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1:40-46) 하나님을 불순종해도 멸시하지는 말라.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4)

 

너희는 방향을 돌려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하시매 너희가 대답하여 내게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 하고 너희가 각각 무기를 가지고 경솔히 산지로 올라가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너희가 대적에게 패할까 하노라 하시기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거리낌 없이 산지로 올라가매 그 산지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이 너희에게 마주 나와 벌 떼 같이 너희를 쫓아 세일 산에서 쳐서 호르마까지 이른지라 너희가 돌아와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 너희가 가데스에 여러 날 동안 머물렀나니 곧 너희가 그 곳에 머물던 날 수대로니라.”(신1:40-46)

 

바나나 같은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가데스 바네야에서 하나님을 배역했던 일로 모세, 갈렙, 여호수아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출애굽 첫 세대 전부가 심판받았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서 당신의 백성들로 당신만을 맘껏 섬길 수 있는 나라를 세워주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38년(신2:14)이나 지연되었습니다. 

 

그들이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마음을 다잡고서 가나안으로 진격했는데, 하나님은 못 이긴 척하고 용서해 주었더라면 그런 지체를 피할 수 있었으나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싸움에서 무참히 패배하게 했고 광야만 오랫동안 방황하다가 모두 죽게 했습니다. 신자들이 구약에서 이런 기사를 접하면 자기도 모르게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계명을 어기면 반드시 엄중한 벌을 주는 무서운 존재라는 인식이 생깁니다. 과연 그러한지 앞뒤로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차 가나안 진격 명령을 거부한 이스라엘에게 “방향을 돌려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지니라”(40절)는 새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 번 거역해 꾸중을 듣고도 재차 거역했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폭발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가데스에 도착하기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참고 또 참으셨습니다. 

 

가데스에서 광야 방황의 심판을 내리면서 하나님은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했다”(민14:22)라고 한탄했습니다. ‘이같이’라고 말씀했는데 실제로 출애굽 후 가데스의 일차 반역까지 합치면 성경 기록상 정확히 열 번입니다.

 

당신의 이적을 보고도 열 번을 시험했다고 하나님이 꾸중한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애굽이 열 번의 재앙을 겪고도 심지어 마지막에는 모든 장자가 죽는 벌을 받고도 열한 번째에 홍해까지 추적하며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당신의 백성들도 똑같이 열 번을 시험했으므로 하나님의 인내 한계를 넘어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거역한 횟수가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애굽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기에 끝까지 완악하게 거역하는 모습도 이방인과 사실상 똑같다는 뜻입니다. 애굽이 열한 번째로 홍해에서 시험하자 하나님은 애굽 군대를 몽땅 수장(水葬)시켰습니다. 본문의 거역이 열한 번째이므로 이스라엘에도 그렇게 해야만 당신의 백성을 편애하는 분이 되지 않고 공평한 하나님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애굽과 똑같은 죄인으로서 공평한 벌을 받아야 할 충분한 근거는 가데스 이전에도 이미 있었습니다. 출애굽 후 몇 달도 안 되어서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그 앞에서 먹고 마시며 춤을 춘 사건입니다.(출32장) 그보다 겨우 40일 전에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충성하겠다고 피의 맹세까지 했습니다.(출24:6-8) 그러고도 여호와가 아니라 자기들이 만든 우상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건져내 주었다고 대놓고 선포하며 음란하게 섬겼습니다. 

 

미국 교포들은 2세를 바나나에 비유합니다. 바나나처럼 겉 피부만 노란색으로 한국인이나 속의 생각과 태도는 하얀색 미국인이라는 뜻입니다. 교포 2세는 한 세대만 미국에서 살았으나, 출애굽 한 이스라엘은 사백 년을 애굽에서 살았습니다. 그들도 겉만 히브리인이었지 그 속은 애굽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 번째 애굽의 장자를 심판할 때 히브리인들은 문밖에 일절 나오지 말라고 엄격히 명했습니다. 만약 히브리인 누구라도, 모세와 아론이라도, 그날 밤 문밖으로 나갔으면 애굽 사람과 똑같이 죽음의 사자에게 심판받았습니다. 이스라엘도 함께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으나 당신의 택한 백성이라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바르라는 일방적인 긍휼을 베풀어서 그 심판을 면하게 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음란하게 섬긴 적극 가담자 삼천 명만 레위인을 들어 사용하여 심판했습니다.(출32:28) 이때도 하나님은 전 백성을 진멸하겠다고 불같이 화를 내었으나 모세의 간절한 중보 기도로 나머지 백성에 대한 진노를 거두고 다시 언약을 체결해 주었습니다. 

