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 십자가상의 강도의 경우 십자가에 달릴 정도라면 악질 범죄자였음에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그 강도 또한 구원의 예정 안에 있었기에 최후에 주님을 영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게 되기 전까지 그렇게 흉악하게 살아왔던 삶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단순히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임해서 순간적으로 무의식중에 회개한 것입니까?

 

[답변]

 

십자가 복음 안에 있다는 뜻은?

 

불신세상에서도 “무전유죄유전무죄”(돈 없으면 유죄, 돈 많으면 무죄)라는 말이 통합니다. 미국프로풋볼 선수 심프슨이 백인 아내를 죽였음이 모든 정황상 거의 틀림없는데도 확정적인 물증이 없음을 최고의 변호사가 물고 늘어져 무죄판정을 이끈 후에 생긴 유행어입니다. 최고액의 변호사 비용을 지불해서 즉, 돈으로 무죄판결을 매수한 형국입니다. 반면에 가난한 피고들은 실력 있는 변호사를 고용하지 못해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감옥에 들어가 있는 죄수들은 자기들이 감옥 밖에서 정상사회활동을 하는 자들보다 결코 죄가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단순히 돈이 없었거나, 순간적 충동을 이기지 못해서 실수를 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성경이, 특별히 예수님이 말하는 바가 죄수들의 바로 그런 생각과 사실상 같습니다.

 

형제에게 노하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자는 살인한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마5:21,22) 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합니다.(마5:27,28) 행동뿐 아니라 말과 생각으로 행하는 잘못도 죄라는 것입니다. 말로써 폭력을 행사하여 그 사람의 일생을 망치는 경우는 심지어 부모 자식 간에도 종종 있습니다. 비밀리에 음란죄를 범하거나, 이웃 아내를 이런저런 모습으로 탐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자면 실정법상 죄인이 아닐 뿐 수도 없이 살인하고 간음합니다. 예수 믿은 신자들도 그렇습니다.

 

말과 생각 중에 극히 일부만 행동으로 옮겨집니다. 인간 사회의 법으로는 말의 잘못도 문제 삼는 명예훼손 같은 일부 경우를 제외하곤 행동의 잘못만 정죄합니다. 대체로 행동이 빠른 자는 말과 생각이 별로 없고 느립니다. 대신에 말과 생각이 많은 자는 행동이 적고 느립니다. 그럼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따르면 어느 쪽이 더 죄를 많이 짓겠습니까? 아직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뿐인 감옥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 앞에 죄인이 아닌 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런 형편을 창세기3장 이후 구약성경 전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고 또 로마서 1-3장이 간략하게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자 없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점수로 치면 영점이 아니라 마이너스 무한대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보혈의 의를 덧입지 않고는 하나님의 구원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로마제국의 십자가 처형

 

본 질문과 연관해 살필 둘째 과제는 로마제국에서 시행된 십자가 처형입니다. 알다시피 십자가는 인류가 개발한 사형방식 중에 가장 고통이 극심합니다. 필설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며칠간 나무에 달려 있으면서 뼈와 사지는 찢어지고 눈코나 신체장기가 새나 벌레에게 파 먹히는 것을 가만히 보면서 당해야 합니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프고 혀는 타 들어갑니다. 한마디로 덕장에서 오징어 건조하듯이 사람이 말라 비틀어 죽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꼭 로마제국을 반역한 죄로 덮어씌우려 노력한 까닭은 빌라도의 손을 빌려서 반드시 십자가로 죽이려는 뜻이었습니다(눅23:23). 그들이 예수님을 극도로 미워해 최고의 고통을 주려는 뜻입니다. 거기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 율법 규정대로 예수님으로 하나님께 저주 받은 죽음을 당케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에서 보듯이 로마는 제국에 반기를 드는 자들은 반드시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로마에 대한 노예들의 반란을 다룬 오래 전 영화 ‘스팔타카스’에서도 노예 전원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일반 흉악범들의 처형방식은 다양했을 것이며 구체적 사정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제국을 모반하는 일만은 철두철미 응징하여 다시는 모반의 꿈도 꾸지 못하게 최고 극심한 고통의 십자가로 처형한 것만은 분명히 사실이었습니다. 그럼 차별화의 효과를 노리기 위해 모반죄 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처형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두 강도도 로마제국에 항거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그 와중에 살인도 자행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신학자들이 해석합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일제 강점시기에 독립운동을 한 자와 방불합니다. 혹시 살인을 했다 쳐도 독립운동 중에 일본군 내지 유력정치인을 죽인 것입니다. 한국에선 존경받아 마땅한 의인입니다. 성경은 구체적 설명 없이 단순히 ‘강도’, ‘행악자’, ‘다른 두 사람’이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간에 그들이 연쇄살인범이나 미성년자성추행범 같은 도덕적으로 흉악한 죄인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동일하게 죽어 마땅한 사형수 죄인입니다. 어떤 인간도 다른 이를 도덕적으로 더 악하거나 더 착하다고 차별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 복음 안에 들어왔다는 가장 근본적 의미는 이전에는 사람을 외모로 보고 차별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감옥 밖에 있다고 해서 감옥 안에 있는 죄수보다, 심지어 사형을 당하는 흉악범보다 더 선하다는 자부심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신자입니다.

