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은 후에도 자꾸 죄를 지어 너무 괴롭습니다.

조회 수 3921 추천 수 107 2006.10.31 00:01:28
[질문]

믿은 후에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예전의 제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미워하고 화내고 원망하고 치사한 것은 말할 것도 없는데다 가장 큰 문제이자 다른 여타 문제의 근원은 남을 잘 용서하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히려 예전에는 이런 모습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깨끗이 인정하고 살았지 내 인생 망친 놈 너도 한번 망가져 봐라는 마음으론 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제 인생 망치는 것도 두려워 않고 감정이 시키는 대로 원망을 풀려고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입으로 내뱉지 못할 말도 화가 치밀면 서슴없이 내뱉고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되어버립니다.

제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맞는지 정말 예수님을 만났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여지껏 듣고 깨닫고 생각하고 믿고 살아왔던 모든 삶이 거짓이 되어버리는데 제가 이 상황을 인정해야하나요? 정말 저 같은 자도 예수님께서 만나주시고 고쳐주시고 치료해주시고 회복시켜주시는 그런 긍휼의 은혜를 누릴 수 있을까요?

범죄함으로 얼룩진 제 삶을 볼 때에 하나님의 진노가 생각이나 때로는 두렵지만  상처와 원망 이런 것들이 저를 휘두를 때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함을 완전히 잊고 제 맘대로 행동해버립니다. 기도 생활 않은지도 오래됐습니다. 기도하면서도 걱정하는 저를 보니 기도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집니다. 이제는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도 듭니다.

[답변]


질문자님만의 문제가 아니라 저를 포함한 모든 신자가 매일 고뇌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또 그 원인이 질문자님이 나쁘거나 예수님의 사랑이 줄어졌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절대로 멀리 간 것이 아닙니다. 진짜 멀리 간 사람은 자신이 멀리 간 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멀리 간 것을 깨닫고 심령이 괴로워지면 그 자체로 사실 예수님 바로 곁으로 되돌아 온 것입니다. 문제는 본인이 그런 죄책감을 하루 빨리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영원토록 다함이 없으며 완전하기에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미 구원한 신자의 형편과 처지와는 더더욱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신자가 어떤 형편에 있든 주께로 돌아서려고 마음을 고쳐먹고 무릎을 꿇는 순간 바로 그분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동안 그 은혜가 신자 곁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자가 이런저런 이유로 그 은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신자가 죄를 지었다고 예수님이 미워하지 않습니다. 죄를 짓고도 당신께로 돌아서지 않는 자를 미워합니다. 반면에 죄 안 짓고 떳떳하게 사는 자를 꼭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죄를 애통해 하며 심령이 가난해져 당신께로 되돌아오는 사람을 가장 좋아합니다.

구원의 의미

성령으로 거듭나서 구원을 받았다는 가장 확실하고도 기본적인 증거는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는 것입니다.(고전12:1-3) 그 말은 신자가 예수를 저주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진정으로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있으면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 구원 받은 증거를 없애거나 약하게 할 수 없으며 완전히 예수님의 긍휼과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오직 예수를 아느냐 모르느냐 한 가지 뿐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거룩하고 신령해진 것 하나 없어도 하나님은 오직 예수를 알고 믿는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원죄를 비롯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는 하나님께 용서 받지 못한(예수를 알지 못하는) 죄인인 반면에 신자는 단지 용서 받은(예수를 아는)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한 죄인을 용서 해준 구원을 신자 쪽에서 보면 그 용서를 감사하며 은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는 아직도 불신자 시절의 옛 습성(관습과 품성)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단지 하나님을 모르고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아 돈만 목표로 살았던 이전의 삶에서 완전히 되돌아 선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며 살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그 결심을 실행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크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도하며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 뜻대로 믿음으로 열심히 사는 것이 일차적이지 않습니다. 기도와 말씀은 시간을 들여 꾸준한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또 노력을 한다고 당장에 믿음이 쑥쑥 자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전처럼 스스로의 의지로 도덕적 선행을 쌓으려 하는 것도 아닙니다. 불신자시절에도 그렇게 해보았지만 도무지 다 실패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항복하고 엎드려 신자가 되었지 않습니까?

아무리 하나님 뜻대로 거룩하게 살려고 해도 옛 습성이 남아 있기에 그것이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저지르는 신앙 상의 가장 큰 잘못은 그런 옛 버릇이 되살아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때에 자기의 바뀐 위치와 신분을 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단순히 “영원토록 하나님 품 안에 있는”(위치) “이미 용서 받은 죄인”(신분)일 뿐입니다.

