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마태복음 25장에는 열 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의 세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먼저 열 처녀 비유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미련한 처녀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할 때 나누어 주면 좋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열 처녀 모두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쌔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13)

[답변]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 당신만의 특유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의 비유의 특성과 일반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그 해석법에 관해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답변한 내용이 객관 타당성을 가지는지를 질문자께서도 스스로 점검하실 수 있고 또 추가적인 의문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1.        비유와 수수께끼

비유란 화자(話者)가 어떤 객관적 진리를 설명하거나 강조하기 위해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에 빗대어 표현하는 양식입니다. 주로 직유, 은유, 속담, 설화 같은 문학적 수식법을 동원합니다.

비유에 대비해 수수께끼는 그 이야기와 표현법이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사사기 9:1-21에는 세겜의 시민들이 아비멜렉을 그들의 왕으로 삼자 이 소식을 들은 요담은 ‘숲속 나무’의 수수께끼로 그들을 꾸짖는 내용이 나옵니다. 숲속 나무들이 감람나무, 무화과 나무, 포도나무에게 순서대로 찾아가 자기들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전부 거절 당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나무에게 청하니 가시나무는 자기의 권세에 나무들이 복종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워 동의했습니다. 요담은 세겜 백성들이 그들 가운데 가장 못한 사람을 왕으로 뽑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실제로는 나무들은 이야기 속의 나무들처럼 행동하지 못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수께끼에 해당합니다.

이에 반해 비유는 예를 들어 누룩의 비유(마13:33)에서처럼 떡을 만드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떡을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비유의 대상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이고 항상 현실에서 가능한 범위 안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수수께끼는 듣는 사람의 자유로운 상상에 따라 세세한 부분까지 연관 지어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유는 어디까지나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의 범위 이상으로 해석을 확대해선 안 됩니다. 나아가 비유의 주제와 큰 줄기만 붙들어 해석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하며  지엽적인 내용과 세밀한 표현에까지 억매여선 안 됩니다.  

2.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뜻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은 수수께끼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비유만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어찌하여 저희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니이까?”(마13:10)라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13:11-15)고 대답했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를 알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감추려고 비유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말씀의 권위를 받아 들이는 자와 전혀 그렇지 않고 반대하는 자로 확연하게 둘로 구분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 스스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배척하려고 비유 속에 비밀장치를 했거나 수수께끼 같은 난해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설명대로 그들의 마음이 완악했으므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비유의 주제를 한 마디로 천국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 만으로도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씀이 됩니다. 비유의 주제가 단순히 도덕적 계명처럼 이 땅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고 또 말씀하신 당사자의 권위도 당연히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원한 구원과 멸망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완악한 자는 들어도 알지 못하고 대신에 마음이 순수하고 가난한 자는 구태여 학문적이고 체계적인 분석방법을 동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들은 구약성경을 꿰 뚫고 있었으며 기도와 구제와 금식에 열심이었습니다. 율법을 성실히 준수했던 당시로선 가장 의롭고 도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도덕적으로만 이해했습니다. 자기들더러 외식하는 자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자식이며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한다는 주님의 지적은 세상에서 가장 선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그들의 분노를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천국의 비유 가운데 숨어 있는 천국의 비밀을 제대로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단 한 번도 헛되고 그른 가르침을 주신 적이 없고 인류 역사상 가장 심오한 차원의 도덕을 가르친 주님을 자칭 도덕 군자들이 앞장 서서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교만한 그들로선 비유의 주제인 천국을 못알아 듣기도 했지만 자기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지적한 예수님 당신을 저주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진리는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마음을 열고 천국에서의 영원한 구원을 소망하는 자만이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 이는 오늘 날의 독자에게도 똑 같이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신자라면 그 비유의 말씀을 통해 이천년 전의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속의 비유는 지금도 여전히 비유의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에게 구원의 길만 열어 놓은 것이지 심판과 구원이 종결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완전한 주님의 통치는 마지막 때까지 연기되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비유로만 말씀하셨던 뜻 그대로 하나님에게 마음을 여는 자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계획에 관한 비밀이 열릴 것이지만 완악한 자에게는 감춰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주시기 싫어서나 소수의 사람만을 편애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고자 원하며 또 그 동안 심판이 취소 된 것이 아니라 단지 연기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라도 예수님의 모든 비유의 주제는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3. 예수님 비유의 해석 기준

비유가 갖는 문학 기법상의 특성과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가르치고자 하신 뜻을 종합해보면 오늘날의 성경 독자가 비유를 해석하는 객관적 기준을 몇 가지 제시할 수 있습니다.

