒤집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주민들이 왜소하고, 성벽도 없이 허름한 집에 살고 있고, 군대가 없거나 연약한 곳으로 인도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논리적으로도 아예 말이 안 되는데 땅이 비옥하고 살만한 곳이니까 그 땅을 지키려고 철저하게 방비할 것인데, 그런 방비가 없다면 살만한 가치가 없는 땅이므로 하나님이 인도할 리도 없습니다. 

 

그들이 여호와가 애굽에 내린 열 재앙과, 홍해를 가르고 맨땅을 걸어서 건너게 해주신 기적에서 그 권능이 얼마나 엄청난지 경험한 지 겨우 2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신2:14) 가데스에 도착하는 그 기간에도 불과 구름 기둥으로 광야에서 보호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주리지 않게 해주었고, 생수로 갈증도 해소해 주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함께하니까 두려워 말고 들어가 차지하라고 명하는데도 대놓고 싫다고 합니다. 

 

물론 이스라엘 나름의 사정은 있었습니다. 아이, 노약자, 여자들이 함께 온갖 생활 도구와 가축을 끌고서 마치 거지 떼처럼 행군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난 사백 년 동안 전쟁 경험이 한 번도 없었고 제대로 된 무기조차 없으니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외부 여건이나 자극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라 가치중립적이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 두려움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관건인데 당연히 함께 모여서 하나님이 베푸신 권능을 다시 회상해야 합니다. 또 가나안 족속이 장대하니까 홍해처럼 기적적으로 무찔러 주거나, 자신들에게 담대히 싸울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전혀 그러지 않았고 대뜸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27절)라고 불평부터 내었습니다. 

 

부모가 아들에게 특전사에 입대하라고 명하면 훈련과 군기가 너무 빡세서 큰 두려움부터 생길 것입니다. 그래도 제대로 된 자식이라면 아빠가 자기를 강건하게 키우려는가 보다 여기고 감수하든지, 최소한 일반 군대로 가고 싶다고 호소할 것입니다. 아빠가 자기를 미워해서 일부러 죽도록 고생시키려 한다고 원망을 퍼붓고는 병역기피 하겠다고 덤비는 미련한 자식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그렇게 대드는 꼴입니다.

 

그러나 가뜩이나 머리 좋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금방 잊어먹었을 리는 없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미워해서 일부러 죽이려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자신들도 잘 압니다. 홍해의 기적을 체험한 직후 미리암이 주관하여 역사상 최초이자 최대의 찬양 집회를 벌였습니다. 출애굽한지 두 달 후에는 시내 산에 도착하여서 하나님께 제사장 나라로 순종하겠다고 피의 맹세까지 했습니다.(출19:1, 24:8) 하나님이 자기들을 정말로 미워한다면 애굽에서 죽도록 노예로 고생시키지 굳이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 가나안과 싸우기 너무 싫으니까 하나님 탓이라는 핑계를 대고 무조건 거역한 것입니다. 

 

평안만 소망함

 

그렇다고 그들의 믿음이 적었다고 쉽게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역설적으로 따지면 그들은 오히려 홍해의 기적에 매우 심취해 있었던 셈입니다. 전쟁 경험이 없고 무기도 변변찮은 자기들은 가만히 있고 홍해 때처럼 하나님이 그런 엄청난 능력으로 가나안 족속을 깔끔하게 처리해달라는 불만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그런 뜻을 드러냈습니다. 민수기에 따르면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3)는 불평부터 터뜨렸습니다. 칼에 쓰러지게 되는 것 즉, 해봐야 질 것 뻔한 전쟁을 왜 치르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거기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편이 더 좋다고 자기들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골치 썩을 일 없이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노예로 사는 것이 육신은 피곤해도 훨씬 좋다는 뜻입니다. 생계는 주인이 책임지니까 무사 무탈하게 수명대로 자연사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애굽에서 아무 탈 없이 평안하게 살고 있었는데 왜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개고생을 시키고 자식까지 다 죽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평생 애굽의 노예가 되어도 좋지만, 전쟁은 죽어도 싫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는 틀림없이 너무 힘들다고 불평하면서, 자식들만은 노예의 멍에를 벗게 되기를 소원하면서 우리만의 나라를 세워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들의 생명이 위협받게 되자 다시 노예가 되겠다고 자청하면서 이젠 애꿎은 자식들까지 방패로 내세운 것입니다. 모세는 사십 년 전에 그들의 불평을 정확히 기억하고서 지금 신학적으로 그 말에 숨겨진 의미를 신세대에게 올바르게 풀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말에 “쇠똥에 뒹굴어도 이생이 좋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존재가 멸절되어 완전히 끝나니까 아무리 고생하고 천대받아도 이 땅에서 오래오래 사는 편이 훨씬 좋다는 뜻입니다. 사후의 영원한 세계는 없고 인간은 물질계 안에 제한받는 물질적인 존재라는 인식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최대한 장수하며 풍요롭게 사는 것이, 그럴 능력이 없으면 최소한 무탈하게 사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목적인 인생관입니다. 

