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왜 고난을 방치하시는가? (2)

조회 수 670 추천 수 2 2021.11.17 06:11:29

하나님은 왜 고난을 방치하시는가? (2)

 

[질문] 고난의 책임이 인간에게만 있다면 구태여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

 

하나님이 어린아이의 무고한 생명이 경시되는 비참한 고난마저 방치하시는 것 같아서 혼란스럽습니다. 대부분의 고난이 인간의 죄가 원인인 줄 머리로는 알지만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그런 고난을 허락하셨을 텐데 왜 인간에게만 책임을 지우는지 여전히 미심쩍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고난의 원인과 해결을 다 책임져야 한다면 구태여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흔히들 인간 능력으로 이뤄낸 일마저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받았다고 말하니 종교적 공치사인 것 같기도 합니다.

 

[답변의 전제] 하나님과 고난과 기도의 상호관계

 

상기내용으로 여러 예들을 제시해주셨는데 하나님과 고난, 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고난의 관계부터 먼저 설명 드려야할 것 같습니다. 앞선 질문에서 설명 드린 “고난에 대한 전제”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내용을 보충하려는 뜻도 됩니다.

 

고난의 원인은 몰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다.

 

성경에서 최고 극심했는데도 그 원인은 전혀 모르는 환난을 당한 사람은 욥입니다. 졸지에 모든 자식과 재산을 다 잃고 본인도 희귀한 중병에 걸렸습니다. 영계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욥의 믿음을 걸고 내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물질계에 묶여 살아가는 연약한 인간인 욥은 물론 어느 누구도 그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생살이에 인간 이성으로 원인과 해결책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고난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욥기는 서론에서 명확하고도 냉정하게 밝혀놓았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죄를 지은 적이 없어서 친구들이 계속 인과응보적인 신앙관에 입각해 자기에게 허물과 죄가 있어서 고난당했다고 단정 짓는 데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선하심은 믿고 싶었고 무엇보다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 언제든 앗아갈 수도 있음을 알기에 그분께 입술로도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욥의 믿음이 이처럼 순전했기에 사탄과의 내기에서 하나님은 두 번 다 거뜬하게 이기셨습니다.

 

그러나 욥으로선 너무나 엄청난 고난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 원인만을 알고자 하나님과 계속 씨름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딱 부러진 답을 주지 않다가 결국에는 욥에게 거꾸로 물질계의 여러 현상에 관해 원인을 아는지 백 개가량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욥은 단 한 개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욥38-41장)

 

인간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물질계의 눈에 빤히 보이는 자연 현상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그 이성이 어리석은 수준이라는 뜻입니다. 그에 반해 하나님이 자연 안에 적용해놓은 지혜와 권능은 인간수준으로는 도무지 짐작도 못할 만큼 광대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선 영계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의 구체적인 뜻은 더더욱 헤아리지 못합니다.

 

욥기가 그나마 밝혀 놓은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욥의 믿음을 정금같이 성숙시키려는 것입니다.(욥23:10) 욥 같이 당대에 가장 지혜로운 자조차 자연계 현상도 제대로 모르니까 이 땅을 하나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가려면 오직 스스로 낮아지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욥으로 도달시킨 정금 같은 믿음의 상태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2,3) 한마디로 하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시는 모든 일의 구체적인 원인, 목적, 과정, 결과를 인간으로선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이 고난의 원인을 알려고 따진 것부터 자기 무지(無知)함의 소치였던 것입니다.

 

바꿔 말해서 이미 설명한 대로 신자가 소지한 믿음이 아무리 강건해도 인생은 끝까지 고난의 바다를 헤엄쳐나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럼에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욥이 겪은 것 같은 너무나 억울해 보이고 비참했던 고난까지 포함하여서, 선하고 당신만의 광대하고 거룩하신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고난에 대한 그분의 구체적인 뜻은 죽을 때까지 모를 수 있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에 비추어서 어렴풋이 짐작은 할 수 있어도 말입니다. 모세의 율법의 영광도 그 빛나는 광채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듯이(출34:29-35)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영적으로는 눈에 수건을 쓴 것 같은 수준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수건은 우리가 죽어서 천국을 가면 벗겨지게 되고 이 땅의 고난도 마지막 부활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뀜으로써 완전히 제거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6-18)

