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성령 체험이 없습니다.

조회 수 4127 추천 수 91 2006.11.04 16:45:03
[질문]

예수님을 믿다 안 믿다 한지가,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교회를 나가다 말다가 한지가 벌써 30년 쯤 지났습니다. 실제로 교회에 나갔던 기간을 합쳐보면 한 일 년이 채 안될 것이구요, 어쨌든 예수님을 안 것은 30년이 되었다는 의미가 되지요. 교회를 꾸준히 나가기 시작한 것은 1년 쯤 되었고 실제로 주님을 영접한 것은 6개월이 채 안되었습니다.

교회에서 만난 성도님들 중 뜨거운 성령을 체험했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는,

(1)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고 직접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분
(2) 자식이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는 수술을 받는 시각에 무조건 기도 중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났고 기도를 마치고 나니 수술이 성공해서 진짜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분
(3) 무슨 일이 생기려면 기도 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미리 알려 주신다는 분
(4) 기도 시간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방언이 나온다는 분

심지어 어느 성도님은 기도 중에 저희 가족이 교만하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서 저희에게 얘기해 주신 분 까지 계십니다(이런 경우에는 사실 섬찟했습니다.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찌도 좀 고민이 됐구요).

그런데 문제는 저에게는 이런 경험이 아직까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영접한 이유는, 이 세상이 저절로 생겨났고 원숭이가 변해 사람이 됐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는 정말 계실 것이다" 라고 생각하던 차에 성경에 이 모든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고 해서 성경을 믿게 된 것입니다.

즉, 어떤 계기가 없이 그냥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그리고 아직 다른 분들처럼 그런 경험을 못하다 보니 뭔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고 나머지 인생은 덤이니 주님의 뜻대로 살자."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진짜 구원을 받았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한다면 믿지 않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도 가까운 사람부터 멱살이라도 잡고 너 예수님 안 믿으면 지옥 가니 당장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협박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기도?때도 감사함과 기쁨으로 눈물이 저절로 쏟아져야 할 것 같은데 실제는 그렇질 못합니다.

저처럼 미지근한 것은 믿음이 너무나 연약해서 그런 것이고 믿음이 자라면서 뜨거워지게 되는 것일까요? 성경에서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에 반드시 불같은 성령을 체험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지요?

[답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무 염려 안하셔도 됩니다. 저도 나름대로 성령의 거듭난 체험을 했고 또 기적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본적이 많습니다만 아직 방언을 비롯해 뜨거운 성령 체험은 하지 못했습니다. 또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 나는 것도 아니요 사람을 볼 때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외치고 있지 않습니다. 교만하게도 제가 믿음의 표본이니까 저를 닮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듭나서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와 성령 체험이 반드시 예를 든 네 가지 경우 같이 극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화끈한 성령 체험이 없어 자신이 볼 때도 미지근한 상태라 과연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이유는 성령과 구원의 관계에 대해 분명한 정리가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구원의 내용과 과정, 성령 체험의 의미, 성령 세례와 충만, 성령의 외적 은사, 바른 신앙생활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 구원의 과정과 내용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1,12) 자연인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제 스스로는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우리 영에 간섭하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구원 전과 후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5를 합침)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으로 거듭남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고 설명한 대로 눈과 귀로 감지할 수 있는 화끈한 체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거듭남은 하나님과 신자 본인만이 알지만 그 당장은 자신이 분명하게 감지를  못할 수 있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외부에서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에 초자연적으로 간섭한 것만은 확실합니다. 영은 지정의와는 다르며 오히려 지정의의 이면에서 지정의를 통솔하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식하는 것은 자신의 지정의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지므로 대개의 경우는 성령의 간섭하심이 언제 어떤 모양으로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일이 거의 드뭅니다.