우선 이미 용서 받았기에 두 번 다시 하나님의 사랑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그렇습니다. 영원토록 하나님 품 안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나 잘한 것 없고 도저히 자격이 안 되는 자를 구원해 놓고 다시 잘못한 일이 많고 자격이 없다고 버리겠습니까? 그럼 하나님 스스로 모순을 범하게 되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마저 허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또 신자가 믿은 후에 잘못을 범해도 이전보다는 아무래도 덜합니다. 이전에는 까만 옷을 입고 새까만 곳에서 같이 까만 옷 입은 사람들 틈에만 살다보니 자기가 까만 옷을 입은 줄도 몰랐습니다. 큰 잘못을 일상적으로 범해도 양심의 가책이 거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얀 빛 가운데 예수님의 보혈로 세탁해준 흰 옷을 입고 있는데 그 옷에 때때로 얼룩이 묻으니 더 괴로워지게 된 것입니다. 설령 이전과 달라진 것 없어도 최소한 밝은 빛 가운데 나오니까 자기가 까만 옷을 입은 줄은 알고 괴로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아주 크게 변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 영원토록 있다는 것은 잘못을 범해도 언제든 하나님이 다시 용서해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전과 달리 죄를 안 짓고 선해지는 것도 신자 자신의 의지적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십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무조건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진실 된 고백과 회개 위에 당신의 긍휼을 부어주십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긍휼이 자신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실 것을 믿고 성화(聖化)의 문제도 하나님의 권능에 의탁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신자 본인보다 그분이 신자를 당신의 성품에 참예시키기를 더 원하십니다. 신자가 마음을 열고 그 작업에 기꺼이 자신을 던져 넣을 준비가 되어 있으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성화를 이루는 비결

그러나 하나님이 성화를 이뤄주시는 일을 단순히 신자가 착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 후에 그 기도한 대로 따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정도로는 여전히 자신이 의지적으로 노력한 것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려고 노력했고 또 기도한 그대로 하려고 자신을 자꾸 채찍질 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 이전에 자기가 받은 구원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해의 바탕 위에서 기도하면서 경건을 훈련하여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본질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사단에 붙잡혀 있던 한 죄 많은 영혼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권세로 그 울타리를 깨트리고 빼앗아서 당신의 품 안으로 데리고 오신 것입니다. 그럼 그 다음에 당연히 사단의 방해가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방해하겠습니까?

대부분의 신자들이 사단이 자기를 넘어뜨려 다시 죄를 짓게 만든다고 단순히 생각하고 치웁니다. 예수님이 깨트린 것은 사단의 울타리뿐이지 신자의 습성이 아닙니다. 옛 습성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사단이 구태여 방해를 하지 않아도 신자가 된 후에도 그 습성이 되살아나서 신자 스스로 죄를 짓습니다.

이는 마치 용수철이 아무리 당겨도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듯이 죄짓던 본성은 물리학적 탄성(彈性)의 성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용수철의 탄성을 없애려면 자꾸 당겨야 합니다. 계속해서 당기고 놓고를 반복하다 보면 탄성을 잃고 늘어진 상태로 있기 때문에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이 죄의 탄성을 없애는 작업은 신자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가며 반복해서 천천히 해야 합니다. 정말로 피 흘리기까지 예수님을 닮으려고 자신을 깎고 다듬고 부수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신자가 사실은 이런 원리를 알고 있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단으로서도 죄의 탄성을 너무나 잘 알기에 신자더러 직접 죄를 짓도록 유혹하기보다는 다른 식의 방해를 더 자주 행합니다.