 

여호와의 체면

 

가데스에서 이스라엘이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서 두려움에 떨며 일차 거역했을 때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14:12) 전 백성을 멸하려 했으니까 시내 산 금송아지 사건과 같은 차원의 죄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입경의 시간이 지체되는 것은 하나님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백성이라면 진심으로 하나님 당신을 가장 두려워해야 함에도, 아무리 장대해 보여도 우상을 숭배하는 인간 용사를 두려워하는 것은 절대 두고 보지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보다 더 강한 애굽 군대를 전멸시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당신의 공의로운 권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그렇게 하면 이방 족속들이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 자기 백성을 가나안에 들여보내지 못했다고 조롱할 것이므로 제발 용서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민14:14-16) 어폐가 있지만 모세가 하나님의 자존심을 살짝 건드린 셈입니다. 모세의 후손으로 새 나라를 이룰 정도로 창성해지려면 수백 년이 더 걸립니다. 거기다 열두 아들을 둔 야곱과 달리 아들 둘만 두었는데 그것도 미디안 제사장의 피가 섞인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사라지고 모세의 하나님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당신의 이름을 붙들고서 절실하게 간구했기에 전염병 심판은 취소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민14:23) 자기들 스스로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어른들도 목숨은 살려주되 절대로 그 땅에 들여놓지 않겠다고 합니다. 

 

모세가 여호와더러 이방 족속으로부터 받을 조롱을 생각하라는 뜻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들 앞에 당신의 엄청난 능력을 과시해 달라는 간구가 아닙니다. 애굽에서처럼 모세 혼자 들여보내서 가나안 족속에게도 열 가지 재앙을 내리면서 완전히 패배시키는 일은 하나님에겐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믿음으로 스스로 행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고갈된 비상 상황에만 기적을 일으켜 주십니다. 그것도 당신의 특별한 목적이 있고 꼭 그런 방안이라야 그 뜻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을 때 한해서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일상적 삶에 개입 역사하여서 당신의 계획을 온전하게 달성하십니다. 매번 기적을 일으키면 하나님은 마술사가 되나, 인간더러 자기 의지대로 살게 허락하고도 당신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시니까 전지전능하신 분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선 노예였으나 시내 산에서 연약한 모습이나마 군대를 조직했습니다. 모든 전쟁에 여호와 언약궤를 모신 성막을 중심에 두고 진군합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은 반드시 하나님의 군대로 세상 앞에 그분의 대리인 역할에 충성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역할을 하겠다고 피의 맹세를 하고선 그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그 언약을, 사실은 하나님 그분을 내팽개친 꼴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너무나 큰 죄를 지었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그 언약의 다른 당사자이자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그대로 실현해야 하지 않느냐고 촉구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모세 말대로 가나안에 입경시킬 능력이 없어서 광야에서 진멸했다는 이방 족속의 조롱은 절대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라고 즉,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고 응답한 것입니다.(민14:20) 이어서 “진실로 내가 살아 있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을 두고 맹세하노니”(민14:21)라고 다짐했습니다. 가나안 족속이 당신을 조롱하지 못하도록 신세대는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어 당신의 이름을 온 세계에 널리 알리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한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시내 산 금송아지 사건의 당사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놓고 거역한 삼천 명이 심판받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무엇보다 지난 2년여 동안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반드시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한 번도 모세가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긋나는 경우를 보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진격을 중지하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을 전했고 자기와 언약궤가 동반하지 않았는데도(민14:41-44), 그 전언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전투에 나섰습니다. 모세의 중보 기도로 마땅히 받아야 했을 벌인 전염병이 취소된 뒤라 광야로 돌아가라는 이차 명령에는 더더욱 순종했어야 합니다. 뒤늦게 부랴부랴 쳐들어가겠다고 나서봐야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절대로 승리케 해 줄 수 없었습니다. 