그렇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결과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게”(고전12:3)됩니다. 쉽게 말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반드시 예수를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를 주(主 Lord)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대로 살기로 한 것입니다. 이 또한 단순히 이전보다 죄 안 짓고 선하게 살려는 결심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정도는 세상 모든 종교 아니 도덕에서도 가르칩니다. 문자 그대로 자기의 주인, 즉 생사여탈권까지 쥐고 있는 왕으로 예수를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라고 하면 죽는 자리까지 가는 것이 주라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 죄를 다 씻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단순히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했다는 교리에 수긍 동의하는 정도가 되어선 안 됩니다. 나야말로 죽어 마땅한 천하 죄인 중의 괴수인데 그분이 내 대신 죽어서 내가 살아난 것입니다. 이전에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을 좇으며 따라 살았던 삶에서 완전히 전환(U-turn)하여 주님의 전적 보호와 인도에 따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기로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고상하고 착해져서가 아니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난 과정은 정확하게 모르지만 그 결과는 분명해야 합니다. 우선 자신의 전적인 영적 부패상을 철저하게 깨달았지만 그것을 구원할 방도가 세상과 자기에게는 단 하나도 없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 자신의 영이 성령의 간섭으로 변화되어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직 그분만을 자신의 주로 모셔 들이고 이전의 자기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간단하게 죄인의 회개, 인생관의 반전, 주님과 동행이라는 세 가지 과정을 거치면 성령의 간섭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며 완전한 중생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단 번에 이뤄지는 사람과 시간적 간격을 두고 점진적으로 이뤄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길게는 몇 년 아니 몇 십 년이 걸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점진적으로 바뀌는 경우에는 항상 뭔가 미지근한 것 같고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도 되는가 하는 의심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분이 죄인의 자각과 회개만 해도 사실은 구원 받고 천국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에는 삼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영원한 형벌에서 면제되는 칭의(稱義 Salvation), 죄의 권세와 싸워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인 성화(聖化 Sanctification), 나중에 영원한 천국에서 영육 간에 완전한 구원을 이루는 영화(榮化 Glorification)입니다.

그러나 일단 자기가 죄인임을 철저하게 자각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만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칭의가 이루어져 지옥 가는 형벌에서 면제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구원입니다. 예컨대 죽기 직전의 사람에게는 십자가 복음만 전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인생관이 완전히 반전되기도 힘들지만 또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점진적 구원(중생의 완성)이라고 하는 의미는 사실상 성화의 완성은 안 되었더라도 성화의 삶을 살기 시작하게 되는 단계까지를 의미합니다. 죽기 직전의 사람이 아닌 다음에는 칭의가 확실하게 이뤄진 표시는 반드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반드시 인생관의 반전과 하나님과의 동행이 따라야 하는데 그런 단계에까지 나아가는 데에는 사람에 따라 시간이 다 다르게 걸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이 뜨겁고도 성숙된 믿음을 소지한지 여부는 얼마나 뜨거운 성령 체험을 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가치관이 완전히 하나님 중심으로 뒤바뀌어서 실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자기의 존재와 삶과 일생을 통해 드러나도록 하겠다는 헌신과 그 실천의 세기에 달린 것입니다.

성령 체험의 의미

그리고 성령 체험도 사람마다, 동일인에게도 그 상황마다 의미가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극적이고도 뜨거운 감격을 느끼는 종교적 신령한 체험이라고 해서 다 성령 체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성령 체험의 경우는 크게 네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마침 예로 들어주신 네 가지 경우를 이런 관점에서 분석해보겠습니다.
      
(1)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고 직접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분

이 경우는 몇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선 기독교식 기도는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절대자 하나님을 찾고 묵상했더니 그런 체험을 해서 믿게 되었을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이 살아서 역사하고 계심을 보여주고 들려 준 것으로 성령 체험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인 구원으로 초대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그 결과 단순히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 보다 이제 믿어보아야지 정도로 그치면 성령이 일회적으로 간섭한 것이지 완전히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신자의 자발적인 회개, 반전, 동행의 세 과정을 아직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너무나 생생하고 풍성해서 중생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단 번에 그 세 과정을 거쳐 예수를 주로 모시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성령 체험의 두 번째이자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바로 한 죄인의 영혼을 중생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로 거듭난 신자가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그런 체험을 합니다. 절실하게 응답을 듣기를 원하면 하나님이 때로 직접 음성으로 들려주시고 환상으로 보여주십니다. 주로 하나님 입장에서 아주 긴급하고 중요한 문제라 확실하게 계시했거나 아니면 신자가 너무 절실하고 급한 마음에 오히려 당신의 뜻을 계속 혼동하고 있을 때 일어납니다. 이 경우는 성령체험의 세 번째 의미로 성도를 보호 인도하는 것입니다.    