그것은 바로 신자가 죄를 지을 때마다 아직도 사단의 울타리 안에 있는 양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단으로선 이미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 있는 신자를 다시 자기 울타리 안으로 데려 올 수는 절대 없습니다. 그러니까 심술이 더 동해서 옛날의 자기 부하에게 자꾸만 영향력을 끼치려고 합니다. 계속해서 옛날의 상관을 잊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지가로 완전히 깨트려진 울타리가 아직도 그대로 튼튼히 쳐져 있어서 신자가  그 속에 붙들려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나는 아직 구원 받지 못했는가 봐? 나 같은 자는 예수님의 사랑을 도저히 받을 수 없을 꺼야!” 이런 낙심은 역으로 나는 여전히 사단의 부하인가 여기는 의심과 동일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신자가 성화를 이루기 위해 가장 먼저 무엇부터 해야 합니까? 사단의 바로 이 속임수부터 극복해야 합니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부 신자를 속이는 것뿐입니다. 신자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쳐서 자기 힘으로 어떤 나쁜 짓을 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능력은 있지만 그럴 수 있는 권세는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 품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스스로 사단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묵과(黙過)하십니다. 신자 스스로 그 속임수를 제대로 극복할 수 있어야만 당신과 함께 성화를 이뤄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정체와 계략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성도는 전부 자기 노력만으로 성화를 이루려 합니다. 신자가 거룩해지려는 노력과 훈련도 영적인 싸움임을 확실히 인식하는 신자만이 성령님의 도움을 제대로 받을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신자가 성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항상 기도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단이 자기를 속이려 드는 것을 깨트리는 일입니다. 옛 습성이 되살아나 또 다시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 안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언제든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그분이 나를 다시 용서하시고(아니 이미 영원토록 용서하셨고) 사랑하고 계시기에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사단의 거짓은 너무나 교묘하고 힘이 크기 때문에 그 일을 신자 혼자만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모든 신자에게 내주케 했습니다. 사단과의 싸움은 성령에 의지해서 해야 합니다. 어떤 신령한 초자연적 은사를 행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잘못을 저지른 후에 평상적인 죄책감을 넘어 낙심에 빠져버리는 것 자체가 바로 사단의 거짓임을 다시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내용도 달라져야 합니다. 단순히  “제가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주시고 다시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힘을 달라”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다시 용서해 달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일을 두고 진실한 회개를 해놓고도 하나님의 죄 사함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자꾸만 용서를 구하면 신자는 이미 영원토록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또 하나님이 신자가 다시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힘을 단번에는 절대 주지 않습니다. 그런 요구는 자기를 성자 아니 하나님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신자가 죄를 지을 때마다 기도하는 내용은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재확인하는 작업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또 다시 사단에게 속아 넘어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서 저를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주신 그 사랑과 은혜를 잠시 잊었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내 힘만으로 사단과 죄를 이기려 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 권세를 붙들고 나가겠습니다. 저에게 항상 성령의 권능을 충만하게 덧입혀 주셔서 흑암의 세력에서 지켜 보호해주시고 거짓에 넘어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런 사단의 속임수를 깨트리는 기도를 드린 후에 자기 죄를 입술로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사단이 영원토록 하는 일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못 받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더러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 가장 좋은 수단이 바로 신자 스스로 죄책감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거짓말로 속이는 것입니다.

거짓말의 통로  

그런데 사단의 그런 거짓말이 가장 잘 먹히는 통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감정입니다. 감정 자체가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잠시 연재가 중단이 되어 있지만 “감정을 살려라”는 사이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감정의 본질을 영악한 사단이 잘 이용한다는 뜻입니다.  

감정은 인간 내면 의식의 세 부분, 지성과 감정과 의지 셋 중에서 세상에 직접 노출 된 곳으로 외부의 자극에 대한 인간의 일차적인 반응입니다. 신체의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이 외부의 자극을 인지하면 자동적으로 감정이 생기게 됩니다. 얼음을 만지면 차고, 송충이나 뱀을 보면 징그럽고, 피를 보면 소름이 끼치고,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서 승리하면 신이 납니다. 감정은 그래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자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감정의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혀로 맛보고 코로 냄새 맡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진 대로만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보이고 들리는 대로 인간 내면의 생각이 돌아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칫 감정에만 사로잡히면 오직 보이고 들리는 세상이 전부인줄 착각하게 됩니다. 그 역도 성립해 보이는 세상에 집착하면 감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사단이 노리는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동물과 차원이 다른 지성과 의지를 주었습니다. 사단에 속아 넘어가서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여 감정이 생기면 그것을 지성으로 잘 판단하여 다음에 취할 행동을 선택하고 결정해서 의지로 시행하라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로 오븐에 올려놓은 차 주전자를 만지면 당장 뜨겁게 느껴지고 손이 데므로 지성이 뜨거운 것을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는 삶의 지혜를 하나 만들어서 머리에 저장합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아무리 예쁜 차 주전자를 보아도 만지면 뜨겁다는 원리를 지성이 깨우쳐 주고 만지고 싶은 욕망을 의지가 막아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차 주전자가 너무 예쁘다는 감정에만 사로잡혀 지성과 의지가 전혀 작동 못하게 막으면 뜨거운 줄도 잊고 또 다시 만지게 되고 당연히 상처를 입습니다.

