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제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갑자기 예수님의 정체가 궁금해졌습니다. 저는 우선,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고, 그로 인해 내게 구원이 임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 또한 믿습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것 이상의 것이 궁금하지 않았었는데 어느 주일날 다니고 있는 미국교회에서 예수님에 관한 시리즈로 설교 중에 나온, "Jesus is the first born"이라는 문장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제 궁금증이 시작 되었습니다. 담임 목사님의 설명은 first born의 의미를 priority로 설명 하셨는데, 저는 first born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차이가, 그리고 예수님과 나와의 차이가 뭔지, 나름대로 도식화해보았습니다.
하나님 = 하나님의 영 100%
예수님 = 하나님의 영 100% + 육체(하나님의 영이 육신으로 태어난 first born한 아들)
나 = 하나님의 영 0.001%(겨자씨 만 한 믿음) + 육체 100%(예수님의 구원의 은혜 때문에 겨자씨 만 한 믿음으로도 하나님의 영의 세계에 born again 했음)
문제는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지각하고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인성과 신성이 만나는 어느 순간이 있었을 것인데,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세례요한에게서 세례 받은 후 일어난 40일 광야 시험의 순간일까? (이것은 결국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는 생각이 아닐까?) 에서부터 비롯해.
예수님이 정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결혼을 했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화장실에 가서 대 소변을 다른 사람들처럼 보았다고 하더라도, 제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왜냐면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으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인지요? 예수가 결혼 좀 했으면 어때? 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단적인 생각인지요?
[답변]
질문하신 내용은 신자라면 누구나 가지는 의문이지만 정확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정말로 신앙에 혼동이 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바로 인식하게 되는 데서 출발하는데 출발이 잘못되면 그 다음에는 다 비뚤어지지 않겠습니까?
질문자께서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고, 그로 인해 내게 구원이 임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 또한 믿습니다.” 이것은 본인의 믿음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그 내용은 바로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 즉 하나님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만약 이 부분에 아직도 흔들림이 없다면 큰 문제가 없고 이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묵상하신 내용 중에는 구원과 믿음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고도 민감한 부분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칫 바로 잡지 않으면 이단으로 흐를 소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언급하신 내용에 관해 순서대로 보충 설명을 드린 후에 질문하신 요점인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조화에 관해 답변 드리겠습니다.
First born Son?
유감스럽게도 미국 목사님이 이 용어를 설교의 전체적 흐름에서 정확하게 어떤 의미로 사용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질문자님이 그 목사님이 Priority 의 관점에서 말씀했다고 하지만, 우선권이란 항상 다른 비교의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 비교의 대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선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에서 말하는 관점에서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삼위 중의 한 분 하나님이 아닌 정말로 하나님이 낳으신 아들이라는 의미라면 잘못입니다.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영에서 유출(流出)되었거나 피조 된 하나님이라는 의미라면 완전히 이단입니다. 또 예수님이 피조 된 하나님이라면 벌써 그 자체로 절대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은 태초부터 함께 자존하셨고 합동으로 창조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어느 분이든 먼저 있었고 다른 분은 먼저 있었던 분보다 뒤에 존재하게 되었다면 틀린 것입니다. "First Born"이란 표현이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과 함께 영원 전부터 선재(先在)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약화시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잘못입니다.
추측컨대 미국 목사님은 틀림없이 구세주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설명하는 의미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완전한 인간이시기도 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기에 하나님이 베푸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장자는 항상 가문 전체를 대표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에 믿음으로 동참하는 다른 모든 성도를 대표하는 장자(長子)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를 십자가 복음의 정수를 설명하고 있는 성경 중의 성경인 로마서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 중요 구절을 대략적으로 인용해보겠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5:17)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6:3,5)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6:22,23) 그러나 아직도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8:22,23)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29,30) .