(2) 자식이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는 수술을 받는 시각에 무조건 기도 중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났고 기도를 마치고 나니 수술이 성공해서 진짜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분

오늘날에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적 중의 하나입니다. 그 의미는 구원키로 예정된 당신의 자녀를 구원으로 초대하고자 하나님이 직접 간섭하신 것입니다. 대개는 예수님이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이런 큰 은혜를 주는가보다 절실하게 깨닫게 되어 그 인생이 뒤집어지고 주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이전에 그 사람이 너무나 완악하고 교만해서 이런 비상수단을 통하지 않고는 마음을 열지 않을 것 같아 강권적으로 하나님이 역사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통해 최소한 예수님을 믿으려 신앙생활을 시작하지만 완전한 중생은 훨씬 뒤에 이뤄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3) 무슨 일이 생기려면 기도 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미리 알려 주신다는 분

매번 구체적으로 그러거나 그것도 하나님(형상?)이 나타나셔서 그렇게 한다면 아주 조심스럽게 해석되어져야 하고 성령이 아닐 가능성도 있습니다. 신자가 무슨 일이든 사전에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그대로 시행하면 신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로 내면의 미세한 음성이나, 성경 말씀이나, 주위 환경을 통해 당신의 뜻을 드러내지 당신의 형상 자체를 어떤 이미지로 보여주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비교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직접 우리더러 당신을 대신할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주 특수한 경우(예: 출애굽기의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나신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일)를 제외하고는 스스로 어떤 형상으로 나타날 리는 없습니다.

악령도 때로는 신자가 성령 체험이라고 오해할 수 있는 초자연적 체험을 겪게 합니다. 특별히 장래 일을 미리 알아맞히는 것 같은 일은 대단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성령에도 예언의 은사가 있지만 그 예언의 근본적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지 점쟁이 식으로 장래 일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는 장래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경우가 포함될 수 있지만 장래 일을 알아맞힌다고 다 예언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간섭과 악령의 차이는 단순히 그 현상만 보아선 모릅니다. 체험의 과정과 맺히는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갈 5:16-26) 성령의 경우는 반드시 그 본인이 거룩하게 변하며 동료 성도와 교회를 사랑과 희생으로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반면에 악령은 단지 능력만 드러내어 신자를 두렵게 만들거나 신자 개인의 현실적 인간적 유익만을 줍니다. 사단은 이간질의 능수라 어떻게 하든 신자로 하나님과 성도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물론 기도를 열심히 하는 분 중에는 큰 일이 있을 때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하나님의 경고 사인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경우는 성도를 인도 보호하는 것 뿐 아니라   네 번째 의미인 성도 개인과 동료 성도 및 교회를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바로 세우기 위해 주시는 외적 은사(고전12:4-11)일 수 있습니다. 외적(外的)이란 성경에 없는 표현이지만 그 성령의 간섭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는 것과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은혜가 아니라 다른 성도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4) 기도 시간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방언이 나온다는 분

이분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중생의 단계는 이미 넘어섰습니다. 이제는 자기가 받은 성령의 외적 은사를 자신의 성숙과 성도들의 위로와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에 잘 분별해서 사용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이처럼 성령 체험의 의미는 크게 네 가지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1)구원으로 초대하기 위한 간섭(Touch or Invite), 2)성령의 거듭나게 하심(Born Again), 3)성도의 보호와 인도(Perseverance 堅忍) 4)외적 은사(Charisma)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는 한 개인에게 동시에도 일어나지만 대개는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일어납니다. 또 본인이 4)를 제외하고는 분명하게 감지 못할 경우가 더 많습니다. 외적 은사는 교회 안에서(조직체 교회의 공식적 직분과는 상관없이) 직접적인 사역을 하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본인이 분명하게 알 수 있고 또 스스로 그 은사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네 가지의 구분이 없이 일반적으로 극적이고도 생생한 체험, 즉 눈에 보이는 역사가 있거나 감정적으로 최고조의 흥분이 따르면 무조건 성령 체험이라고 합니다. 또 성령 체험만 있으면 구원을 받아 완전한 신자가 된 양 착각합니다.  