 

믿음의 본질

 

그렇다고 이 땅의 고난과 영적 미성숙이 신자에게 괴롭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 자신의 무지함과 무능력함을 철두철미 깨달았으므로 오직 하나님의 권능과 은총만 소망하게 됩니다. 여전히 자기를 높이려는 본성이 남아서 수시로 죄를 지은 결과도 고난으로 나타날 수 있기에 신자로 회개케 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긍휼만 소망하게 만듭니다. 신자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어리석음 고집 욕심 감정 부주의 등이 개입되어 종종 실패하게 되므로 성령님의 보호 인도를 간구하게 됩니다. 영적인 미성숙함을 절감하기에 진리의 말씀을 파고 들면서 하나님과 씨름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욥이 그랬듯이 고난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만듭니다. 고난을 통해서 영적으로 풍성한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땅에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온전히 도달하지 못하고 또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온전히 누리지는 못합니다. 삼위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알고 그래서 부분적으로만 그분의 은혜를 누릴 뿐입니다.

 

불신자들은 이 땅이 전부인줄 알고 평생토록 현실의 형통과 출세에만 매달립니다. 신자는 영원한 본향 천국이 따로 있고 그곳에 도착하는 동안에는 연약할 수밖에 없음을 알기에 이 땅에선 나그네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마지막 날의 구원의 완성을 더욱 소망하게 되는데 하나님이 인간에게 평생 고달픈 여건을 허락하신 또 다른 목적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 중에 이 땅에서 엄청난 고난을 겪지 않은 자들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들은 참 안식의 약속은 받았으나 그 일차 성취인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천국에 있는 자기들 시민권을 바라보고 이 땅의 세속적 쾌락과 타락된 죄악에 섞이지 않는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호와 안에서 사는 삶이 천국으로 향한 여정인 줄 확신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최선을 다해 순종 헌신함으로써 이 땅에서부터 천국 은혜를 일부이긴 해도 받아 누렸습니다.

 

믿음이란 그래서 이 땅의 삶을 천국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도 태어나면서부터 고난의 바다에 던져지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은 너무나 귀합니다. 신자라면 살아 있는 것만도, 또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고난이 생겨도, 나아가 죽음을 맞는 것마저 천국 영광으로 들어가는 일이니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 엄청난 고난을 당하자마자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라고 고백하며 그분을 찬송했습니다. 출생한 것부터 그분의 거룩한 뜻에 따른 것이므로 지금 살아 있는 것은 물론 죽는 것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결국에는 고난의 원인을 몰라도 하나님은 무소불능한 권능으로 당신의 거룩하신 뜻대로 세상만사를 이끄시므로 어떤 불의도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고난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라도 고난 많은 이 땅을 살아가려면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그리고 반드시 있어야합니다.(고전13:13) 첫째,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이 선하므로 고난까지도 그분의 뜻과 계획 안에서 선하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욥 같은 엄청난 고난에도 그의 믿음을 정금 같이 성숙시키신 하나님입니다. 나아가 자기 잘못으로 고난을 겪더라도 회개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합력해서 선으로 바꿔주실 것을 믿어야 하고 그런 바탕에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고난 중에 숨겨진 오묘한 하나님의 은혜를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 믿음으로 찾아 누림으로서 자신부터 그리스도를 닮아가겠다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또 바울처럼 이 땅의 달려갈 싸움을 충성되게 마치고 천국의 면류관을 얻고 마지막 날에는 죽음이라는 원수까지 정복해 부활될 것을 소망해야 합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뵙게 되면 이 땅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고난들의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수건을 벗은 것 같이 정확히 알게 됩니다. 아니 그런 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안 될 것이며 오직 주님을 세세토록 찬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과 완전히 달라질 천국의 그 영적 온전함과 충만함을 이 땅에서부터 소망해야 합니다.