 

이스라엘은 “쇠똥에 뒹굴어도 이생이 좋다”는 식으로 “노예가 되더라도 애굽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 속담과 유일하게 다른 점은 인생사를 주관할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존재만 인정한 것입니다. 그것도 그분이 자기들 뜻대로 형통이나 무탈을 보장해 줄 때 한해서만 말입니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여호와를 따르지도 믿지도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고난을 허락하거나 묵인하면 하나님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호와를 자기 명령대로 따르는 종으로 취급하는 꼴입니다. 

 

하나님 그분이 자기들에게 무엇을 바라고 당신만의 어떤 신묘하고 거룩한 축복을 주실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들 나라를 세워서 처음으로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 좋긴 해도 자신의 무사 형통만큼 좋은 일은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바라는 소망도 도깨비방망이 뚝딱 식으로 기도만 하면 모든 문제가 자기들 바라는 대로 해결해 주거나, 아예 미리부터 분홍빛 카펫이 깔린 길로만 인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기도만 하면 매사에 대박이 넘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다름없다. 

 

불행하게도 출애굽 일 세대만 그런 불신앙으로 불순종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내내 그랬습니다. 자기들 뜻대로만 행하려고 우상숭배에 열심을 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자기들만의 나라까지 멸망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과 삼 년간 동고동락하며 천국 복음을 직접 배운 제자들도 가데스의 이스라엘과 크게 다를 바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유일하게 달랐던 점은 스승이 로마의 지배를 물리치고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해 준다면 자기들 목숨도 바치겠다고 따라나선 것입니다. 가데스의 이스라엘과는 달리 애굽으로 돌아가 노예가 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의를 보였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스승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관원, 말고의 귀를 칼로 벰으로써 그런 결의를 행동에 옮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국의 회복도 결국 이 땅의 형통에 해당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참뜻에는 귀를 막고 자기들 뜻대로 하나님이 따라주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스승이 초자연적인 권능을 발휘해 주지 않자 곧바로 다들 배반 부인하고 스승을 버렸습니다. 자기들은 손 놓고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다 해주어야 한다는 심보는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습니다. 로마의 노예는 되지 않겠다는 제자들의 처음 결의도 자기 목숨이 걸리자 완전히 휴지 조각이 되었습니다.

 