앞의 2)의 예와 같은 경우에는 간혹 그런 체험을 한 후 얼마간은 교회를 출석하다가는 언제 그랬는가 싶게 완전히 세상으로 되돌아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성령의 초대였고 여전히 구원까지는 거리가 멉니다. 어쨌든 문자적으로는 성령체험을 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작 현재 예수를 온전히 믿고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 사람까지 단지 그런 화끈한 체험이 없다고 자신의 신앙 상태나 구원 여부마저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간암 말기로 병원에서 사형 선고 받는 바람에 최후의 방도로 기도원에 가서 성령체험으로 낫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고 멀쩡한 신자가 그런 화끈한 체험이 부러워 일부러 간암에 걸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초대로서의 화끈한 성령 체험은 도저히 그 수단이 아니면 구원할 길이 없을 정도로 그 심령이 완악하기에 동원된 하나님의 비상수단입니다.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

그래서 성령 체험은 또 다른 측면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성령체험의 의미는 성령이 신자에게 간섭하시는 목적을 말한 것이라면 이는 성령과 신자가 존재론적으로 어떻게 연관되어지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즉 성령이 신자의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간섭하시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크게 세 경우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성령 세례(洗禮)를 들 수 있습니다. 죄인의 상태에 있는 자연인에게 성령이 처음으로 외부에서부터 초자연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에 사람에 따라 구원으로의 초대에 그칠 수 있고 단 번에 완전한 중생까지 이뤄질 수 있습니다.

둘째는 성령의 내주(內住)입니다. 일단 하나님이 구원키로 예정하고 택하셔서 성령 세례를 베푼 신자에게 성령이 영원토록 와 계시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를 보호하고 인도하여서 거룩함 신의 성품에 참예 시키며 나아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성령 세례를 받았으면 당연히 성령은 내주합니다. 그래서 순간적 혹은 점진적인 중생을 이룰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성령 체험을 하고도 전혀 예수를 믿지 않거나 교회에 나와도 평생을 두고 변화 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는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구분은 아주 모호하고 누구라도 결코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선 성령이 문자 그대로 구원으로 초대(Invite)한 것이 아니라 접촉(Touch)만 했을 수 있습니다. 이적 같은 체험을 하고도 끝까지 예수를 부인하는 경우입니다. 구약에는 성령의 역사가 일시적으로 단회적으로 있어서 그랬지만 사울이 여호와의 신에 감동이 된 경우가 대표적입니다.(삼상10:10,11)

이 경우 구원의 예정이 안 된 자에게도 성령 체험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신학적으로 복잡한 논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예정이 되어있는 자에게 성령의 간섭이 있었다면 그 사람이 죽기 전에는 반드시 언젠가는 중생이 일어납니다. 즉 성령의 세례를 받아 성령이 내주한 상태이긴 하지만 본인의 점진적 구원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로 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문제는 계속해서 한 사람의 평생을 두고 지켜볼 수 없기 때문에 전혀 변화가 없는 듯이 여겨지기에 성령 체험을 하고도 예수를 안 믿는다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령의 간섭을 성령의 체험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최초로 베푸시는 초자연적 간섭이라면, 내주는 이제 그 예정과 선택 안에 든 죄인에게 완전한 중생과 성화를 이뤄가기 위해 하나님이 신자 속에 좌정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세례가 내주보다는 분명히 먼저 있게 되지만 인간의 시간적 관념으로는 사실상 도저히 구분이 안 됩니다.