첫째, 비유의 주제는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도덕적 계명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표현에 천국에 관한 것이 없다 할지라도 그 배경은 항상 메시야의 구원과 더불어 새롭게 실현될 하나님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살펴야 합니다. 주님 나라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말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현실에서의 지엽적인 문제에 제한시키려는 해석이나 적용은 피해야 합니다.

둘째, 거의 모든 비유가 사전에 어떤 질문에 대답하거나 어떤 상황이 전개되어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앞 뒤 문맥을 살피고 제기된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해석이 그런 질문과 상황에 벗어난 것이라면 제기되고 있는 문제를 잘못 파악했거나 해석이 틀린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셋째, 비유에 동원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당시의 역사, 지리, 문화, 풍습 등을 철저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의 사람들의 사고 방식도 알아 당시 상황을 재현한 후에 해석해야 합니다. 모든 비유가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보편적인 상황과 실제로 가능한 사건을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낡은 술 부대와 새 포도주의 비유에선 당시의 포도주 저장하는 법을 모르면 정확한 해석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4. 열 처녀 비유의 해석  

위에서 말한 비유 해석의 세 가지 기준으로 이 열 처녀 비유를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알기 쉽게 먼저 당시 문화적 관습부터 살피고 다음에 문맥에서 제기된 문제를 찾고 마지막으로 천국이라는 주제에 대비해 그 의미를 살펴 보겠습니다.

4.1. 히브리인의 결혼 풍습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결혼 예식은 몇 가지 절차에 따라 진행됩니다. 먼저 신랑은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가서 종교적 예식에 따른 결혼식을 치릅니다. 해가 질 무렵에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 며칠 동안 모여 함께 춤추고 노래 부르며 흥겹게 노는 혼인잔치를 거행합니다. 그런데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올 때에 사람들은 상당한 거리까지 나가 그들을 마중합니다. 본문의 비유에 나오는 열 처녀는 신부를 데려 오는 신랑 일행을 저녁무렵부터 등을 들고 나가 기다렸다가 혼인잔치로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한 자들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등이 횃불인지 호롱불인지 불명하지만 어쨌든 둘 다 기름을 담거나 적시는 용기가 작아 유대인들은 여분의 기름통을 갖고 다니는 것이 풍습이었습니다. 이런 등불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준비해야 했는데 만일 등불을 들지 않은 자는 불청객이나 강도로 취급되어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여분의 기름 통을 준비했으나 미련한 처녀는 기름을 들고 있는 등불에만 채우고 여분의 기름 통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4.2. 문맥에서 제기된 문제

예수님은 24:1-41까지 예루살렘의 멸망과 종말에 관해 예언하셨습니다. 24:42부터 25장 마지막까지 마지막 심판을 맞이하는 성도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교훈을 5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각 비유마다 예수님이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가 뚜렷이 드러나 있으며 또한 그 주제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그에 맞는 적절한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먼저 24:42-44의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에서는 예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아무도 모르므로 항상 깨어 있으라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45-51의 선한 청지기와 악한 청지기의 두 번째 비유는 성도들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고도 지혜롭게 잘 감당하면 예수님 재림 시에 상급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예언과 앞 선 두 비유를 전제로 해서 마지막 때라는 연속되는 주제를 가진 세 번째 교훈이라는 근본적인 이해를 갖고 해석해야 합니다. 25:1에 “그 때에”라고 시작하는 것이 바로 종말의 때를 의미하며 그 때는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와 신랑 집에서 치를 혼인잔치의 때로 비유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주제는 신랑이 더디 옴과 같이 재림의 때가 더딤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주님의 오심에 대해 마땅히 예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행동하지 말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여분의 기름통을 준비하여 재림이 더디 올지라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3. 질문에 대한 답변과 해석    

