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8:31,32) 자유가 없으면 믿음도 없다.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7)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

 

맹목적인 현대 신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성경 계명을 잘 지켜서 하나님이 정한 합격 점수를 맞아야 구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를 믿으려면 그와 개인적 인격적 관계를 친밀하게 지속하며 속속들이 잘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공사역은 겨우 3년에 불과해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서 직접적으로 교제한 자는 극소수의 제자들뿐이었습니다. 나머지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는 성경을 통해 주님을 알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신구약 성경 66권을 한 번이라도 통독한 신자는 찾기 힘들고, 대부분이 주일 예배에서 목사님이 설교할 본문만 잠깐 읽고 치우는 것 같습니다. 물론 매일 아침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분들도 꽤 되지만, 정말로 예수님을 만나서 친밀하게 교제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일 것입니다. 대체로 자신의 고달픈 현재 상황에 위로와 힘을 주는 말씀을 찾아서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고 합니다. 죄송한 비유이지만 성경을 초신자는 수면제로, 그런대로 경륜이 있는 신자는 신경안정제로 활용하고 치웁니다. 

 

요컨대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 자기 혼자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쭉정이 신자가 교회 안에 너무 많습니다. 목사님의 가르침을 성경과 부합되는지 따져보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따릅니다. 제 독단적인 판단이 아니라 예수님의 본문 말씀이 사실상 그런 의미입니다. 

 

주님이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으니까 오늘날 신자도 반드시 듣고 따라야 할 말씀입니다. 먼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라고 잠 신자의 자격을 정의했습니다. 주님의 ‘말에 거(居)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 중 일부를 어쩌다 한두 번 큰마음 먹고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하든, 나아가 아무 일 않고 혼자 있을 때도 그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성경의 주님 말씀에 능통해서 현실 삶에 항상 적용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원수를 사랑하라, 또는 생각으로 간음하지 말라 같은 계명들을 하나 빠트리지 않고 철저하게 지키는 율법적인 의무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말씀 안에 거하라는 것은 평생의 신앙생활을 뜻하므로 일상적 삶에서 말씀대로 살아서 항상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문제는 주님이 추가 설명 없이 간단하게 진리를 알면 그 진리가 자유롭게 해준다고 말씀하셨으므로, 그 진리와 자유가 각기 무슨 뜻이며 또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주님이 신자만이 완전한 참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했으므로 우선 세상 사람의 자유에 대한 잘못된 인식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불신자의 거짓 자유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사랑하는 가족 지인 등이 죽으면 비로소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말합니다. 질병과 고난과 슬픔과 상처만 잔뜩 지고 살았던 이 땅의 미약하고 비참한 삶에서 드디어 해방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 따르는 책임과 인연에 더 이상 얽매일 필요가 없는 좋은 곳에서 맘껏 날아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단순히 유족의 슬픔을 위로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교육, 지성, 문화, 종교 등과 상관없이 다들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믿습니다.

 

역으로 따지면 고생과 눈물이 죽어야만 끝이 나므로 죽을 때까지 항상 그것들에 속박받는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 땅의 인생은 헛된 시간 낭비였고 생명이 붙어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연명했던 셈입니다. 솔로몬의 전도서 결론대로 해 아래서 행한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되었을 뿐입니다. 고생과 수고를 하지 않으려고 재물과 권력을 최대한 쌓아봐도 그것을 지켜야 하는 일이 또 더 고달프고, 그전에 그런 것들로부터 이런저런 추악한 폐해가 따라옵니다.

 

물론 인간 사회에 큰 공헌을 이루었거나, 자식들에게 많은 유산과 사랑을 물려주었거나, 정말로 미련 없는 뜨거운 사랑을 했거나, 혹은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며 나름대로 보람차게 살았다고 자부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런 의미 있는 일을 했어도 어쨌든 죽으면 정작 본인에게 남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또 아무도 그를 계속해서 기억해 주지 않습니다. 인간이라면 최소한 자식들을 양육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는가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식들 또한 성인이 되면 부모와 똑같은 처지에 빠집니다. 부모로선 자식들이 자기들처럼 이 땅의 인생이 헛되다는 결론을 내리도록 열심히 도와준 꼴입니다. 