그래서 그 순서를 더 세밀하게 설명하기 위해 임재라는 용어를 보태기도 합니다. 시간적 순서에 따라 하늘에서 성령이 한 죄인에게 세례(洗禮)를 베풀면 성령이 그 신자에게 들어오게 되고 즉 임재(臨在)하게 되고 그 후 영원토록 내주(內住)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구원이 예정된 자에게는 이 셋은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단지 신자에게 미치는 의미를 구분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성령의 임재를 예배 시에 그 성전 안에 성령님이 와 계시는 것을 말하기도 하는데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그 가운데에 성령님이 와 계신다는 일반적 의미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성령 충만(充滿)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에게 성령이 내주하고 계시지만 성령 쪽에서 먼저 적극적 혹은 강권적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반드시 자발적으로 기꺼이 마음을 열고 그분의 인도를 받기를 소원해야 합니다.(바로 이런 점에서도 성령과 악령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에 따라 또 동일한 사람이라도 그 영적인 상태에 따라 성령의 역사가 달라집니다. 신자가 정말 자신을 완전히 죽이고 오직 주님의 영광만 바라보면 성령의 역사는 강하게 일어납니다. 바로 그런 상태를 두고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영에 하나님의 영으로만 가득 찼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감정의 충만이나 능력의 충만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즉 눈물 콧물 흘리면서 모든 염려를 잊은 채 일종의 무아지경 상태에서 신령한 기분에 젖어들거나, 병이 낫고 환상을 보고 음성을 듣는다고 다 성령의 충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령 충만이 그런 현상을 동반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다 성령 충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분위기에 젖어 감정이 극단적으로 치솟았을 수 있으며 악령이 신자를 통해 일시적으로 능력을 나타내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반드시 신자의 품성이 거룩하게 변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겠다는 소망과 열정의 형태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타나는 모양은 감정 충만과 능력 외에도 여러 다른 형태가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외적 은사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여 주로 따르며 사는 신자는 성화의 진척 여부에 관계없이 이미 성령 세례를 받았고 성령이 내주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시적으로 죄에 빠져 있어도 그러한데 다만 성령이 눌려 있는 상태 즉 충만이 안 되어 있는 상태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당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성령의 외적 은사

바울 사도는 성령의 신령한 사역의 가장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12:3) 예수님은 그 전에 이미 제자들에게 그런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내가 보혜사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 함이요.”(요16:7-9) 성령 세례를 통해 당신을 믿게 한 후에 성도 안에 진리의 영으로 내주하셔서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주한 성령이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고전12:7) 즉 외적 은사(恩賜)를 주셔서 성도와 교회를 유익하게 합니다. 그 은사에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을 말함, 방언을 통역함의 9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役事)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습니다.”(고전12:4-6) 같은 것이 셋 있고 마찬가지로 다른 것도 셋 있다고 합니다. 성령과 주와 하나님 즉 3위 일체의 하나님은 같습니다. 다른 것은 은사의 내용과 그 은사를 받은 자가 맡은 직분과 그 일이 만들어내는 열매만 다를 뿐입니다.

은사의 주심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기”(고전12:11) 때문에 성도마다 받은 은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 사람이 하나 이상의 은사를 받을 수도 있고 또 하나만 받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이 이 아홉 가지 은사를 어떤 특별하고도 신령한 능력으로만 간주하여 나는 아무 것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정말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하고 헌신하는 자에게는 이중에 자신에게 해당되는 은사가 이미 와 있습니다. 그동안 미처 발견을 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설령 특정한 외적 은사가 없다 하더라도 인간적 호기심이나 그 은사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자랑하거나 어떤 능력을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섬기겠다는 진정한 마음이 있어서 간절히 소원하고 기도하면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은사를 주십니다. 나아가 이 9가지에 해당되지 않더라도 성도 각자는 하나님께 받은 이미 받은 재능(talent)을 발휘해서라도 성도와 교회를 위해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 재능 또한 이미 하나님께 받은 것이라 은사입니다.