 

셋째로 비록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고난을 당해도 욥처럼 본인의 존재와 이 땅의 허락된 나그네 같은 인생을 주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해야 합니다. 무소불위하고 그 어떤 악과도 단 한 시도 공존하지 못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뜻이 같은 고난을 겪는 이웃을 찾아가 섬기라는 것이므로 고난 중에도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은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존재인지라 실은 힘들 때에 이웃을 더 잘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게도니아 교회들이 극한 가난 중에도 기근을 맞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넘치도록 헌금을 모아서 바울에게 주었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2) 바울은 그래서 신자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뜻을 같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모든 신자는 아래 내용을 정말로 곱씹어 보고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1:3-7)

 

바울도 가장 먼저 욥처럼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환난 중에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며 그런 진리를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분명히 드러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환난 당한 것도 동료 성도는 물론 불신자들에게 위로가 되게 하려는 뜻이라고 합니다. 고난을 믿음으로 견디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고난 중에도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서 그들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 함께 찬양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믿음의 선진들도 바로 그런 제사장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신자들이 고난에 대한 바울 사도의 이 말씀조차 잘 모르고 있습니다. 대신에 아프리카의 기아문제 같이 크게 불의해 보이는 고난을 두고 하나님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 갈등합니다. 자신의 삶과 실제적인 관계가 없는데도 세상 고난에는 관심이 많은 아주 의로운 면을 드러냅니다. 반면에 자신이 겪는 고난은 구출해달라는 기도하기 바빠서 고난의 원인이 자신의 죄나 책임은 아닌지 또 그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무엇인지 깊이 따져보려 하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신자는 북한의 기아부터, 아니 한국의 소년소녀 가장 같은 문제부터 먼저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바울사도의 권면처럼 주변의 고난당하고 있는 이웃을 자기가 고난 중에 받은 주님의 위로로 섬겨야 합니다. 그런 섬김을 등한히 하면 신자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굶어 죽는 것 같은 처참한 비극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누룩이 떡 반죽에 들어가 부풀어져 번져나가는 모습에 비유한 뜻입니다.

 

고난 중에 자신부터 되돌아보지 않으니까 믿음이 그저 당면한 현실적 고난을 없애달라는 기도만 평생 하는 모습으로 그칩니다. 고난이란 한 번 없어져도 다시 계속해 생기는 법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겸손히 되돌아보면서 그분이 맡겨주신 소명에 충성 헌신하고 있다면 한가하게(?) 그분을 의심 갈등할 짬이 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고난을 없애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생기게 되는 인간 세상의 고난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거룩하게 대처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신자들의 고난에 대한 이해 부족은 그것을 허용하시는 목적은 물론이고 고난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얼마나 개입하는지 여부에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의지와 신자 인간의 의지가 어떻게 상호 교차 연결되는지 정확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했다는 근본적인 의미는 인간 세상 전체가 마지막 날까지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허락한 것입니다. 당연히 신자의 믿음으로 미리 막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특별히 신자에겐 고난이 그치지 않는 이 땅을 나그네 같은 삶을 훈련 받는 실습장으로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각 개인에게 일어나는 개별적인 고난을 하나님이 허락 내지 방치했는지 여부는 불신자와 신자의 경우 둘로 나눠서 따져봐야 합니다.

 

먼저 불신자는 자신이 인생의 주인입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자기 쪽에 원인이 있거나 잘 모르겠으면 우연(by chance) 혹은 재수(by luck)로 돌립니다. 해결책도 자신이 강구하는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후에는 믿음도 없으면서 하늘의 처분에 맡긴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으니 당연히 하늘이 그 결과를 전혀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인생 전부가 자기 것이니 고난도 자신이 주인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프리카에서 기아로 아이가 죽는 것이 바로 로마서 1장이 설명한 대로 불신세상이 스스로 자초한 결과이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도 그런 비극을 보면 하나님과 그분의 은총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봐야합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도 전혀 그러지 않고 끝까지 완악하게 그분을 외면 대적하기에 그런 비극에 대해서 그분을 원망할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가 세상 고난을 두고 하나님을 탓해봐야 자기 얼굴에 침 뱉기일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못 믿겠다고 하면 더더욱 그분과 아무 관계가 없어지니 본인만 손해입니다.

 

반면에 신자와 그 공동체의 임하는 개별적인 고난은 하나님의 광대하신 뜻과 계획이 먼저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자는 자기 이성과 의지로 행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행한 결과입니다. 간절히 기도해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미리 알고 고난을 미리 예방 혹은 대처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자기에게 주신 소명을 확실히 알고서 그대로 순종 헌신해나가는 신자만이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할 뿐입니다.