 

영악한 이스라엘이 그분의 뜻대로 잘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전투에 나선 것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라도 하면 처음 내린 광야 방황의 심판을 취소해 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 단계에서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동안 열 번이나 거역했으니 제발 이번만은 순순히 말을 들으라는 것이었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순순히 광야로 들어갔다면 하나님은 어쩌면 일 세대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일차로 광야 방황의 벌을 내릴 때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불순종의 죄를 범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존경하는 상대의 말이라면 반드시 경청하게 마련이지 대놓고 거스르지는 않습니다. 믿음이 순전한 신자는 당면한 문제가 많거나, 현실적 여건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거나, 잠시 세상 재미에 빠져서 불순종할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멸시하지는 않습니다. 

 

애굽에서 열 번의 기적을 목격한 이스라엘이 열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한 이유로는 당신을 우습게 봤다는 것 외에는 설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열한 번째로 하나님을 무시하고선 스스로 장대한 거인 족속이라고 치켜세운 적들을 향해 다시 돌진했습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자기들을 죽음으로 내몬다고 조금 전에 퍼부었던 원망이 사실은 그 일이 무조건 싫다고 징징댄 투정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단순히 멸시했다는 말씀에 숨겨진 더 깊은 의미를 아셔야 합니다. 세상 사람도 큰 죄를 지은 자를 천벌을 받을 놈이라고 정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사람은 그분을 절대로 대놓고 멸시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로선 지금 애굽과 가나안 어느 쪽으로도 못 가고 죽을 때까지 광야에서만 돌아다녀야 하니까 그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현실의 풍요와 형통과는 자꾸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 같으니까 계속 거역한 것입니다. 

 

결국 출애굽 직후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그들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주인으로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현실의 형통을 준다면 애굽의 금송아지든, 가나안의 어떤 우상이든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나나처럼 겉만 유대인이고 속은 애굽 사람과 다름없다는 비유가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완악한 인간 자비로운 하나님

 

그 완악한 이스라엘에 비하면 사십 년간 광야 방황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로 엄격하고 과도한 것이 아닙니다. 유대 역사상 가장 의로운 왕이었던 히스기야가 간절히 기도하자 수명을 15년간 연장해 주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고 스스로 회개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모세의 중보로만 수명을 사십 년간 연장해 준 것입니다. 

 

당신의 택한 백성이라는 점이 일차 이유이지만, 이방 땅 애굽에서 사백 년이나 지냈고 출애굽 한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 영적으로 어린이 수준임을 배려해 준 것입니다. 말하자면 두 번이나 그들을 진멸하겠다고 화를 낸 것도 당신의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본심은 언제나 변함없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나, 어리석은 인간이 그 엄청난 이적들을 보고도 인간이 심판을 자초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세대에게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 기도라는 방식을 통해서 당신의 공의와 사랑에 대해서 교육 훈련 시킨 것입니다. 

 

거기다 그들이 바라는 대로 다 해 주었기에 사실은 심판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으로 개고생해야 하는 가나안보다는 노예로 살아도 애굽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겐 거주하는 장소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고통 없이 무사 무탈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 때문에 애굽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고 가나안은 싫다고 하니까 광야에서 노예가 아닌 자유민으로 너희들끼리 죽을 때까지 걱정 없이 살게 해 준 것입니다. 

 

광야 40년 방황 후에 모세가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신8:4)고 회상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먹고 마실 것도 책임져 주심으로 의복이나 발이 상하지 아니했으니까 정말로 무사 무탈했습니다. 

 

그들의 소원대로 해 준 더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식들이 죽을까 염려해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가나안 입경 직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601,730명(민26:51)으로 출애굽 직후의 603,550명에서 거의 줄지 않았습니다.(민2:32) 광야 방황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은 엄중하기는커녕 너무나 공평했고 오히려 자비롭기까지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입이 열 개라도 하나님 앞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출애굽 일 세대가 가데스에서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 신세대에게 깨우쳐 준 모세는 하나님의 심판이 “곧 너희가 그곳에 머물던 날 수 대로니라”(46절)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가나안을 정탐한 날짜 40일에 해당하는 40년의 방황, 즉 하나님은 마땅하고도 공평한 벌을 내렸음을 반드시 기억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죄를 사하려 지성소 안에 들어갈 때 사함을 받지 못하면 대제사장은 즉사하게 됩니다. 혹시 죽으면 시신을 들고나와야 하니까 대제사장 옷에 소리 나는 방울을 달았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대제사장이 지성소 안에서 죽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중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애굽에서의 최초의 유월절처럼 어린 양의 피로 죄를 씻어주는 대신 죄인의 생명은 살려주는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시내 산과 가데스에서 하나님을 두 번이나 완전히 멸시함으로써 백성 전부가 죽어 마땅한 죄를 범했습니다. 모세의 중보 기도로 그들의 죄는 용서해 주고 그들 생명은 당신의 일방적 자비로 살려주었습니다. 장차 골고다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을 대신해 죽어서 실현될 예수님의 구원 은혜를 미리 계시해 준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이 말하는 한 가지 주제는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은 너무나 공정하고 자비로운데도 인간은 끝까지 완악하게 그분의 조건 없는 사랑을 거부 배역한다는 것입니다. 