 

결국 세상 사람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얻는 최선의 방안은 최대한 빨리 이 땅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살하는 첫째 이유가 더 살아봐야 아무 의미가 없기에 차라리 일찍 생을 마감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최근에 청년들이 결혼은 하되 아이는 갖지 않겠다는 생각도 엄밀히 따지면 같은 맥락입니다. 현실 삶의 경쟁이 너무 격심해서 고달프기만 하지 즐겁고 보람찬 인생은 도무지 보장이 안 되니까 자기 자식에게 그런 고생을 시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전에 자식을 키우려고 온갖 고생을 하게 되면 자기 자유부터 크게 방해받게 되니까 그것이 더 싫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기독 청년들마저 심심찮게 그런 생각에 동조하는데 불신자와 똑같은 인생관과 가치관을 가진 셈입니다.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이 잉태케 해주신다면 당신께서 그 아이도 책임지고 양육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전혀 없습니다. 결혼과 출산에 대해서 순전한 믿음으로 진지하게 기도해 볼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주님이 사용한 ‘진리’라는 헬라어 ‘알레테이아’(Aletheia)에 그런 보편적이고 세속적인 자유에 대한 개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부정의 뜻인 ‘a’와 ‘망각’을 의미하는 ‘letheia’의 합성어로서, 진리란 ‘망각에서 벗어났다’ 혹은 ‘감춰진 것이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언뜻 자유와 무관한 개념 같으나 어원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망각의 여신 ‘레테’이므로 그 신화를 잘 살피면 정확한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어가려면 5개의 강을 건너게 된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죽음의 고통을 벗어버리는 강, 둘째는 비탄의 감정을 씻는 통곡의 강, 셋째는 분노의 찌끼를 태우는 불의 강, 넷째는 두려움과 증오를 없애는 강, 다섯째는 망각의 강입니다. 사람은 늙어서 대체로 고통 중에 죽기에 고통부터 끝내야 하고, 그 후에 이 땅에서의 비탄, 분노, 두려움과 증오를 씻을 수 있어야 되고, 마지막에는 그 모든 일을 완전히 망각해야 저승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고통, 비탄, 분노, 두려움, 증오로 가득 찼던 이 땅의 인생은 실체가 아니고 오히려 죽음이 인생의 실체, 즉 진리라는 뜻으로 그 단어가 생성된 것입니다. 

 

신자의 참자유

 

주님은 지금 죽어야 자유롭게 된다는 세속의 진리는 신자에겐 전혀 적용되지 않으니까 참 진리를 가르쳐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대 그리스인이나 현대 불신자들을 어리석고 믿음이 없다고 우습게 여겨선 안 됩니다. 신자들도 솔직히 처음 믿음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바로 그런 자유를 얻고자 한 것 아닙니까? 병원에서 포기한 중병이 걸려서, 사업이 실패해서, 가정이 이혼이나 자식 문제로 파괴되어서, 개인적으로 인간관계에 큰 상처를 받아서, 학업 취직 결혼에 제대로 성공하지 못해서 등등, 수많은 묶임에서 자유롭게 되려고 교회 문을 두드리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성실하게 믿음 생활을 하는 이유가 사실상 바로 그런 이유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런 묶임에서 풀리려고 소원하는 것은 절대 나쁘지 않으며 굳이 기복주의라는 딱지를 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 단지 천국에 입성시키려는 뜻만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전부라면 사람이 죽은 후에 택한 자만 구원해 주면 됩니다. 그러지 않고 살아 있을 때 성령으로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생전에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신 이유는 본문처럼 예수를 믿은 후의 이 땅의 삶에서부터 기쁨과 감사로 자유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참 진리를 알아야 하는데 부연 설명이 없기에 문맥에서 뜻을 찾아야 합니다. 본문 앞에서 주님은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였으므로 주님이 누구인지 아는 일이 진리가 됩니다. 본문에 이어서 죄의 종에서 벗어나야 참 자유를 얻는다고 했으므로 십자가 구원이 진리가 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진리는 바로 당신이고 또 십자가 구원입니다. 

 

그런 가르침을 받고도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선조로 두고 율법을 지켰기에 죄의 종이 된 적이 없는 자유민이라고 끝까지 항변했습니다. 주님은 공사역 내내 동족들에게 그런 혈통, 행동, 관습, 외모 등으로는 절대로 참 자유를 누릴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 안에서 영혼이 온전한 안식을 얻어야 한다고 계속 강조하셨습니다. 요컨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아서 계속해서 그 은혜 안에 거하면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인 중에 그렇게 해서 가장 자유롭게 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고 사도가 된 후에도 온갖 고난과 핍박을 당했습니다. 감옥에 수시로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거기다 한 번만 맞아도 자칫 죽을 수 있다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해서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보냈습니다. 그 외에도 선교 여행 중에 강도를 당하고 온갖 거짓 음해를 덮어쓴 적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고통은 아무렇지 않았고 오직 연약한 교회와 성도들을 안타까워했습니다.(고후11:16-33) 

 

그래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고 담대히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자신의 약한 것마저 떳떳이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과연 어느 누가 이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는 정말로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말씀으로 자유로워지려면?

