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많습니다.

조회 수 828 추천 수 2 2022.02.17 05:41:10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많습니다.

 

[질문]

 

저는 어려서부터 영적인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아주 어릴 때는 단순히 죽음이후에 아무 것도 없을 수 있다는 생각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이 세상에 내가 없고 아무것도 느끼지도 못하는 '무'의 상태가 너무 두려워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어릴 때도 교회를 다니고 있었지만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조금씩 커가면서 두려움이 조금 더 구체화되었는데 천국이 있다는 확신도 들지 않았지만 있더라도 영원이라는 개념자체가 두려웠습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이 마냥 행복하지 않을 것 같고, 끝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두렵습니다. 영적으로 저는 어두운 저였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두려움이 조금씩 줄어들게 되었으나 여전히 해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머리로는 하나님과 함께하면 영원히 살아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행복을 알게 될 것이고 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을 줄 것이라는 어느 정도의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죽음과 내세에 대한 두려움이 들 때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죽을 때까지 완전한 답이 없이 살다가 가다가 천국에 가서야 답을 들을 수 있는 걸까요? 완전히 죽음의 두려움 없이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없는 건가요?

 

[답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신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 값을 대신 감당해주신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였기에 영생을 얻었습니다. 죽은 후에는 예수님의 비유대로 천사들에게 받들려 더 이상 눈물도 고통도 없는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갑니다.(눅16:22) 그 천국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마지막 날 육신이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질 것을 대기하게 됩니다.

 

슬픔과 고통이 더 이상 없는 천국에 들어가므로 간혹 신자는 죽음에 대해 슬퍼하거나 두려워해선 안 되고 오히려 찬양하며 큰 기쁨으로 맞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영적인 진리로는 올바른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두 팔은 하늘로 향해도 두 발은 땅을 딛고 살아야만 하는 신분임을 감안하지 않은 너무 독단적인 주장입니다. 사람은 천국에 입성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육신을 입은 연약한 존재로서 물질계의 영역 안에 제한됩니다.

 

그래서 죽음은 이 땅의 삶과는 비교될 수 없는 지극히 좋은 곳에서 영화로운 인생이 새로이 시작되는 출발임을 확신하는 신자라도 죽음을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천국에 대한 소망을 재확인하고 심지어 기도를 해도 잠시 그 때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가슴 한 곁에 항상 남아 있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차원인지라 대체 어떤 것인지 상상이 안 가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학예회에서 맡은 순서를 시작하기 전에는 육체적 고통이 수반하는 그런 차원이 아닌데도 가슴이 떨리고 두려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막상 그 순서를 끝나고 나면 너무 기쁘고 왜 그렇게 두려워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죽음도 이처럼 막상 겪으면 너무 좋을 것입니다.

 

둘째는 대부분 질병이 치료의 한계를 넘을 때 죽기 때문에 육신적 고통도 당연히 따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수면 중에 호흡이 자연스레 중지되거나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고통 없이 죽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드문 케이스이고 사람마다 질병의 종류와 세기는 달라도 임종 직전에는 대체로 육신적 고통을 느낍니다.

 