사단이 왜 감정에만 사로잡히게 합니까? 보이는 세상에만 묶여 있으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또 그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것들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그분을 찾는 이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알아 그분 뜻대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한 것입니다.

사단은 신자더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오직 보이는 것에 묶이도록 즉 감정에 사로잡히도록 만듭니다. 믿음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신자는 기도와 말씀을 더욱 등한시 하게 됩니다. 신자가 영적으로 궁핍해지면 박수치고 좋아 할 존재는 사단뿐입니다. 신자가 죄를 지어 기도도 안 될 정도로 낙심될수록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신자 본인에게 해로울 것은 두 말할 것도 없고 사단 좋은 일을 시켜 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물론 너무 낙심되어 신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기도가 정말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자에게 내주하신 성령 하나님이 먼저 어떻게 해주시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승리하신 권능이 신자와 이미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사단을 똑 바로 대면해 이겨야겠다고 담대하게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에 연연하기 시작하면 그런 마음먹기조차 힘들어집니다. 사단이 가장 노리는 바입니다. 그래서 어떤 한 가지 감정에 사로잡혀 지성과 의지의 작동을 막을 때는 사단에게 속아 넘어가고 있지 않는지 반드시 의심해야 합니다. 주로 분노, 시기, 질투, 저주, 음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가 그렇지만 좋은 감정에 속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감정이라도 사로잡히면 지성을 사용하여 그동안 말씀과 기도로 자신 속에 저장해 놓은 영적 진리를 회상할 수 없게 되며 당연히 그 진리대로 따르겠다는 의지의 작동도 방해 받습니다.  

질문자님의 실토한대로 자꾸 분노에 사로 잡혀 용서가 안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단순히 믿음의 문제인 것 같아 기도하고 말씀 보면 나아질 것 같지만 사실은 그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용서가 안 된다는 이유는 이미 끝난 일인데도 상대가 자기에게 했던 잘못이 자꾸 마음에 떠올라서 그렇습니다. 당장 그 일을 당한 현장에서 분노가 일고 용서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두고두고 그 괘씸했던 행위가 마음속에 되살아나는 것은 여전히 마음의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한 것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마음속에 떠  오르는 것이 진리의 실체가 아니라 사단이 용서 못하게끔 자꾸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만든 흉계임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분노라는 감정을 자꾸 불러일으켜서 용서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자는 십자가에 드러난 예수님의 은혜를 항상 받고 있기에 그 은혜를 주위에 나눠주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용서란 그 십자가 은혜의 참 뜻을 지성으로 되살려내고 의지로 자기에게 잘못을 범한 상대에게 그 은혜를 베푸는 일입니다. 사단은 신자 속에 쌓인 감정의 앙금을 자꾸 눈덩이처럼 부풀리도록 충동질 하여 지성과 의지의 작동을 막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일단 지나간 사건들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지우는 작업부터 해야 합니다. 그  일은 쉽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자꾸 분노가 치솟고 용서하지 않겠다는 고집 자체가 옛 본성이기도 하지만 사단이 교묘하게 신자를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것 모략임을 기도 가운데 철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신자가 가장 먼저 할 일      

재삼재사 말씀드립니다.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내 개인의 구세주 되심을 온전히 믿고 그 믿음에서 후퇴하거나 옛날의 자신으로 되돌아 갈 생각이 없다면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용서 받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신자 스스로 의도적으로 멀어지지 않는 한 그분의 사랑은 절대 줄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자가 멀어질수록 그분의 사랑은 더 집요하고 강하게 신자를 따라 옵니다. 지금 같은 고뇌를 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신경 써야 할 문제는 죄를 짓지 않거나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단의 거짓말에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는 무슨 일을 해도 그 주위에 사단이 쳐놓은 덫이 없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을 포함한 모든 신앙 활동을 사단과의 영적인 전투라는 관점에서 해야 합니다.

특별히 “나는 왜 아직 이 모양이지?”라는 의심과 불만이 들거나, 한 가지 감정에 사로 잡혀 다른 아무 일도 못하게 될 때에는 사단의 음흉하고도 교묘한 거짓의 영이 작동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멀어진 것이 아니며 신자 자신도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더 큰 잘못은 죄 짓고 기도나 말씀에 등한 한 것이 아니라 사단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거짓말에 더 이상 속지 않는 것이 가장 크고도 긴급한 일이지 않습니까?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찌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시139:7-12)

“누가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지구상에는 없는 사랑입니다. 역사상 한번뿐이었던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분은 지금도 모든 신자를 그런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확신이 있다면 단순히 주님 앞에 가난한 심령으로 통회 자복해 보십시오. 위에 길게 언급한 영적 원리를 하나도 몰라도 주님이 반드시 그 영혼을 소생시켜 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의 능력을 단순히 믿고 받아들이십시오.