 

그럴 수 있었던 근거가 경제적으로 검소하게 절약하며 윤리적으로 절제하고 종교적으로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개인적 인격적으로 만나고 성령으로 새 사람으로 거듭남으로써 진리인 주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알다시피 유대교에 최고로 능통한 랍비로서 도덕과 종교로 유대 사회에 평안을 유지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예수와 그 추종자들이 유대 사회의 기존 질서와 관습을 무너트리므로 하나님을 위해서 제거 말살하는데 열렬히 앞장섰습니다. 

 

다메섹의 신자들까지 핍박하러 가는 도중에 하늘의 찬란한 빛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는 견책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삼 일간 완전히 봉사가 되었고 물도 한 모금 마시지 못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그는 절망을 넘어서 설명했던 헬라어 진리의 뜻대로 ‘죽음이라는 망각의 강’을 건널 나루턱에 이르렀습니다. 그로선 어떤 방도를 동원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완전히 무력한 상태에 처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처분에 자기 전부를 맡길 수밖에 없었고 주님이 당장 죽여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당해야 할 판국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지금껏 자신이 세상에서 자랑하고 의지하던 것들 모두가 아무 소용이 없음을 절감했습니다. 

 

베냐민 지파라는 혈통, 율법에 능통한 뛰어난 지성, 랍비라는 사회적 신분, 로마 시민권이라는 특권, 특별히 대제사장의 위임장 등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휴지 조각으로 변했습니다. 거꾸로 자기가 체포하여 핍박할 대상인 예수 믿는 일개 평신자 아나니아가 와서 그에게 안수하며 기도해 주자 광명을 되찾았습니다. 유대 사회 최고의 지위와 신분을 자랑하던 그가 가장 핍박받고 비천한 이방의 이름도 없는 예수 믿는 신자에 의해 생명이 되살아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비로소 그는 예수가 생명의 주요,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요, 주님이 생전에 전한 부활의 천국 복음이야말로 인생의 절대적인 참 진리라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인에게 어떤 상황에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하기 전에 자기가 귀하게 여겼던 모든 것이 배설물에 불과함을 알고서 다 버리고 오직 예수를 아는 지식만 귀하게 붙들었다고 과감하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빌3:7,8) 

 

불신자들은 세상의 골치 아픈 일에서 해방되는 죽음이 완전한 자유를 준다고 믿습니다. 흥미롭게도 바울도 세상에서 중요한 것을 다 버리고 자유로워졌습니다. 물론 불신자는 고난과 염려를 주는 것이므로 죽였고, 바울은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죽인 그런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의 고난과 염려도 세상의 귀한 것들을 많이 얻으려고 노력하다가 생긴 것이므로, 바울이 죽인 것이 사실상 불신자가 죽인 것과 같아집니다. 

 

그렇다고 그가 흔히 말하는 무소유, 무욕, 무념, 무상이라는 해탈의 경지로 들어가 자유로워진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세상 고난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려는 소망이 나쁜 것이 아니라면 세상 것들도 절대 나쁘지 않습니다. 바울이 궁핍하든 부요하든 자족했으므로, 부요한 것도 자유로워지는 범위에 속했고 또 그렇게 오해하지 말라고 궁핍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전제했습니다. 

 

세상의 귀한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빌3:7)라고 전제했습니다. 내게 유익하던 것을 버리는 대신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귀한 것은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율법을 아는 지식을 이전에는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일에 사용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용했다는 뜻입니다. 

 

그가 버리는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것이든 누구를 위해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자유가 달라진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자기를 위해 사용하면 고난과 염려만 생긴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제한 채 자기 노력으로 스스로 자유로워지려 하면 전혀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달파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음이 완전한 자유를 준다고 믿는 까닭도 사실상 자기 소망 의지 능력이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해야만 자유로워지는 줄 무의식중에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진리다.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항은 바울이 그동안 귀하게 여겼던 것을 배설물로 취급해서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으로 그치면 여전히 무소유와 무념무상입니다. 그는 예수 안에서 자신의 바뀐 신분과 특권을 체험적으로 확실히 정확하게 깨달았고 그 이후로는 그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살아간 것입니다. 본문 말씀대로 절대적 진리인 예수를 만나서 그분의 말씀 안에만 거함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장 먼저 그는 예수님이 생명의 주요, 구원자 심판자라는 진리부터 확신했습니다. 사흘간 봉사가 되었을 때 어떻게든 죽이지 말고 살려만 달라고 처음으로 여호와가 아닌 예수님에게 간절히 매달렸을 것입니다. 그로선 주님께 정말로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음에도 주님은 오히려 그를 살려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주었습니다.