 

주저는 불순종의 죄다.

 

광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스라엘로선 그분을 멸시할 만큼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최악의 방안이었습니다. 어떻게든 그 길만은 피해 보려고 이미 폐기된 명령을 짐짓 아무 일이 없었던 양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다시 이행하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순종이란 처음부터 주저 없이 순종해야 순종입니다. 시간이 지체된 순종은 참 순종이 아닙니다. 지체할 수밖에 없는 외부의 큰 훼방이 있거나 본인이 병이 들었거나 위급하게 처리할 다른 문제가 없는 이상에는 그러합니다. 

 

지체한다는 것은 그 명령에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측면이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들 기대와 다른 무리한 요구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성적으로 게으른 데다 원죄의 영향으로 죄와 쾌락을 즐기는 데는 빠르고, 선을 행하는 데는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데스에서 진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스라엘의 처지에서도 사백 년이나 고대했던 민족적 숙원이었습니다. 지난 2년여 동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현장 실습 교육도 많이 받았습니다. 아무리 대적할 상대가 장대해 보여도 아무 희생 없이 자기들 나라를 세울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자기 나라를 세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며 많이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은 어린이라도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도 그 일을 포기한 것은 근본적으로 애굽이 좋았던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고 따르는 그분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 애굽의 노예 생활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말로 좋았다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말로 애굽에서의 우상숭배가 치가 떨리도록 싫었다면 애굽으로는 돌아갈 일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동안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뤄지지 않은 적이 없기에 안심하고 그대로 즉시 따라야 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지내는 무사태평했던 삶이, 나아가 우상숭배 제사에 따라오는 세속적 쾌락이 너무 그리웠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방 앞에 제사장 나라가 되겠다고 피의 맹세를 하고선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간 그 잠깐도 못 참고 애굽 제사의 복사판을 만들어서 방탕하게 즐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마음은 있고 그분의 능력에 의심이 없지만, 자신의 형편과 능력이 너무 연약하고 또 그래서 그분을 믿는 믿음이 줄어들면서 두려워하는 것은 절대로 잘못이 아닙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자신의 가난하고 어리석은 영적인 실상을 고백하고 도와달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기드온이 수많은 미디안 족속이 쳐들어오자 잔뜩 겁을 먹었으나 하나님이 함께해 승리를 주신다는 징조를 두 번이나 보여달라고 간구했지 않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어떤 중요한 일을 시행할 때는 반드시 자기가 옳거나 좋다고 믿는 바대로만 행동합니다. 틀렸거나 싫다고 여겨지는 일을 행하는 바보는 아무도 없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주저한다는 것은 그분과 그분의 뜻이 부분적으로라도 틀렸거나 싫거나, 최소한 귀찮다고 여겨지는 측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경배하면 그럴 수 없기에, 그분 계명에 순종하는 일에 반복해서 주저하면 그분을 멸시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에서 목회자가 아니라 일반 신자가 맡는 직분인 집사(deacon)의 헬라어 어원은 식탁의 시중을 드는 시종(waiter)을 뜻하는 ‘디아코네오’입니다. 종들은 연회가 열리는 내내 차렷 자세로 기다리면서 주인이나 손님 누구라도 부르면 지체하지 말고 달려가 그 요구사항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 종이 지체했다간 곧바로 주인에게 큰 벌을 받게 됩니다. 고대 사회에서 종의 모든 생계를 주인이 책임져 주고 심지어 잘못하면 그의 생명마저 앗을 권리를 가집니다. 신자에게 하나님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져 주는 오직 한 분뿐인 존재이기에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의 모든 측면에서 전적으로 그분께 순종 의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패배를 겪고서 통곡해 본들(45절), 시쳇말로 지나간 버스 손 들어봐야 소용없는 꼴입니다. 당신을 멸시하는 그들의 속내를 아시는 여호와가 전혀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으로 뒤늦게 진격한 것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분께 당신의 정성을 보여서 혹시라도 얻게 될 보상에만 관심을 쏟은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