따라서 “First born Son”을 육신적 출생의 의미로 해석해선 안 됩니다. 구세주로서 역사에 직접 개입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려면 어차피 여자의 몸에서 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신에 로마서의 기술처럼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표현하는 상징적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죄로 인해 타락하게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한 사람의 의에 힘입도록 했다는 의미에서 “First born Son"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구속될 새 인류의 장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세주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두 구절이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1-5)
한 마디로 죄인의 구속을 위해 인간으로 오셨다가 그 구속을 완성하시고 다시 하늘 보좌로 올라 가신이가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따질 때에 그분의 영원성과 선재성이 조금이라도 부인되어선 바로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이 문제에 관해선 ‘성경문답’ 사이트의 # 89 “예수님은 창조 때와 지금 어디에 계시나요?”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나
하나님 = 하나님의 영 100%
예수님 = 하나님의 영 100% + 육체(하나님의 영이 육신으로 태어난 first born한 아들)
나 = 하나님의 영 0.001%(겨자씨 만 한 믿음) + 육체 100%(예수님의 구원의 은혜 때문에 겨자씨 만 한 믿음으로도 하나님의 영의 세계에 born again 했음).
동일한 맥락에서 예수님과 하나님과 자신을 비교하신 이 내용에도 추가적인 언급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경우에는 이 땅에서 사역하셨던 인간 예수의 정체성만 말씀하신 셈입니다. 질문자님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그 한정된 범위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뜻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대로 혹시라도 "first born"을 상징적 의미 대신에 그 표현 자체에 매이게 되면 인간 예수로 시선이 좁혀질 우려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따질 때는 반드시 그분의 선재성과 영원성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영이 0.001% 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정말 자신의 믿음을 겨자씨 만하다고 겸손하게 표현한 의미로는 하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정체성에 관해선 구원 받기 전과 후로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기 전의 인간의 상태를 완전히 타락한 것으로 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10-12,18) 인간은 태어나면서 본질 상 진노의 자녀로 그리스도 밖에서 약속의 언약에 대해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던 자입니다.(엡2:3,12) 한 마디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 있었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 받을 방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기 전의 상태는 하나님의 영이라고는 단 0.001%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믿어서 구원을 얻었기에 내 쪽에 구원 받을 만한 어떤 자격, 품성, 믿음 등이 조금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비유컨대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선물을 전혀 그럴 자격도 준비도 예측도 안 된 우리에게 포장까지 다해서 건네주었습니다. 신자가 한 일은 단순히 그 선물을 받은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선물을 받기는 받았다 해도 실제로 그 선물을 받는데 신자가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간혹 그 선물을 거절하지 않았으므로 신자의 믿음이 작용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원에로의 초대는 누구에게나 열어 놓았지만 구원을 거절할 만한 사람에게는 선물을 건네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십니다.(엡1:3,4)
바울은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갈1:15) 자기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당신께서 태중에서부터 택하고 미리 예정하여 구원을 주셨는데 신자가 선물을 받기는 받았다고 구원을 얻는데 자기가 한 일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어불성설이지 않습니까?
요컨대 구원 얻기 전 죄인의 속에는 하나님의 영이 단 0.001%도 없었습니다. 그 죄인이 구원의 선물을 받도록 하는 데는 성령이 전적으로 작용했으며 또 그 후 성령이 신자 속에 영원토록 내주(內住)하게 됩니다. 내 속에 하나님의 영이 0.001% 밖에 없다는 표현은 구원 받을 때는 해당되지 않고. 신자가 된 후 자신의 믿음의 상태를 말할 때에만 적용해야 합니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겸손한 의미로만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와 계시면 그 영은 100% 완전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저런 이유로 그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나아가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죄에 빠졌거나, 사단의 유혹에 넘어갔거나, 스스로 말씀과 기도에 게을러져 믿음이 적어졌거나 등 여럿입니다.
또 우리 속에 와 있는 성령은 완벽한 하나님의 영이지만 신자를 강제로 당신의 보호와 인도를 체험케 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선악과 사건으로 부패되고 왜곡되었던 자유의지를 이제는 하나님을 기꺼이 선택하는 방향으로 자발적으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영이 신자 속에 내주하고 있으므로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는 성령이 속에서 탄식하시기에 자연히 신자는 자신의 영이 궁핍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역으로 말해 신자 속에 내주하는 성령의 권능과 은혜는 무한하며 그것을 찾아서 누릴 수 있는 열쇠는 성도가 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쇠의 작동법이 특이합니다. 자신을 죽이면 죽일수록 성령의 권능은 크게 역사하고 자신을 살릴수록 그 반대가 됩니다. 기도와 말씀에 열심을 내어 신앙 실력을 키우는 것도 자칫 자기를 살리는 것이 되어 성령의 권능이 눌릴 수 있습니다. 오직 자기를 비워서 성령님께 내어 드릴 때에만 자기 믿음이 커지고 성령의 권능도 더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이미 구원 받은 모든 신자에게는 성령은 완전한 100%로 와 계십니다.