솔직하게 따지면 모세의 신학적 분석이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것입니다. 가데스의 이스라엘이나, 마지막 날 밤에 스승을 부인하고 도망간 제자들보다 우리 믿음이 좋다고 절대 자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많은 신자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첫째 목적을 기도해서 자기 고난과 문제를 해결 받는데 둡니다. 하나님의 그런 역사에 방해되지 않도록 주일 예배에 성실히 참석하고 어려운 교회 성도를 돕습니다. 예배 참석하고 교회 봉사하는 일 자체는 아주 의롭지만, 그렇게 하는 일부 신자들의 속내가 현실의 무사 무탈이니까 큰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도 그렇게 기도하므로 신자들의 기도는 차원이 완전히 달라야 한다고 확실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는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우선 신자더러 교회 생활에 열심히 충성하라는 단순한 뜻은 아닙니다. 한마디로 줄이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정체성을 지녔다면 그 새로운 정체성대로 살아가는 일에 꼭 필요한 일들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현실 삶을 자기 뜻대로 꾸려가는 것이 인생의 최우선 목적이었습니다. 만약 예수 믿고도 그런 목표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능력만 빌리겠다면 사실상 불신자에 머무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대상의 이름만 천지신명이나 하느님에서 하나님으로 바뀐 것뿐입니다. 하느님과 하나님이 무엇이 다른지도 모르고 여전히 하느님께 기도하는 신자도 있습니다. 바울처럼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이름만 높이며 살고 있는 신자가 너무 드뭅니다.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는 이스라엘의 불평을 우리의 언어로 바꿔 보겠습니다. “저에게 믿음을 주셔서 교회로 부르셨으면 고난과 문제를 다 해결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굳이 남들보다 더 부요하고 형통하는 복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단순히 고난에서 구해달라고 그렇게 오래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아직 묵묵부답이고 새로운 문제가 더 생기니 저를 미워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교회에서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고 힘에 부치도록 헌금했습니까? 차라리 믿지 않았을 때가 더 좋았기에 교회에 계속 출석할 의무도 필요성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최근 갈수록 현실 삶이 녹녹지 않아 그렇게 원망하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현실 고난이 원죄로 타락한 세상 사람들의 잘못은 물론 신자 자신의 탐욕이나 죄 때문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현실적 고난을 두고 자기 잘못부터 되돌아보거나, 최소한 그 배후의 하나님 뜻에 대해 영적으로 분별해 보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미리 막아주지 않았고, 사후에라도 빨리 해결해 주지 않는 하나님이 모든 문제의 첫째 원인이 됩니다. 기도하면 당장 뚝딱 해결해 주어야 하는데도 왜 초자연적 능력을 사용하지 않느냐는 불만을 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근본 인식이 가데스의 이스라엘, 아니 예수님이 경고하신 이방인들과 하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 전부를 버려라.

 

일부 신자들의 믿음이 이렇게 도깨비방망이 식이 된 데에는 솔직히 일부 목회자의 잘못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고 힘주어서 강조하려다 보니까 신자 본인의 뜻은 전부 무시하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현실 삶에 대해선 기도할 필요가 없거나 나아가 자신의 개인적인 소원과 계획을 세워선 안 되며, 자신의 모든 문제와 고난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대로만 따르라고 합니다. 최소한 간절히 기도해서 그분의 뜻을 물어 응답받은 후에 그대로 순종 실현하라고 합니다. 

 

그런 가르침이 함의하는 기본적인 영적 의미와 원리가 절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그런 가르침대로 기도만 하고 손을 놓고 있었더니 솔직히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도의 응답은커녕 현실 삶에 별다른 진전도 없고 오히려 더 나빠질 질 때가 많아서 하나님의 선하고 의로운 인도를 받고 있다고 사실상 체감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전부를 내려놓고 그분의 적극적인 개입을, 최소한 확실한 뜻을 깨우쳐 주기를 기다렸으나 감감무소식입니다. 그 결과 자신의 믿음이 약하거나, 기도의 양이 채워지지 않았거나, 기도를 잘못했나보다 죄책감만 생깁니다. 

 

자신의 그런 믿음이 사실은 이스라엘이 가데스에서 손 안 대고 하나님이 대신 코 풀어주기를 바랐던 것과 똑같으리라고 꿈에도 깨닫지 못합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분명히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쉽게 이길 것 같으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아낙 자손 같은 장대한 적에게 겁을 먹고 있는 사정은 이해하지만, 너희도 애굽에서 노역으로 강건해진 육신을 가졌으니까 절대 꿀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점령하려면 어차피 어렵고 힘든 전투를 계속 겪어야 하므로 두려워 말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손쉬운 승리를 줄 수도 있으나, 기적과 무관하게 그분이 반드시 승리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라는 말씀이 모든 전투를 그분이 기적으로 승리케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애굽에선 노예였기에 그들을 대적할 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했기에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은 당신의 큰 능력과는 별개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지키려고 적극적으로 나선 것입니다. 거기다 애굽과 바로에게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증명하려 한 것입니다. 애굽의 우상 신들이 너무나 헛되고 무력하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려고 기적을 동원한 것입니다. 고센 땅에 살아서 그 열 번의 재앙에 대해 소문만 들었던 이스라엘에게도 당신의 권능을 직접 체험시키려고 의도적으로 광야 길로 인도해 홍해의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먼저 가시는 하나님”이라는 말도 그분의 계획이 먼저 세워져 있기에 승리는 반드시 보장된다는 뜻입니다. 가나안 입경은 너희 선조인 아브라함과 사백 년 전에 언약한 것이고, 그 약속대로 때가 차서 이제 실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실현의 보장으로 그동안 기적들을 보여 주었으니 안심하고 진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승리는 하나님이 확정해 놓았으나 실제 전투는 이스라엘의 몫입니다. 