 

바울로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 직접 구원받았으므로 심판의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그동안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니고데모처럼 성전 제사를 아무리 드려도 마음의 참 평안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신자들을 격렬히 핍박한 까닭도 스데반이 순교할 때 보여 준 너무나 평화스러운 모습과 천국에 올라간다는 확신이 너무 부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거꾸로 너희 예수 믿는 자와 성전 제사를 드리는 우리 둘 중 누가 과연 하늘에 올라갈 수 있는지 따져보자는 몸부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거기다 주님께 자신의 여생을 바칠 수 있는 소명까지 받았으므로 구원의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정죄함이 없어졌기에 제대로 죽을 준비를 마친 것입니다. 죽어야만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았을 때부터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먼저 찾아와 일방적으로 자기를 만나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전까지의 모든 여정도 사실은 주님의 인도였다고 깨달았습니다. 유대교에 정통한 랍비로 대제사장의 신임을 얻은 것이 여호와를 위한 자기 열정과 능력으로 이룬 업적인 줄 알고 큰 자부심을 느꼈었는데, 율법과 대비하는 복음의 수호자로 세우기 위한 계획에 따라서 예수님이 이끌어 준 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기록을 보면 아나니아라는 신자가 찾아올 것이라고 바울에게 성령으로 계시해 주었고, 또 아나니아에게도 신자들의 무시무시한 대적 사울을 찾아가라고 성령 안에서 계시해 주었습니다. 바울로선 나중에 그간의 모든 사정을 알고선 다시 더 확실하게 예수님이 시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의 생각 영혼까지 주관하여 당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는 존재, 즉 하나님이심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간절히 기도한 대로 죽지 않고 살아난 것만으로 주님이 그의 곁에서 항상 함께하시고 그의 사정을 다 알고 계셨다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주님은 바울 자신의 열정과 소망과 계획과 이성과 의지는 그대로 발휘하게 둔 채로 당신의 뜻대로 그를 이끌어 오신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바울을 알고 인도하신 것이 바울 스스로 자신에 대해 알고 자기 인생을 꾸려가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미하고 완벽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이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신자가 어디를 가든 언제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따라옵니다. 일개 신자 아나니아의 기도로 바울이 시력이 회복되고 다시 살아난 것이 그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신자를 핍박했는데도 주님은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신자는 주님의 대리인으로 그치지 않고 항상 주님이 실제로 바로 곁에서 동행해 주십니다. 신자가 그분의 손을 놓는 경우는 간혹 있어도 그분이 그러는 법은 평생토록 절대 없습니다.

 

바울이 그런 사실을 체험으로 알았는데, 그것도 자기 인생에 대한 완벽한 계획대로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이끄셨는데 더 이상 무엇을 염려할 것입니까? 어떤 환난에도 주님의 영광스러운 뜻이 이뤄지고 있으니, 사흘간 봉사가 되어 있는데도 주님이 놀라운 일을 이루고 계셨음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으니까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는 천국도 입신해서 보고 왔으므로, 생명이나 사망이나 나아가 천사나 권세자들도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신자를 끊어낼 수 없다고 당당하게 선포한 것입니다.(롬8:38,39)

 

예수를 따르라.

 

그렇다고 그가 현실적으로 고달프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약을 하거나 환상에 빠져서 고통을 망각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수없는 고통을 겪었고 죽을 고비를 넘길 때마다 엄청 괴로웠습니다. 어서 빨리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는 소망이 아주 컸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땅에 남아서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서 자기에게 맡겨 준 소명에 끝까지 헌신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빌1:19-30) 죽음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도 빌립보 교인들더러 아주 기뻐하라고 계속 강조했습니다. 나아가 자신처럼 어떤 고난에도 동참하되 주님의 진리의 말씀 안에 거해서 자유로워지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이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고 모든 사람이 이마에 땀을 흘려야만 생존할 수 있는 하나님의 벌을 받았습니다.(창3:18,19) 죄로 찌든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고난이 그칠 수 없습니다. 신자도 예외는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신자를 살아 있을 때 구원했다는 것은 아담의 타락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그래서 여전히 슬픔과 고통이 많은 이 땅에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아픔을, 때로는 더 억울한 손해와 핍박을 겪기 마련이지만 그것에 반응하는 인식과 태도가 이전과 달라져야 합니다. 