따라서 질문자님의 방식대로 ‘나’를 표현할 때는 이렇게 해야 정확합니다. 1)구원 받기 전 나=100% 육신(Flesh: 단순히 Body의 개념이 아니라 지정의를 갖고 있되 하나님의 영이 없는 상태), 2) 구원 후의 나=육신 + 100% 완전하신 하나님의 영 (단 그 육신이 갖는 믿음의 상태에 따라 겨자씨 혹은 성숙한 믿음이 됨).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신자가 구원 받았을 때가 아니라 기도할 때의 믿음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된 후에는 사람에 따라서, 또 동일한 한 사람에게도 시간과 여건에 따라 그 믿음이 0.001%에서 99.999%까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일생을 보냅니다. 천국에 가서야 온전한 100%의 믿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중간자(中間子)
그런데 예수님의 정체성을 인간 예수에 제한하면 자칫 이상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 100%+육체라는 표현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하나님과 나 중간에 위치하게 하면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다시 질문자님의 방식을 따라 예수님을 표현하자면 다음 두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1)육신으로 오신 예수님=100% 하나님의 영 + 100%의 인간, 2)선재하시고 영원하신 예수님=하나님의 영 100%.
이렇게 세밀하게 따지는 이유는 반신반인의 개념이야 말로 이단 중의 이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종교가 인간의 죄를 사하거나 고난에서 구원해줄 중간자(中間子)적 존재가 필요하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그러기 위해선 그 중간자는 반드시 인간보다는 더 뛰어난 존재여야 합니다. 그래서 슈퍼맨, 도사, 철인, 현자, 심지어 반신반인의 중간자(대표적으로 그리스 신화)까지 등장시킵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중간자라 해도 결국은 한 인간의 공로 때문에 구원 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다른 말로 인간이 스스로 자기 죄를 감당하겠다는 뿌리 깊은 교만이 그 생각의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당신이 직접 그 중보자가 될 것이라고는 어떤 종교도 아니 어떤 인간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 모든 종교들은 인간의 생각으로 고안해 낸 것에 불과한지라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죄를 감당해서 죽으신다는 생각은 인간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벌을 주는 분이지 하나님이 어떤 이유로든 직접 벌을 받는다고는 감히 불경스러워서도 꿈도 못 꿉니다.
또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 해도 죄가 없을 수 없기에 인간을 구원하는 위치에 설 수는 결코 없습니다. 죄는 벌하되 죄인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 그 죄를 감당하여 죽으시고 또 부활하셔서 죄인은 자신의 부활에 연합시키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실제 죽지 않고는 그 죄 사함의 메시지와 효력을 인간에게 전해주고 실현시킬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계획상 필연적으로 당신께서 직접 인간으로 오셔야 했습니다. 인간 예수가 어느 날 커다란 깨우침을 얻어 십자가에 죽었더니 하나님이 그 큰 희생에 감동해서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까지 승격시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무리 그가 뛰어난 자라해도 아담의 원죄 하에 태어난 죄 많은 인간에 불과해 완전한 속죄가 안 될뿐더러, 인간이 인간을 구원한 것이지 하나님이 그 구원에서 하신 역할은 실질적으로 없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죄를 하나님이 용서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계획에 의해서 인간의 공로와 관계없이 용서하지 않았다면 마지못해서 구원한 셈이지 않습니까? 또 혹시라도 그런 뛰어난 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인간 구원은 아무 희망이 없었다는 의미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인간 구원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무관심하고 냉정한 하나님이 되어버립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이 동정녀에서 탄생한 구세주 하나님이 아니라면 인간 구원의 방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결혼을 좀하면 어때?
“예수님이 정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결혼을 했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화장실에 가서 대 소변을 다른 사람들처럼 보았다고 하더라도, 제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왜냐면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으니까...” 신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질 수 있는 의심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맥락에 근거하면 자칫 이단으로 넘어갈 아주 예민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화장실에 가서 대소변을 다른 사람처럼 본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질문자님의 표현대로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동정녀 탄생이 아니면 그는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 아니라 단순히 원죄 하에 태어난 죄 많은 인간일 뿐입니다.