 

여호와께 속한 전쟁.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승리였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도 다윗이 물매 돌 다섯을 가지고 사즉생의 각오와 믿음으로 담대하게 골리앗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그 어린 다윗에게 무서움과 두려움이 없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곰이나 사자도 급소를 맞추어서 격퇴한 체험이 많은 돌 팔매질의 달인이었습니다. 정식 무기로는 도무지 골리앗에게 이길 수 없기에 합리적인 정탐을 통해서 갑옷이 덮지 못하는 이마가 유일한 약점이라고 결론 내리고 정확하게 그곳을 맞추어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이 행한 역사는 그가 실수하지 않도록 막아주었고, 그 전에 이 전투를 위해서 목동 일을 하는 동안에 돌 던지기 달인으로 준비 훈련시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무엘로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을 이스라엘의 목자로 택하게 해서 기름을 부어준 것입니다. 

 

비록 어렸어도 하나님의 연단으로 이미 믿음이 깊어진 다윗인지라 골리앗과 맞서기 전에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7) 다시 강조하지만, 그가 가만히 있는데도 기적적인 승리를 일으켜 준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다윗은 살 떨리는 전투를 직접 행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구원이 칼과 창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칼과 창으로 승리가 결정되면 하나님이 개입할 필요가 없고 골리앗이 무조건 이겨야 합니다. 가데스에서도 이스라엘 혼자서 싸워야 하고 또 가나안이 무조건 이겨야 합니다. 전쟁이 여호와께 속했다는 말은 당신의 뜻을 깨달아 순종할 때만 승리를 보장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완벽하신 계획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일꾼으로 들어 사용하는 그분의 전쟁이라는 뜻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도 약 천 년 전에 이스라엘의 선조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실현하기 위한 주권적 섭리로서, 다윗은 하나님을 대리한 용사였던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지만 먼저 가시는 하나님이 실제로 다윗과 함께 골리앗과 맞서주었고 또 그래서 단 한 방으로 정확하게 급소에 명중시킨 것입니다. 

 

다윗과 달리 가데스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첫째 이유는 전쟁은 여호와께 속해도 실제 전투는 자기들이 행해야 하는데 그럴 시도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전쟁은 이미 4백 년 전에 계획된 것이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앞장설 것이며 승리도 이미 확보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 그런 뜻으로 이스라엘을 독려했으나, 그들은 그저 게을러서 어떤 문제나 위험과도 마주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데스까지 여호와를 따른 것도 광야에서 굶어 죽지 않고 아무 고난 없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 전투에서도 아무런 문제와 고통이 없게 해주어야만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기들을 미워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자기들이 하나님을 미워해도 자기들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랜 기도가 응답이 안 되면 이제 내 마음대로 해도 하나님은 나를 탓할 수 없다는 오늘날 일부 신자의 심보 또한 바로 그러합니다. 

 

정작 완전히 버려야 할 것.

 

자기를 버려야 한다는 신앙 자세를 이제는 완전히 새롭게 바꿔서 기도에도 올바르게 적용해야 합니다. 신자도 자기 소망과 계획과 뜻을 가져야 하고 무조건 전부 버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지금은 신구약 성경이 완비되었기에 제대로 공부하면 하나님의 기본적인 뜻과 원리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음성으로 들려주는 직통 계시가 유보되어서 기도한다고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과 계획을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경건하고 기도의 은사를 받아도 그럴만한 영적 천재를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당신과 대화하듯이 교통한 사람은 구약에선 모세 한 명과, 모세를 닮은 메시아로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뿐입니다. 

 

신자는 무엇이든 소원하고 계획하여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했지, 그것만 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신자 이전에 자기 인생에 대한 소망, 뜻, 계획조차 없으면 인간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것을 합리적 이성으로 세워서 굳은 의지로 실행 수정 보완 성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짐승과 다른 것입니다. 