10/30/2006

김형주

2006.10.31 01:04:44
*.173.42.18

아멘!
사단에게 속아넘어가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겠습니다.
샬롬!

정순태

2006.10.31 01:25:33
*.95.73.2

지금까지 받아왔던 잘못된 신앙(하나님! 저 이만하면 됐죠?=대부분의 목사님들이 평신도들에게 요구하는 신앙)으로는 소망이 없습니다.

목사든 평신도든, 어느 누구든,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자격조차 없음을 인식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자신의 죄를 아파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가장 가까이 근접해 있다는 반증입니다.

목사님의 권면대로, 단순히 주님을 받아들이는 삶을 지향해야 하겠지요......

우리 신앙은 콩나물이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물은 다 흘러버렸지만 뿌리에 조금 남아있는 수분 때문에 콩나물이 자라듯이,
우리 영혼을 스쳐간 목사님의 설명(진리의 수분) 때문에 우리 믿음은 보이지 않을만큼 자랍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훌쩍 자라난 신앙모습을 기대하며 늘 승리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샬롬!

김문수

2006.10.31 03:59:20
*.91.49.201

아멘!!!!!!!!!!

김광찬

2006.10.31 22:45:07
*.8.157.7

아멘 †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은혜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태광

2011.03.21 15:18:32
*.32.182.220

역시 사단은 무서운 존재군요...

사라의 웃음

2012.11.29 23:28:33
*.109.85.156

기도와 말씀 보는 것, 착한일을 하는 것, 선하여지는 것 보다 더더욱 중요한 일이 사단의 거짓에 넘어가지 않는 것임을 또 배우고 배웁니다.
감정에 휘둘려서 자꾸만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그러므로 또 낙담에 이르게되기 일수입니다. 신자의 정체성을 이성으로 의지로 차분히 생각하며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사단의 집요하게 쳐놓은 덫을 살피며 기도와 말씀도 사단과의 영적전투임을 각인하며 그 거짓에 넘어가지 않게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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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예수 믿은 후에 짓는 죄와 구원의 관계 [8] 운영자 2015-01-28 30467
99 교회에 꼴 보기 싫은 사람이 많습니다. [10] 운영자 2007-02-02 3380
98 자꾸 죄의 유혹에 넘어가 절망하고 있습니다. [3] 운영자 2007-01-24 3335
97 하나님은 왜 민족과 국가를 나누었는가? [2] 운영자 2007-01-23 3746
96 잘 믿는데도 너무 힘들어 실망에 빠졌습니다. [3] 운영자 2006-12-22 2844
95 꿈에 대한 성경적 해석 [4] 운영자 2006-11-25 11093
94 천국과 지옥의 성경적 근거는? (完) [6] 운영자 2006-11-15 6872
93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는?(고린도전서의 몇가지 의문2&3) [6] 운영자 2006-11-07 11049
92 고린도전서의 몇 가지 의문(1) [3] 운영자 2006-11-07 2657
91 뜨거운 성령 체험이 없습니다. [3] 운영자 2006-11-04 4118
90 예수님이 결혼 좀 했으면 어때? [4] 운영자 2006-11-02 2512
» 믿은 후에도 자꾸 죄를 지어 너무 괴롭습니다. [6] 운영자 2006-10-31 3921
88 근친혼에 대한 성경적 관점은? [4] 운영자 2006-10-21 4608
87 예수님 초상화를 그려도 되는가? [3] 운영자 2006-10-21 3056
86 목회 세습이 성경적인가요? [5] 운영자 2006-10-14 3256
85 예수님은 창조 때와 지금 어디에 계시나요? [12] 운영자 2006-09-15 3148
84 에스라서 4장의 연대가 이상합니다. [2] 운영자 2006-09-12 10117
83 영접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5] 운영자 2006-09-04 17763
82 하나님은 죄악을 계획하셨는가? [3] 운영자 2006-09-02 2522
81 성경을 그대로 완전히 믿어야 하나요? [4] 운영자 2006-08-26 2978
80 주일날 도저히 은혜가 안 되는데요? [4] 운영자 2006-08-25 2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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