간혹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니까 동정녀 아닌 정상적 부부관계를 통해서도 메시야가 얼마든지 인간의 몸으로 올 수 있지 않느냐는 가정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어느 누구도 그가 인간에 불과하지 이 땅에 오신 구세주 하나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이적과 말씀, 심지어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이루었다 해도 한 뛰어난 마술사로밖에 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정말 세상을 뒤 엎는 수소폭탄 같은 가공할 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수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가 아니라 폭군 메시야로 변합니다. 또 두려워서 폭군 메시야에게 엎드린다면 진정한 구원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은 아담이 반역할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십자가에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갈4:4,5) 십자가 사건은 단순히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수난 받는 종이 처녀의 몸에 태어나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수많은 예언이 있었지 않습니까?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감당시키셨도다.”(사53:5,6)
다른 말로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당신의 뜻을 확실하게 만천하에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는 측면도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죽을 만큼 사랑하니까 누구든지 자기 죄를 자복하고 나에게 나오는 자를 다 구원하겠다”는 당신의 뜻을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보여 알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즉 영원 전부터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신다는 뜻이 나타나야 하므로 반드시 예언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져야만 했던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으로 오셨으니까 “예수님이 결혼 했으면 어때?”라는 말도 하나님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는 진리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별로 큰 오류가 아닌 것 같지만 큰 문제가 될 소지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여자랑 결혼했다면 예수님도 틀림없이 죄를 지었을 것이라고 진담반농담반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부부가 찌지고 볶으며 살다보면 죄를 안 지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 완전한 대속제물로서의 자격이 떨어지게 된다는 뜻도 됩니다.
저의 다른 글에서도 밝혔지만 결혼을 하여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으면 예수님도 쉽게 십자가에 죽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렇게 했다하더라도 아내와 자식을 방기(放棄)한 매정한 남편이자 아버지가 됩니다. 여전히 인간의 죄를 완전히 대속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또 아내는 완전한 인간이지만 그 자식의 정체성은 어떻게 됩니까? 그야말로 반인반신의 이상한 신분이 됩니다. 나아가 초대 기독교에서 지금까지 예수님의 직계 후손에 대한 숭배 운동이 벌어지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교회가 눈에 안 보이는 거룩한 하나님의 왕국 대신에 인간 예수의 세상적 왕국으로 바뀌고 십자가 구원의 의미도 완전히 퇴색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의 조화
이제 마지막으로 질문하신 내용 중에 가장 어려운 문제를 언급해야 할 차례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지각하고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인성과 신성이 만나는 어느 순간이 있었을 것인데,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세례요한에게서 세례 받은 후 일어난 40일 광야 시험의 순간일까?”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정체성은 말씀드린 대로 완전한 인간 100% + 완전한 하나님(의 영) 100%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작동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당연히 제기 됩니다. 이에 관해 신학적으로 설명해 보려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유일한 사항은 아무도 정확하게는 모르고 또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를 넘어서서 이해하려 했다가는 자칫 인간적 가설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신비이듯이 이 또한 신비입니다. 모든 속성과 능력에 있어서 동일하지만 위격이 다른 세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은 여전히 유일신 하나님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안에도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라는 이성(二性)이 있지만 예수님은 오직 한 분일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 어떤 하자도 없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당신의 뜻을 이루며 세상만물을 다스리듯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그 이성(二性)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당신의 뜻을 이루며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선 451년 칼케돈 종교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정리했습니다. “혼잡 없이, 변화 없이, 분할 없이, 분리 없이, 이성을 가지신 것으로 인정되며, 그 성들의 구분이 연합에 의해서 제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성의 특징이 보존되고 한 위(인격)와 실체로 결합(일치)하여 이위(二位)로 나누이거나 분할되지 않는다.”