 

진짜로 정작 버려야 할 믿음의 자세는 자기가 기도한 대로 응답받겠다는 끈질긴 고집입니다. 가데스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까닭도 하나님이 미리 기적으로 청소해 주지 않으면 들어가지 않겠다는 고집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자기 나라를 세워 자유롭게 살고 여호와도 마음껏 경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모든 방식과 때가 자기들 뜻대로만 되어야 하니까 하나님을 종으로 부려 먹으려는 완악한 성향이 근본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죄로 바벨론에 멸망 당해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의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 왕의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아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질 운명에 처했습니다. 살아날 방도는 전혀 없고 불에 던져지기 직전에 왕에게 당당하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7,18)

 

우선 여호와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기적을 신자가 기도한다고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절대적 주권에 따른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바람 내지 기도를 수정했는데, 정확히 말해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도 하나님에 대한 자기들의 인식은 전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든, 지금 아무런 기적적 개입이 없이 불에 타서 죽게 버려두더라도 가 자기들의 평소에 가졌던 인생의 목표와 인생관에 추호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중심으로 최소한 최우선으로 삼아서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기에 우상 신에게 절대로 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자기만 높이려 들었던 원죄로 타락한 죄의 본성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새롭게 받은 영혼에 따라서 새로운 인생관을 세웠기에 어떤 현실적 고난 앞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자신의 소망을 이미 하나님의 소망에 완전히 일치시켰기에 자기 소망을 버릴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그렇게 바뀐 자기 소망을 실현하려고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가나안 입성을 하나님 언약의 실현이라고 그분 중심의 인생관으로 평가했다면. 가데스에서 어떤 위험이 기다려도 일단 진군했을 것입니다. 그저 자기 평안과 형통만을 인생 목표로 삼았기에 꽁무니를 빼는 정도가 아니라 애굽으로 되돌아가려 한 것입니다. 그러고도 신앙 양심에는 찔려 온갖 치사하고 비겁한 핑계만 댄 것입니다. 지금 그들을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은 기도로 자기 형통과 풍요만, 그것도 대박의 축복으로 응답받기만 고집하는 신자는 죄송하지만, 계속 광야에서 방황하다 죽을 것이라고 본문에서 모세가, 아니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엄숙히 선언한다는 것입니다. 

 

(4/21/2024)  

 

master

2024.04.23 14:26:08
*.115.238.98

음성 설교에서 출애굽하여 가데스에 처음 이르는 동안의 기간을 잘못 설명했기에 원고에 고쳐 놓았습니다. 나이가 드니까 몇 번 확인해도 착오나 오류를 지나치고 넘어가는 경우가 간혹 생기네요. ^0^ 

성경탐닉자

2024.04.27 00:14:42
*.235.7.57

'평안'만 소망함

 

소제목을

 

'편안'만 소망함

 

으로 바꾸는 게 어떨까요?

 

평안은 그 분 아래서 고요히 있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는 의미가 큰데 '편안'은 육적 편안함의 의미가 크게 느껴져서요.

 

해당 말씀부분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나태함은 평안라기보다는 편안추구 같아요

평안은 신자라면 마땅히 추구해야하는 것 같은 용어느낌이라서요 

 

master

2024.04.27 03:29:08
*.115.238.98

저도 설교 내용(본문)에서부터 편안과 평안 중에 어느 단어를 사용할지 조금 고민을 했으나, 제가 강조하려는 내용이 무사무탈만 추구한다는 것인데, 무사무탈을 대변하는 한 단어가 편안(便安 - 편리하고 안전, 문명에 의존한다는 이미지가 있음)보다는 평안(平安 -평화롭고 안전함, 아무 걱정 염려가 없다는 의미가 강함)이 나은 것 같아서 평안이라고만 설명했습니다. 설교 (소)제목은 그 내용과 통일 시켜야 하는데 설교 중에 편안이라는 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고 평안이라고만 했으므로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평안을 구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자신의 평안과 형통만 구한다면 사실상 불신자인 셈입니다. 그래서 제목도 "평안을 소망함"이 아니라 "평안만 소망함"이라고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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