한 기도하시는 분이 질문자님의 가족이 교만하다는 말씀을 기도 중에 들었다고 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성령의 내적인 미세한 음성으로 들려주십니다. 이처럼 특별히 다른 사람의 심령 상태에 관해 말씀을 받는 자는 상기의 9가지 외적 은사 중에서 영들 분별함의 은사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 중에 그런 말씀을 받았으면 “당사자에게 직접 전해줄까요?, 제가 그분이 바뀌도록 기도만 할까요?, 하나님이 그들을 깨우치게 해 주실 수는 없는지요?” 등 그 받은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지에 관해서도 간절하게 기도하여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대개의 경우 그렇지 않고 바로 직설적으로 대놓고 이야기 하는 바람에 오히려 상처를 주며 성도 간에 덕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런 은사를 받은 자들은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고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은근히 자기 은사를 자랑하는 경향까지 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은사자들은 오직 상대와 교회의 유익을 위해 그 은사를 적용해야 합니다. 한 불쌍한 영혼의 구원과 거룩한 변화를 위해서 또 그럼으로써 전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목적과 관점에서만 은사가 사용되어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외적 은사를 열거한 이후 곧 바로 지체는 몸을 세우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보충 설명(고전12:12-30)이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9가지 은사보다 더 큰 은사가 있는데 바로 사랑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2:31,12:1-3,13)    

방언, 예언, 믿음, 구제의 은사를 발휘해도 심지어 신자가 남을 위해서 죽어도 진정으로 남의 유익을 위하고 살리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은사자들이 그 은사 때문에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삼가라는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한 후에 공정한 분별력을 갖고 오직 상대를 살리는 방향으로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또 바울이 구제도 은사에 포함했으므로 상기의 9가지만 은사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신자가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할 것은 외적 은사보다 오히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한 것입니다. 신자라면 반드시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순종하는 믿음,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며 궁극적으로 자신이 영원한 천국에 이를 것을 바라는 소망, 그리고 하나님과 교회와 불쌍한 이웃을 진정으로 위하는 사랑, 세 가지를 가져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맥락에서 사랑이 바탕이 안 된 믿음과 소망은 아무 유익이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가 특별히 9 가지 은사를 별도로 설명한 이유는 주로 전문 사역자를 비롯해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자들은 반드시 이 중의 한 가지 은사를 갖고 있어야 하고 또 실제로 그런 자들에게 직분을 맡겨야 합니다. 평신도에게는 그런 은사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외적 은사를 받은 자를 비롯해 모든 성도는 교회의 공식적 직분과 상관없이 어떤 형태로든 사역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려고 입만 열면 방언이 나온다는 분은 하나님의 언어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주신 것이 방언이기에 사실상 그 은사를 성실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당이 악령에 사로잡히면 예언을 하다가도 악령이 떠나면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것과는 성령의 역사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자발적 동의 없이는 어떤 역사도 이루지 않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분은 자신이 의도적으로 방언을 할 수도, 중지 할 수도 있는데 방언으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 외적 은사는 성령 충만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런 은사를 받은 성도가 항상 그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본인이 자신을 비우고 완전히 하나님에게만 의지할 때에 그런 은사가 활발하게 나타납니다. 말하자면 성령 충만이 되어야 은사도 충만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9가지 은사가 없는 자는 성령 충만의 상태가 되지 못한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한 대로 모든 신자에게 믿음, 소망, 사랑이 있는데 성령 충만이 되면 그것도 충만해지고 또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충만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또 다른 은사와 재능도 성령 충만의 상태에서 교회와 성도의 유익을 위해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그렇게 하면 바로 그것이 성령 체험입니다.  