 

쉽게 말해 신자 개인이 자유의지로 행한 것과 하나님이 그 신자를 위해 미리 마련해놓은 계획이 전혀 서로 모순 상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맘껏 행동해도 당신의 계획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이뤄내십니다. 그러니까 신자가 잘못해도 그분이 합력하여 선하게 끝나게 됩니다.

 

그분의 눈에 안 보이지만 완벽하게 진행하시는 역사는 신자에게도 다양한 차원에서 은혜와 유익이 되는데 그것을 얼마나 깊이 깨닫느냐 여부로 그분께 받는 은혜의 질과 양이 달라집니다. 고난 중에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다면 아주 성숙한 믿음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는 고난 중에는 그분의 선하신 뜻을 잘 몰라도 다 끝나고 나서야 일부 혹은 전부를 겨우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요셉의 고난의 원인과 결과

 

대표적인 예로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이에 대해선 아래 링크의 글을 참조하십시오.) 그는 어리석고 교만해서 형들에게 꿈 자랑했다가 청년 때에 먼 나라로 노예로 팔려가는 엄청난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는 그런 고난을 겪는 중에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몰라서 온갖 의심이 쌓이다 못해 불평도 쏟아 놓았을 것입니다. 단순히 어서 빨리 이국땅에서의 고난이 끝나고 고향의 아버지 요셉에게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러다 그 모든 고난의 여정이 어떻게 끝났습니까?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7,8)

 

요셉은 어서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랐지만 거꾸로 모든 식구가 애굽으로 내려 왔습니다. 그가 애굽 총리가 될 때까지는 자유로운 신분이 되어서 애굽을 떠나게 해달라고만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그가 기도했던 내용과는 사뭇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결국 모든 사태가 종결된 후에야 하나님이 아버지 야곱을 비롯해 형제들 모두를 기근에서 보존하려고 자기에게 그 큰 고난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 후손들도 비록 사백 년간의 노예 살이를 했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늘의 뭇별들처럼 창성해졌습니다. 너무나 보잘 것 없었던 야곱 가문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땅에 우거했다간 금방 멸망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최강국의 노예로 있었기에 비록 고생은 했어도 생명의 위협은 받지 않았고 바로가 애굽보다 더 강력해지겠다고 걱정할 만큼 번창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저의 출애굽기 강해 및 기타 여러 설교에서 자주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바로의 시위대장 집에 노예로 팔리게 된 원인은 전적으로 요셉에게 있었습니다. 아비 야곱의 총애만 믿고 철없이 형들에게 자기 꿈 자랑을 했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형들의 악한 시기 질투와 시위대장의 처의 음란한 정욕과 교묘한 거짓말은 추가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요컨대 인간들이 자기 이성과 의지대로 행했던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그 배경에서 하나님의 원대하고 오묘하며 완벽한 계획이 한 치의 오차 없이 달성되었습니다.

 

이처럼 신자가 겪는 모든 고난에는 신자가 의식하던 못 하든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은혜가 반드시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면서 신자로 도달시키는 종착점은 첫째 신자의 인격과 믿음이 성숙해지는 자리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사람과 세상 앞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열매를 맺습니다.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달성해 나가면서 야곱 가문은 물론 애굽 땅에 당신의 권능과 긍휼을 온전히 드러냈습니다.

 

따라서 신자로 이 땅에서 여러 고난을 겪게 하시는 그분의 구체적인 뜻과 계획은 미처 몰라도 한 가지 절대적 진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고난이라도 반드시 신자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며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세상 앞에 증거 되는 방향으로 끝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7-12)

 

고난 중에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기도해야하는가?

 

그럼 신자가 겪는 개별 고난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우선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성, 의지, 믿음으로 판단하여 스스로 행한 결과이자 세상과 사탄의 훼방이 거들어서 생겼음도 시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신자의 믿음을 테스트 내지 성숙시키려는 특별한 목적이 아니고는 그 고난을 결코 의도 허용 방치한 것이 아님도 아셔야 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

 

한마디로 그분은 무슨 일에나 절대적으로 선하시므로 고난이, 그분이 허용 방치 어떻게 표현하든, 잘못된 것이 절대 아니라는 진리를 온전히 체득해야 합니다. 신자의 기도도 이런 진리에 맞추어서 해야 합니다. 단순히 고난을 없애달라는 기도만 해선 많이 부족합니다.