 

흔히들 가데스의 이스라엘 실패를 눈에 보이는 현상만 두려워서 그 배후의 큰 능력의 하나님을 보지 못한 탓이라고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나 아주 부족한 분석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큰 능력을 잊거나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반 종교를 믿는 자들도 자기들 신의 능력에 의지해 도움을 청합니다. 자기들 필요에 따라 자기들이 원하는 시간과 방식으로 자기들 소원을 이뤄줘야만 순순히 신을 따르겠다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 죄성(罪性)입니다.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 근본적인 죄성을 갈아엎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언제 어디서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기 전에, 최소한 그와 동시에 그분의 거룩한 뜻대로 반드시 따르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확정적 계명에는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모든 기본적인 생각이, 즉 세계관과 인생관이 오직 하나님만 온전한 자신의 중심에 모시는 차원으로 완전히 바뀌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일을 좋아해서 기꺼이 열심히 성실하게 행하고, 그분이 싫어하는 일은 너무 싫어해서 절대로 하지 않으며 그 근처에도 가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신자 안에 이전의 자기는 없어졌고, 그리스도로 채워진 새로운 자아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자신인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신자가 된 후에 자신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차원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신자들은 대체로 그분의 능력을 더 굳건히 믿으면서 현재의 당면한 고난을 그분께 더 의지해 해결해 내는 믿음을 키우려 합니다. 그러면 염려나 두려움이 없어지고 평안이 임할 것을 기대하고 그러려고 성경도 열심히 읽고 기도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솔직한 실상은 많은 신자가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넘어지고 세속적인 방안에 의지하느라 하나님의 뜻과 계명대로 잘 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로 하나님의 도움을 청해서 눈앞에 닥친 힘든 일부터 해결하려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그 힘든 일을 자신의 바뀐 인생관과 세계관,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비추어서 판단하지 않습니다. 가데스에서 이스라엘이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한 이유도 그 일이 하나님과 오래된 언약의 실현일 뿐 아니라 자기 민족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사실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탓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죄짓지 않고 선한 일을 행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기도해서 자기 문제와 고난만 해결 받는 것으로 그쳐선 더더욱 안 됩니다. 자신과 자신의 인생관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소유로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자기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항상 그분에 초점을 맞추고 벗어나지 않게 노력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전에 삶의 방향과 인생의 목표가 이미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져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죄성이 살아 있고 체질이 연약해 간혹 세상에 지거나, 현실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자기가 걸어가는 근본적인 인생길을 다시 하나님의 길에 맞춰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얼마든지 신자를 순교시킬 수도 있고 또 그러면 반드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것을 확신하므로 기꺼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신자라고 무조건 희생 수고해야 한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일상의 삶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이미 바뀐 신분상의 특권과 은혜를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자기 가정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아름답고 거룩한 계획을 세워서 실현해 나가야 합니다. 부부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 인간관계, 소속한 공동체에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므로 하늘에서 주는 세상과 다른 기쁨과 만족을 즐기고 주변에도 나눠주어야 합니다. 

 

신자가 간혹 죄를 지어도, 회개가 늦어도, 회개하고도 또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참아주십니다. 진심으로 예수 십자가 앞에 다시 겸손히 엎드리면 다 용서해 주십니다. 신자의 회개와 주님의 용서가 반복되는 과정을 겪어야만 믿음이 온전하게 영글어집니다. 예수님 말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한 신자는 역사상 전무후무합니다. 문제는 그 중심이 이미 그리스도로 채워져 있느냐 여부 하나뿐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으면 성령이 반드시 간섭하여 절대로 같은 차원의 계명을 반복해서 거역하도록 버려두지 않습니다. 

 

솔직히 우리 자신의 믿음을 진지하게 다시 따져보길 원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 죽기보다 싫고 그분 안에 있는 것이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좋습니까? 위급할 때만 뒤늦게야 부랴부랴 따르는 시늉만 하는지, 인생관 자체가 하나님 중심으로만 완전히 바뀌었는지 묻는 것입니다. 

 

(4/28/2024)


모루두개

2024.04.28 23:55:40
*.230.44.2

가데스 바네아 사건을 결코 쉬이 보면 안 되겠습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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