비유를 해석하는 세 가지 원칙은 ‘천국과 문맥과 당시 관습’에 바탕을 두라는 것이라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만약 세부적인 부분의 해석이 주제와 상관이 없거나 당시의 객관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면 배제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질문자님께서 제기한 슬기로운 처녀가 미련한 처녀에게 기름을 나눠줬더라면 다 같이 열명 모두 구원 받지 않았겠는가 하는 질문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문이고 그 뜻은 선합니다만 비유의 해석 원칙과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는 조금 관계가 없는 듯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이 하신 비유에 관해 구체적으로 그 뜻을 풀어서 직접 설명해 주신 것은 두 가지 뿐이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비유 마13:3-9 해석 13:19-23)와 가라지의 비유(비유 마13:24-30 해석 13:37-43)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다른 비유들을 해석하지 않은 이유는 이 모범적인 해석에 비추어 다른 것도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당시 사람들로선 이 두 비유 뿐만 아니라  모든 비유에 나오는 설명들에 관해 누구나 잘 알고 직접 시행하고 있는 풍습이라 구체적으로 따로 해석해 줄 필요가 없었던 것도 그 까닭입니다.  

예수님이 그 두 비유를 해석한 것에 따르면 마지막 때와 천국을 소원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의 태도에 관해서만 말씀하셨지 주제 외의 부분은 일절 다루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선행을 강조하거나 비유에 나타나 있는 다른 세밀한 표현을 두고 부차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관습으로는 등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 불을 켜지 못하는 자는 도적이나 불청객 취급을 받았지 기름을 나눠준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또 나눠주기를 거절하는 것이 비난 받을 행위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또한 그런 부분까지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은 단순히 치밀하게 예비하는 습관이나 품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평소 때에 본인이 주님과 어떻게 교제했으며 얼마나 주의 자녀답게 살았느냐를 의미합니다.

비유에 나타난 당시 상황을 유추해 보기로 합시다. 신랑의 친구로 초대 받은 자라면 신부 집이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지, 신랑의 성격이 혹시 더디 올 수 있는지, 아니면 신부 집이 집안이 넓어 예식이 오래 걸릴 수 있다든지, 날씨가 나빠 시간이 지체 될 수도 있다든지 더디 올 수 있는 가능성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은 신랑과의 교제가 평소 그 만큼 없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심판은 불시에 닥칩니다. 그 심판의 때에 그리스도 앞에 내 놓을 자신의 신앙 상태와 신자로서의 자세(등불의 기름)를 타인에게 꾸어 달라고 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흔히 시쳇말로 하듯이 마누라 치마 끝을 잡았다고 남편이 천국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 문제는 하나님과 본인의 일 대 일의 문제입니다. 아버지가 믿었다고 아들이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이 기름의 비유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는 것이 바로 그뜻입니다. 구원의 진리와 성령의 은혜를 가르치는 성경이나 복음의 일군에게 가서 그 진리를 배우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 각 자가 개별적으로 회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기름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와 너희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라”는 거부의사는 종말론적인 관점에서만 이해되어야 합니다. 복음 증거에 게을리 하거나 혼자서만 천국을 가려는 이기주의나 이웃 사랑을 거부하는 악한 행위로 평가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계속 말씀 드린 대로 불시에 찾아 온 종말의 때에 각 자의 심판은 자기가 이 땅에서 천국을 소원하고 준비된 자인가 아니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원어적인 표현으로도 이중의 부정어가 첨가 되어 함께 쓰기에는 도저히 충분하지 않아 꾸어 주면 꾸어 준 자도 기름이 모자라 아무도 신랑을 맞이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예수님의 뜻은 처녀를 여섯 명이나 여덟 명도 아니고 꼭 열명이라고 표현한 것에 있습니다. 열은 완전을 상징하며 하나의 유대 회당을 구성할 수 있는 최소 인원이기도 합니다. 열 처녀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을 다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구원 받기를 소원하시지만 구원의 기준은 예수와의 인격적 교제가 있느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그런 앎이 없는 자가 등불에 기름을 준비 안 한 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선행 혹은 전도의 열심과는 상관 없이 구원 받지 못할 자가 교회 안에서도 반드시 생긴다는 것입니다.

12절에 신랑이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에서 쓰인 ‘알다’는 원어의 뜻이 단순한 지적인 앎이 아니라 교제와 경험을 통해 아는 상태입니다.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아는 것입니다. 혼인 당일 날 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전부터 신랑과 신실하고도 계속된 교제를 통해 일 대 일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형성 되어 있느냐를 따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비유의 주제는 24:42, 25:13에서 주님이 결론 지었듯이 항상 깨어 있으되 더디 올 수 있으니 믿음을 포기하거나 타락하지 말고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평생을 걸쳐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서 주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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