셋째는 사랑하던 가족 친지 친구들과 완전히 헤어져야 하고 또 기쁨으로 열심히 행하던 일들을 더 이상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남은 사람도 가족이나 친지가 죽으면 가장 크게 후회하는 것은 더 자주 교제하거나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생각보다 짧고 한 번 뿐이라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이루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이 또한 죽음이 두려워지는 중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내가 없고 아무것도 느끼지도 못하는 '무'의 상태가 너무 두려워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런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로 그 때문에 죽음이 두렵긴 하지만 막상 죽음이 닥치면 그 당사자는 이미 다른 차원에 들어가 있기에 그런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따라서 질문자님이 죽음에 대해 가장 먼저 가져야 할 태도는 죽음을 실은 모든 이가 두려워하고 있고 두려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부터 객관적으로 수용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이유는 믿음의 성숙과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에 신자로서 가지면 안 되는 두려움이라고 인식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말하자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본인에게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부터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첫 걸음이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느끼기에 정서적으로 강박증적인 경향이 있는 것이 아닌지 염려된다면 오히려 전문가의 상담과 치유를 받는 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어떤 사람도 죽음은 피할 수 없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닥칩니다. 위의 세 가지 이유로 인해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있는 그대로 담담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라인홀드 니버라는 미국 신학자가 평생토록 지속적으로 행한 유명한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주시고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죽음과 그에 따른 두려움이야말로 아무리 최고 신학자라도 변화시킬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덤덤하게 받아들여서 평온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만이 가진 특성입니다. 바로 그런 죽음에 대한 이성적 분별력은 물론 평소에는 죽음을 망각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에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이 닥친다는 한계성을 자각하고서 마음의 대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먼저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분별하고서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합니다. 평소에는 일상적인 일에 파묻혀 죽음에 대해서 거의 잊어버리고 살게 됩니다. 인간이라면 올바른 교육과 훈련을 받아서 성장하고 직장을 얻고 가정을 이루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역할을 바쁘고도 의롭게 감당해야 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로 죽음에 대한 망각장치의 일환인 셈입니다. 한마디로 인생더러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보려고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생에 고난이 많은 것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좋은 방도가 됩니다. 쉽게 말해 죽을 만큼의 환난을 이겨낸 사람은 아무래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게 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제 경우를 들자면 저는 20여 년 전에 치명적인 암에서 12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교인들의 기도로 완벽하게 마치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는 이미 한 번 죽었어야 했던 목숨을 하나님이 은혜로 살려주었으니 다시 닥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상당히, 여전히 남아는 있지만, 적어졌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려고 그런 큰 고난을 겪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대신에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육신과 정신이 쇠약해집니다. 이 또한 죽음을 준비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각 연령대마다 그에 합당한 어려운 일, 고난, 심지어 질병을 겪게 됩니다. 죽을 때가 다 되어서는 정말 육신이 움직이는 것마저 귀찮고 힘들게 여겨집니다. 저도 서서히 그런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나 죽을 때에 중병으로 고통 가운데 죽는다고 했는데 죄송한 표현이지만 그 때는 이미 그런 고통에 많이 익숙해진 상태입니다. 심지어 이렇게 힘들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마음까지 자연스레 들게 됩니다. 제 뜻은 어차피 인생에 이런 단계가 다가오기 마련이니까 미리부터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산다는 것이 마냥 행복하지 않을 것 같고 끝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두렵습니다.”라고 했는데 ‘영원’이라는 개념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물질계에 제한되어 사는 이 땅의 인간에게만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계신 영계는 시간 개념 자체가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지구상의 시간을(당연히 각 별마다 시간이 다 다르게) 만드시고 그 시간을 초월해 계십니다. 그분에게는 항상 현재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죽은 후 가게 되는 천국은 끝없이 시간이 지속되는(everlasting) 그런 영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처럼 항상 현재 안에 거하게 되는 영겁(eternity)입니다. 그러니까 천국 성도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세세토록 그분을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천국의 물리적 상황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죄악 자체가 아예 공존하지 않고 완전한 사랑과 진리만이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고후3:16-18) 천국 성도들 간에 또 성도와 주님 사이는 매번 더더욱 참된 사랑과 지혜로 서로를 섬기게 되며 그래도 전혀 지루하지 않는 곳입니다. 천국의 상태에 대해서마저 염려하는 것은 성경과 무관하게 그야말로 아무 쓸데없고 헛된 상상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로 자기 죄를 스스로 도무지 씻을 수 없는 죄인에게 성령이 간섭하여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살아 있을 때에 구원이 이뤄지고 신자에겐 그에 대한 확신도 생기게 해줍니다. 죽음과 연결시켜 말하면 신자더러 죽음 이후는 아예 걱정하지 말고 구원 이후의 이 땅에서 삶에 초점을 맞추고 신자로 부름 받은 일에 최선을 다해 충성 헌신하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엄청난 고난과 핍박을 겪었고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습니다.(고후12:11:23-27) 그런데도 날마다 가장 염려되는 것은 모든 교회들이라고 했습니다.(28절) 심지어 그 고난이 너무 힘들어서 빨리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으나 육신에 거하며 소명에 충성하는 것이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더 유익이 된다고 고백했습니다.(빌1:23,24) 그러면서 지금까지 해온 일은 잊어버리고 오로지 앞에 있는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해 좇아가며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빌1:12-16) 바울은 그래서 신자가 죽음에 대해서 가질 근본적인 개념을 아래와 같아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3-58)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바울처럼 담대한 믿음으로 주의 소명에 매일 충성해야 한다는, 그럴 수만 있다면 최선이지만,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도달할 목표이긴 해도 당장에 그렇게 되기는 힘듭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려면 무엇보다 죽음자체를 두고 깊이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 아무래도 계속 두려워지고 그 생각에 묶이게 됩니다. 신자로서의 정체성과 신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확고히 정립하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믿음의 여정을 주님이 주신 소명 안에서 장기적 종합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매일 꾸준히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과 교제 동행하면서 말입니다.

 

이마저도 믿음이 연약한 자에겐 어려울 수 있고 시간이 걸리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다시 강조하지만 죽음 자체를 가능한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러려면 여러 일로 바빠야 하고 그런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 전혀 유익이 없고 본인에게 손해만 될 뿐이라는 철저한 자각부터 해야 합니다. 나아가 그러면 자칫 사탄에게 틈을 내어줄 통로가 될 수 있음도 인식해야 합니다. 주어진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어차피 많은 어려움과 질병도 겪고 점점 죽음에 대해 무디어지며 심지어 죽음이 감사하게 여겨질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을 미리부터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정답입니다.

 

(2/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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