 

예컨대 이 질병을 낫게만 해달라고 기도해선 안 됩니다. 좋은 의사를 만나 정확한 진단과 적합한 치료를 받게 해달라고, 그러면 나을 수 있다는 소망과 믿음을 잃지 않으며, 잘 회복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가족 등 주변 사람의 수고를 줄이고 그들을 위로하며 이전보다 더욱 강건해져서 진실된 사랑으로 섬길 수 있고 나아가 같은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만나서 주님의 위로를 나눌 수 있게 해달라는 등등 기도할 내용은 아주 많습니다. 또 그런 기도를 했기에 질병이 나으면 하나님이 고난 중에 있는 자기를 외면하지 않고 기도에 응답한 것이므로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잘 몰라서 혹은 너무 위중해서 무조건 질병완치만을 위해 기도했어도 하나님이 베푸는 은혜는 오묘합니다. 기도한 그대로 병이 완치되어야만 기도가 응답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작은 병을 고치려다 치명적인 더 큰 병이 있음을 발견해 목숨을 건졌다든지, 병을 치료해 나가는 과정 중에 불신자 의사를 전도했다든지 등등 신자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실현하는 방식은 무궁무진합니다.

 

심지어 병이 낫지 못하고 죽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마저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했으나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의 쓴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잘 아는 믿음의 가정에서 아버님이 자녀들의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낫지 않고 소천 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의 찬송가를 들으면서 너무나 평안하게 미소를 띠며 임종하는 모습을 끝까지 믿지 않던 딸이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댓글로 제기하신 모든 의문들은 상기에 설명 드린 것과 달리 고난에 대한 부족한 이해가 깔려 있습니다. 첫째로 고난의 직접적인 책임이 하나님에게 없지만 허락 내지 방치하신 것은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신자의 경우는 어떤 큰 고난에도 잘못된 측면보다 오히려 너무나도 은혜로운 뜻이 미리부터 계획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기도로 고난에서 구출만 구하고 또 그대로 응답되어야만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이 인간이 다 책임져야 하면 구태여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고난에 기도할 내용도 많고 응답되는 방식도 다양하며 심지어 기도대로 응답되지 않는 것도 그분의 거룩하고 은혜로운 응답일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신자에게 죄성이 남아 있고 지혜는 어리석으며 세상과 사탄의 훼방이 있습니다. 아무리 쉽게 이겨낼 수 있는 고난은 물론 범사에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아가 고난이 죽기까지 제거되지 않아도 광대하신 하나님의 오묘한 은혜가 있기에 성경 진리에 비추어 그분을 깊이 묵상하고 감사 찬송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가야 합니다.

 

댓글로 제기하신 의문들에 대해선 이 글과 앞선 전제를 종합하면 기본적인 답변이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제 글을 잘 이해하셨다면 질문자님 스스로도 고난에 관해 어떤 면에서 잘못 내지 부족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왕에 질문을 주셨으니까 각각에 대해서 간단하게 코멘트 하도록 하겠습니다.

 

(11/16/2021)

 

 

요셉은 꿈꾸는 자가 아니었다.(창37:5-11)

 

master

2021.11.17 06:16:56
*.115.238.222

lovelysg77님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하고 광범위한 내용을 알기 쉽게 간단히 축약하느라, 여전히 많이 미흡하지만, 시간이 조금 걸렸네요. ^0^

lovelysg77

2021.11.21 05:26:38
*.185.22.249

목사님 정성들여 써주신 글에 큰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과분한 글을 선물로 받게 되어 뭐라고 감사말씀을 드려야할지 어떤 말로도 충분치 않네요. 글을 읽으며 찔리기도 하고 깨닫기도 하고, 머리로 이해되지만 아직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기도 합니다. 여러번 읽고 한 문장마다 정독하고 있습니다. 이 글로 인해 주님과의 거리가 좁혀지길 기도합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피스

2021.11.17 17:05:25
*.211.209.8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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