어렵게 설명이 되어 있지만 한 마디로 예수님은 단 한 번도 그 인성과 신성에서 0.001%라도 부족한 적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각기 완벽하게 100%씩 작용되면서도 합쳐서 하나의 100%를 이룬 또 다른 신비입니다. 신자가 믿음이 약해지면 성령의 역사도 약해지는 것 같은 현상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을 때에서야 신성이 그에게 임했다면 그 전에는 신성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참고로 이런 생각을 신학적으로는 ‘점진적 성육신론’이라고 합니다. 잉태 시에 완전한 성육신이 된 것이 아니라 잉태 후에서 부활 때까지 인성과 신성의 연합이 차츰 완전한 방식으로 성숙되어져 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칠 때는 완전한 인성만으로 물리쳤다는 뜻이 되기에 구원에 인간의 공로가 작용한 셈이 됩니다.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을 때에 성령이 강림하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은 이제 예수님이 공사역을 시작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방에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서 알리시고 보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종의 메시야 대관식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겪는 정상적인 성장과 교육 과정을 생략한 채 날 때부터 완전한 슈퍼맨 혹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 육체의 탈만 빌려서 쓴 형태, 죄송한 표현이지만 허깨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 값을 감당하기 위해 완전한 인간으로서 흘려야 할 십자가 보혈의 공로는 퇴색 내지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탄생에서부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까지 완벽하게 인간이자 하나님이셨고, 또 그 둘의 완벽한 조화와 연합은 그분이 하나님이셨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지만 초감각적으로 실재(實在) 했었던 하나님만의 불가해적(不可解的)인 신비인지라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동정녀 탄생부터 인간 이성의 영역을 초월한 신비였다면 그렇게 이뤄진 성육신도 당연히 신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스스로 우리의 인성을 취하신 것이지 인간 예수가 신성을 획득한 것이 아닙니다. 한 위(인격) 안에 하나님과 사람이 동시에 있는 것은 기독교 최고의 역설(paradox)이자 역사상 가장 큰 이적입니다. 성경은 이 신비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않습니다. 신자 또한 다만 성경대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대신에 신자가 반드시 기억하셔야 할 것은 죄악에 빠져 타락한 인간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단 한 치의 오류가 포함되지 않는 완벽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등이 반드시 성경에 기록된 시대와 상황에서 꼭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루어졌어야만 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만의 비밀의 경륜으로 완전하게 이루신 구원입니다.
비유컨대 수만 개도 넘는 톱니가 서로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서 최종적으로 나타난 것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입니다. 만약 그 수만 개의 톱니 중에 하나의 톱니에서 한 개의 이빨이라도 어긋나면 골고다는 없었을 만큼 완벽했습니다. 예수님을 성경 기록 외의 어떤 것으로도 상상, 유추, 수정, 가감해선 안 됩니다.
질문자님이 단순히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본 것에 대해 길게 설명 드린 이유는 한 마디로 죄인의 구원에 인간의 공로라고는 단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모든 인간은 스스로는 도저히 방도가 없는 죄인으로서 오직 100%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인성을 입으신 하나님”이 아닌 “신성을 획득한 인간 예수”로 보는 어떤 해석도 성경이 말하는 바도, 예수님 당신이 확정한 진리도 아닙니다.
역으로 말하면 정말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그 심령이 완전히 바닥에까지 내려가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신자는 그분의 신비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바 그대로 온전히 믿어집니다. 예수님이 아니고는 자신에게 도저히 소망이라고는 단 한치도 없었고 자신의 모든 노력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고 철저하게 깨달았기에 오직 하나님의 100% 긍휼만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를 자기가 믿기로 결심하여 믿었다든지, 믿고 난 후에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내세울 것이 있다고 자부한다면 예수님을 단지 도덕 선생이나 기독교를 창시한 한 위인으로밖에 간주하지 못합니다. “예수가 결혼했으면 어때?”라는 의문이 예수님의 인간적 면모를 사랑하고 또 인간으로 오셔야만 했다는 점을 강조하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고 이단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신성을 취득하신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묵상이라면 그 때는 바로 이단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 부분에 착오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11/1/2006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저부터 부처를 믿겠습니다. 그 편이 훨씬 편하니까요.
엉뚱한 단상 하나 :
목사님의 "성경 기록 외의 어떤 것으로도 상상, 유추, 수정, 가감해선 안 된다."는 말씀을 읽으니,
불현듯 요즘 대 히트 중인 천국체험기가 떠 오릅니다. 과거의 펄시 콜레, 요즘의 토마스 주남과 메어리 백스터 등등이 말입니다.
이들의 책을 보면, 체험이라는 포장 속에 가려진 상상과 유추와 가감이 도를 넘은 것 같은데,
일부 성도들은 이러한 사실에는 전혀 주의하지 않고 정신없이 동요하는 것 같아 씁씁합니다.
성령님의 조명의 은혜를 입어 깨우친 진리를
성경에 비추어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시는 목사님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