 

예정과 불가항력(不可抗力)적인 구원 은혜

 

모든 인간이 마이너스 무한대의 사형수라면 구원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예정하여서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 사이에 자격, 능력, 성품, 선행, 공적, 희생, 수고 등에서 하나님의 의의 기준으로 평가하여 우열이 있다면 구태여 예정구원은 필요 없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실 이유도 없습니다. 인간들을 점수 매겨서 우등생을 구원해주면 됩니다. 모두가 사형수라는 것(전적인 영적 타락)이 전제가 될 때에 비로소 누구를 방면할지는 사면권자의 절대적 주권과 작정에 달린 것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예정구원을 부인하는 신자는 인간 사이에 우열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입니다. 열심히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선해지고 하나님 구원의 의에 합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소지한 것입니다. 나라면 그럴 수 있다고 믿는 영적 교만입니다. 예정을 단순히 하나님 기분 내키는 대로 어떤 사람은 구원 주고 어떤 사람은 멸망시킨다고 해석해선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평성에 시비를 거는 것이 논리적인 것 같거나, 또 예정을 부인함으로써 하나님의 정당성을 변호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러는 자들이야말로 자기는 다른 이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너무나 교묘한 짓입니다. 그 자체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너무나 확실한 또 하나의 반증일 뿐입니다.

 

누구를 구원할지는 오직 하나님의 신비요, 은혜요, 주권에 속한 문제입니다. 거기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를 예정에 따라 구원해 주려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작용해야만 합니다. 인간의 영성에 우열이 없을 뿐 아니라 어떤 공로도 세울 수 없고 그럴 능력도 없는데 어떻게 스스로 노력하여 하나님의 의에 합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 십자가 은혜는 오직 성령의 거듭남으로만 믿어집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할 수조차 없습니다.

 

성령이 불가항력적으로 역사하면 인간은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이미 주었지 않습니까? 인간은 믿음의 결단과 헌신으로 그 불가항력적 은혜에 온당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그런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와 간섭에 절대 상충 모순이 없습니다.

 

십자가상의 강도의 구원은?

 

한 가지 오해는 말아야 합니다. 예정에 든 인간 쪽에서 어차피 예정되어 있으니 가만히 있어도 일순간에 그 영혼을 변화시켜 예수를 믿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상의 강도 또한 십자가에 달린 후에 한순간에 성령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작용해서 생각이 뒤바뀌고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눅23:39-42)

 

지금 두 행악자의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정반대로 대조됩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더러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방했습니다. 만약 그가 실제로 로마에 항거한 자라면 하나님은 왜 유대의 구원을 외면하고, 로마가 계속 지배하도록 방치하며, 메시아를 아직도 보내주지 않느냐고 원망한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구원을 모르고 현실적 정치적 메시아만 기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니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거기다 다른 강도와 비교해서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도 없습니다. 자기는 오직 잘한 것뿐인데 하나님이 제대로 보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의로움을 알아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회개는커녕 자각도 없었습니다.

 

반면에 회개하여 구원 얻은 행악자는 어떠했습니까? 우선 예수님이 무죄한 자이므로 비방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한 - 로마에 항거하는 중에 로마인의 재산을 파괴하고 인명을 살상했다면 어쨌든 큰 죄이기에 - 하나님의 벌을 받는다고 겸손히 받아들였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자기를 생각해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겸손히 의탁했습니다.

 

아무리 성령이 역사해도 이런 고백은 순간적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하게끔 한 것은 분명 성령의 역사이지만 그 말 안에는 그의 평소 가치관 구원관이 반영된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들었는데 직접 당사자를 보니까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또 당신을 처형한 자를 위해서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었습니다. 만약 로마를 반역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때에 자신들의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방식이 잘못되엇다는 점도 아마 깨달았을 것입니다.

 

요컨대 그는 오랜 기간 자신과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해 영적 갈등과 고뇌를 겪어 왔고 마지막 순간에 성령이 역사해 예수님을 온전히 구주로 시인하고 그 앞에 엎드리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지난 모든 세월 동안에 그가 겪었던 사건, 인물, 갈등 등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는 역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구원으로 예정했다면 당신의 방식대로 또 당신이 정한 시기에 반드시 구원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셨을 것입니다.

 

반면에 정작 본인은 그 모든 일에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동원해서 자기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판단 결정 시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결정과 행동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 옆자리에 달리는 장소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그의 배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길로 이끈 것입니다.

 

간단히 다시 정리하자면 모든 이는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예정과 불가항력의 은혜로 밖에 구원할 수 없습니다. 누가 구원으로 작정될지는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신비에 속합니다. 그럼에도 구원 받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는 여전히 자기 자유의지로 행하게 되지만 그 구원과 방기는 예정과 상충 모순이 일절 없습니다. 만약 인간 중에 우열이 있다고, 특별히 내가 남들보다 나은 것이 있다거나 그래서 특별히 더 나쁜 악인이 있다고 여기면 이런 예정 구원의 원리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8/19/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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