올바른 신앙생활

결론적으로 신자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선 특별한 외적 은사나 신기하고도 뜨거운 체험을 구하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자신에게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차서 믿음과 소망을 더욱 굳건하게 세우는 일입니다. 자신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소유하고 있는 은사와 재능을 발견하고 사용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건대 예수를 자신의 주로 모시고 진정 그분의 뜻대로 살면서 자신의 하는 일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하겠다는 소원이 있으면 뜨거운 체험 여부나 특별한 외적 은사와 상관없이 이미 성령 세례를 받았고 성령이 내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끈한 체험이 없기에 성령과 아무 관계가 없는가 보다 생각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미 성령 세례를 체험했고 또 그분이 영원토록 내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신앙이 찬지 더운지 미지근한지를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기준으로 구분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살펴 본대로 성령 체험에는 여러 단계와 종류가 있으며 그 각기 의미와 목적이 다르며 성도마다 심지어 한 성도에게도 그때그때 그 의미와 열매가 같은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흔히 방언이나 신유 같이 외적 은사를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화끈한 체험은 사실은 구원으로의 초대인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하심을 그 당사자로 확실히 눈으로 보게 해서 구원으로 이끌거나 기존의 믿음을 더 굳건하게 변화시키는 것이 주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믿음 안에 들어온 신자는 화끈한 체험보다 성령 충만을 구하고 반드시 9가지 외적 은사가 없더라도 자신이 가진 다른 재능과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한 대로 아무런 호기심, 욕심, 교만 등이 전혀 개입되지 않고 순수하게 정말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들어가서 자신의 믿음을 더 확증 짓고 싶다면 그래서 자기도 그런 외적 은사를 받고 싶다면 진지하게 기도하시면 하나님이 언젠가는 화끈한 체험이든 은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진정으로 성령의 은혜에 잠기고 싶어서 그런 체험을 달라고, 최소한 믿음을 확증할 징조라도 달라고 진지하게 소원하며 기도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그런 기도를 해도 여전히 오직 성령이 당신의 뜻대로 각 신자에게 가장 적합하게 나눠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역으로 말해 평생을 두고 그런 화끈한 체험이 없을 수도 있고 또 그래도 믿음을 실천하고 영생을 얻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뜻입니다.  

재삼 강조하건대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것은 극적으로 단번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무덤덤하고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가랑비 옷 젖는 줄 모르듯이, 혹은 폭우를 맞게 해서 성령의 단비에 젖게 할지는 오직 각자의 믿음과 품성과 형편에 따라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이 뜨거운가의 여부는 오직 신자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분의 뜻을 세상에 실현하겠다는 소원과 헌신과 실제 실천 여부로만 따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질문자님의 존재와 삶과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십니까? 또 그분의 뜻대로 살기를 소원하고 실천하고 있습니까? 내 자신의 평안과 유익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공동체(조직적 가시적 교회가 아닌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가정, 직장, 사회 등)가 세워지는 일에 쓰임 받고 있습니까? 그러면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실제로 뜨거운 성령 체험을 날마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실현 되는 것 이상의 뜨거운 성령 체험은 따로 없습니다. 한 가지 예화로 답변을 마치겠습니다.

평생을 교회에서 평범하게 신앙생활을 한 나이든 할머님 신자가 하루는 목사를 찾아 왔습니다. 자기는 평생에 한 번도 뜨거운 성령 체험을 한 적이 없고 특별한 은사를 받은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자기가 제대로 믿고 있는 것인지 자기의 은사가 무엇이며 하나님은  나를 통해 어떤 일을 이루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천국 갈 날이 가까워 오는데 이렇게 미지근한 믿음을 가지고는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할머님에게 되물었습니다. “할머님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보다 가장 자신 있게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곰곰이 생각하던 할머니는 “그거야 맛있는 각종 숲(soup)을 끓이는 것이지!”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는 “그럼 오늘부터라도 숲을 한 솥씩 끓여서 주위에 병약한 자나 가난한 자를 찾아가 나눠주십시오. 바로 그것이 은사이자 성령 체험입니다.”라고 권했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지는 질문자님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11/4/2006