 

주님은 놀랍게도 자유롭게 되는 방안으로 거의 모든 신자가 행하듯이 고난을 없애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명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한번 곰곰이 또 솔직히 따져보십시오. 그동안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려고 믿음 생활하면서 간절히 기도해서, 그것도 천일 제단 쌓거나 금식 작정 서원 기도해서 정말로 항상 자유롭게 되었습니까? 가물에 콩 나듯이 일시적으로 자유로울 때는 있었지만 얼마 안 가서 새로운 고난들이 때로는 더 심하게 닥쳐서 계속 눌리고 힘들어하지 않았습니까? 

 

많은 신자가 불신자 시절의 헬라인 식 진리와 자유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난에서 벗어나야만 자유로워진다고 믿으니까 주님 말씀은 뒷전이고 어서 빨리 고난에서 건져달라고 기도만 합니다. 주님이 그래서 제자들에게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6:31,32a)고 깨우쳐 준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먹고 마실 것을 구한다고 해서 큰 부자가 되겠다거나 현실적인 복을 많이 받아 형통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현실적 어려움만 없으면 자유로워지리라 믿은 것입니다. 주님은 놀랍게도 염려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즉 이방인 식의 자유 개념을 버리라고 가장 먼저 강조했습니다. 솔직히 오늘날 우리 기도의 주된 내용도 현재의 고난만 없애주면 더 잘 믿고 더 봉사 잘하겠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기독교적 용어만 사용했다 뿐이지 자유의 개념을 이 땅에서의 고통을 없애는 것에만 두는 불신자 때의 인식과 하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이 아주 신령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염려를 기도해서 없애기만 하면 자유로워진다고 믿었던 이방인 상태였으나,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천국에 갈 때까지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 아래 있기에 그분만 믿고 의지하여서 자유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그 이유로 들풀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낫기 때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솔로몬은 자기 입으로 하나님과 무관하게 자기 지혜로만 행한 일들이 헛되고 헛되다고 고백했고 그의 업적이 지금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들풀은 하나님이 정한 법칙을 벗어나는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아무리 도덕적 종교적으로 의로운 일을 행해도,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무엇을 먹고 마실까 염려가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신자에게 무엇이 필요할지 다 아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맡기면 염려는 그날 하루의 염려로 족하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구하라.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소망은 좋으나 하나님 밖에서 자유로워지려는 것이 잘못이자 죄입니다. 자칫 주님의 계명을 깨우치고 따르고 닮으려고 노력하는 일마저 그리스도 안의 참 자유를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세상 것도 인간의 참된 안전, 만족, 행복 등을 절대 보장하지 못한다는 확신부터 생겨야 합니다. 정말로 주님의 십자가만 묵상해 보십시오. 고난 중에 빨리 구해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주님의 영이 나를 온전히 주장해 달라고 간구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계명을 따르거나, 놀라운 지식을 가져서, 혹은 영적 분별력으로 자유로워진다고 가르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을 믿고 따르라고만 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되는 바람에 죽음이라는 흑암의 세력에 눌려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인간 스스로 아무리 몸부림쳐도, 심지어 바울처럼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도 절대 자유로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 그분을 순전히 믿고 그분 뜻대로 살려는 순간 그분의 놀라운 자유가 우리를 주장하게 됩니다. 성경을 통해 그분을 알아가는 지식 외에, 또 그 지식대로 살아가는 일 외에는 어떤 것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비로소 원죄에 따라서 악을 행하던 자유에서 하나님의 참된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쥐게 된 것입니다. 진리는 예수이며, 참자유는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갈 때만 누릴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세상 삶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주님이 대신 다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려는 그 생각과 고집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기도하는 대로 응답될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인간을, 특별히 자기만 높이려는 기본적인 사고의 틀을 산산조각 깨트리는 것입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나 예수의 영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정말로 세상 것으로 고통스럽다면 그 세상 것을 버려야 합니다. 현실에서 도피하라는 뜻이 아니라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전적으로 예수님 쪽으로만 향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채워서 자유로워지려는 시도나 그럴 수 있다는 고집을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바꿔서 계속해서 영혼에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과 동행할 때만 자유로워집니다. 

 

(5/19/2024)

 

모루두개

2024.05.19 18:47:21
*.230.44.2

자유(성경적)와 방종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때로는 낙심하기도 하더라고요. 그래도 그 과정 속에서 배우기도 하니 하나님께 참 부끄러울 정도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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