정순태

2006.11.05 07:29:09
*.75.152.117

먼저 "아멘!!!"부터 고백드립니다.
그러나 가장 은혜스러운 것은 목사님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그럼 오늘부터라도 숲을 한 솥씩 끓여서 주위에 병약한 자나 가난한 자를 찾아가 나눠주십시오. 바로 그것이 은사이자 성령 체험입니다!"
항상 주장하던 제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체험에 대해서는 목사님의 자세한 설명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다만, 개인체험의 한계는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은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치유, 환상, 환청 등등의 유별난 체험이 전부 하나님과 연관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즉, 밖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현상(흔히들 성령체험이라고 주장하는 현상들 포함)은 하나님과의 연계성을 보증하지 못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치유 간증과 동일한 것들을, 불교도나 무속신앙자들에게서 듣는 것은 비일비재합니다.
요즘 천국체험기로써 재미보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우리는 주위에서 사후세계를 다녀 왔다는 비기독교인들의 주장을 듣기도 합니다.

천주교의 파티마 예언이야 너무나 유명한 것입니다만, 요즘에도 성모 마리아의 현현 체험이 심심치 않을 정도로 회자되기도 합니다.

제 주위에서도 암이나 교통 사고 등으로 갑작스레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그분들의 신앙이나 간구했던 기도의 간절함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기대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고쳐주셔야 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도 우리의 생각보다 너무 빠른 그분들의 죽음이,
죄악에 대한 대가라던가, 하나님의 무신경하심이라던가, 기도응답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치유받지 못하고 죽은 성도들이나 교통사고로 사망한 성도들이
고침받은 성도들이나 교통사고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성도들보다 저급한 성도라고 보지 않습니다.
모두가 동일하게 주님 은혜 안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특이한 개인체험이 하나님의 소속에 대한 유일한 확증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특이한 성령체험은 한번 감사함으로써 그 모든 가치가 소멸되는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설탕물에 지나지 않는다 할 것입니다.
그 성경적 의미를 목사님께서 설명해 주셨고요.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목사님의 결론인 것입니다.
바로 "일상의 귀중함"입니다!!!
우린 설탕물 같은 특이체험에 현혹되기 쉬우나, 실제는 맹물 같은 일상이 더 귀하고 중요합니다!!!

이런 참 진리를 조목조목 깨우쳐 주시는 목사님이 계시기에 이 홈이 즐거운 것입니다.

감사~~~~~ 샬롬!

허경조

2006.11.05 13:02:53
*.80.180.3

아멘 아멘
저역시 목사님과 정순태님의 댓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성장과 교인수 늘리기기에 치중하는 현대의 대부분의 교회에서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종종 이방법을 써먹고 안타깝게도 거기에 현혹되어 방언과 신유의 고수(?)급 신자쟈 아니냐로 차별을 하고,
더욱 교회에 열심히 모여 종교행사에 참여도로 믿음의 척도를 재려는 저급한 대다수의 교회와 현실을 볼때
답답하기 그지 없읍니다.

방언과 깊은 기도를 하신다는 어떤 권사님이 자신이 운영하는 세탁소에 필요한 교인에게 자신의 업소에 일하러 오는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강권하셔서 할수없이 일하러 다니다가 그 권사님의 실제적인 인격의 면면에
신앙 이전에 인격적인 실망에 그 업소를 그만 두고 만 어떤 아는분의 이야기를 최근에 들었읍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욕심을 하나님과 성령의 이름으로 가장하며 순진한 초신자나 마음이 여린 분들에게 접근하여 그분들에게 상처주는 일들이 특히 뉴욕의 대형교회에 비일 비재합니다.

저역시 항상 생각하며 주위 분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정순태님 말씀과 같은 "일상생활에서의 생활태도"입니다.
교회 밖의 하루하루의 삶에서 얼만큼 따뜻한 마음으로 내주위의 사람들에게 ,특히 소자에게 물한그릇을 주는가가 내안에 내재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나타남이 아닙니까?

김형주

2006.11.06 16:09:45
*.173.42.18

아멘!
목사님, 감사합니다. 궁금증을 말끔히 해소시켰습니다.
너무나 외적인 현상에 민감했던 자신이 미련함을 깨달았습니다.
하루 하루의 생활 속에서 성령을 체험하는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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