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지체가 있습니다.

조회 수 3745 추천 수 147 2007.04.14 20:10:11
[질문]

저희 교회에 한 청년이 있는데, 모태신앙이지만, (본인의 표현을 빌면) 자기는 믿음이 없다고 합니다. 예배 시간에 말씀도 열심히 적고, 성경 공부도 열심히 참여하지만, 결론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증거하는 성경말씀이나 여러 간증들을 들어도 그 모든 것이 다른 종교, 철학, 자연 현상, 혹은 사람들이 지어낸 허구 등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존재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절대적인 증거가 없어서 이 모든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동안 많은 분들이 이 청년에게 기도해라, 말씀을 읽어라, 회개해라는 등의 충고를 일삼아서, 이제는 바라보는 사람도 안타까워만 할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움을 줘야 할지 모르겠고, 당사자도 점점 기독교에 대해 냉소적이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이 청년을 어떻게 도우는 것이 좋겠습니까?

[답변]

참으로 어려운 질문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모태 신앙이라면 그 동안에 훌륭하신 목회자나 신앙이 좋은 분들한테서 많은 자문을 받아 그대로 따라했을 것입니다. 또 현재도 열심히 설교를 메모하고 성경공부에 참여하고 있다면 본인으로선 할 바를 다하고 있는 셈입니다. 나아가 신앙이란 워낙 개인적인 사안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영적 상태를 자세히 모르는 상태에선 원론적인 수준의 답변 밖에 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래의 답변이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단지 지금껏 들어온 이야기의 재탕이 되지 않기만 바랄 뿐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기독교 신앙은 믿음으로만 믿음으로 이르게 합니다. 안 믿어지는 것을 무조건 억지로 믿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믿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먼저 믿어지고 난 후에 믿어진 내용을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경 공부를 통해 깊은 깨우침도 생기고 설교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감동이 와서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합니다만 여전히 믿지 못하는 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한 마디로 그 지체분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선뜻 확실하게 안 믿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안 믿어지는 법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 대표적 예로, 사실은 그 말 자체가 본인의 체험을 대변한 것이지만, 사도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자이자 극심한 핍박자였다가 열렬한 옹호자이자 위대한 사도로 변신했습니다. 구태여 수치로 따지자면 진리의 마이너스 무한대 쪽에 서 있다가 플러스 무한대 쪽으로 자신의 견해를 바꾸었습니다. 그 뒤바뀜의 한 복판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건(encounter with Jesus)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당대의 최고 지성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가장 거룩한 도적 군자요 가장 열렬한 종교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창조주 하나님은 몰라도 구세주 예수님은 죽었다 깨어나도 믿지 못하겠다고 버텼습니다. 아니 버틴 것이 아니라 그냥 안 믿어진 것  뿐입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흘 간 봉사로 만들자, 즉 정말 죽었다 깨어나니까 순간적으로 믿어졌습니다.  

그래서 바뀐 후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의 초점은 항상 “예수님은 죽음에서 다시 사셨다. 믿음으로 그분을 구주로 받아들여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해야만 인간이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이전의 자기 같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느냐?”(행27:8)라고 반쯤 힐난하는 투로 간곡히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그 호소를 들은 아그립바 왕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27:28) 그 이면의 뜻을 살피면 바울의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수긍이 되어 그리스도인이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럴만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이 바울의 호소는 지극히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창조주임을 믿는 것으로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로 생명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럼 없는 생명도 만들어 냈는데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일 것 아닙니까?

그러나 논리란 반드시 입증되어야, 특별히 자신에게 절실하게 와 닿는 체험으로 입증되어야 생생한 진리가 됩니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범인들에게는 아무 실감을 주지 못하고 오직 물리학자들에게만 진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반면에 사람이 나서, 자라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은 보통사람들에게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누구나 체험하는 것이며 자신도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되려면 반드시 본인이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부터 있어야 합니다.(이 부분에 관해선 성경문답 사이트 #48,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나요?”라는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모태 신앙이라서 그 동안 머리로 수긍은 했지만 자신의 생생한 체험으로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가진 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와의 만남으로 극적인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꼭 바울과 같은 초자연적 신비한 체험을 해야 하고 그 후 아주 신령한 자로 바뀌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앙의 중심에 반드시 예수님이 있어야, 즉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이 오직 예수와 함께 이뤄져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예수 때문에 살고 예수 때문에 죽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또한 너무 고상하고 심오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상하게 주는 것 없이 무조건 예수가 싫고 밉다가 이제는 이상하게 아무 주는 것이 없는데도 예수가 좋아지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님의 부활이 성령의 내주가 도저히 안 믿기다가 전혀 의심 없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 믿어지게 된 과정을 말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는데도 그냥 믿어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도 어쩌다 이렇게 믿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시쳇말로 헷까닥 했다는 말 말고는 적당한 표현이 없습니다. 주위 사람마저도 도대체 자네가 예수를 믿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그렇게 단번에 변하다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도 모르고 주위 사람도 모르는 일이 일어났다면 바로 그것이 초자연적 체험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고 한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과의 개인적 만남이란 결국 성령이 간섭하여 그렇게 부인하고 외면하던 예수를 그 정반대로 온전히 시인하고 옹호하도록 우리의 깊은 내면의 영혼을 변화 시킨 것입니다.  영혼의 영역에서 그것도 성령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니까 지정의로는 그 과정이 이해가 잘 안 될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이 주관한 한 인간의 구원 과정에 아무리 가까운 부모, 형제, 부부, 친구라도 도와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마저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말13:57)고 가까운 사람에게 전도하기가 더 힘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아가 인자를 따르려면 세상과 등을 져야 하는 복음의 본질상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마10:35)라고까지 경고했습니다.

바울의 회심

그럼 질문하신 그 분처럼 도저히 믿지 못하는 분에게 도와줄 좋은 방법이 정녕 없는 것일까요? 꼭 그렇지 만은 않습니다. 예수님과 극적인 만남을 가졌던 바울의 경우를 다시 살펴봅시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4-60)

스데반이 순교 당하는 현장을 청년 바울(사울은 예수 믿기 전의 이름으로 큰 자라는 뜻)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돌로 처형 시키라는 것도 그가 선동 내지 명령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옷을 벗어 그 앞에 둔 것을 보면 틀림없이 뭔가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그에게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일이 생겼습니다.

스데반이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나아가 그가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기 전에 “그 얼굴이 천사 같다”(6:15)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성령에 충만한 그의 얼굴은 빛이 나고 온유한 사랑이 넘치며 어쩌면 어떤 고통도 느끼지 않는, 모습을 띈 것입니다. 거기에다 마지막 유언은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오히려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고 사죄까지 빌어주었습니다. 죽은 후의 모습도 성경이 “자니라”라고 묘사했듯이 얼굴에 평강이 넘쳤습니다.

우선 바울에게는 스데반이 어떻게 그런 마지막 모습을 보일 수 있었는지 너무나 큰 충격이자 아무래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자기가 옳다고 믿고 따르던 관습, 제도, 법률, 상식, 지성, 도덕성, 종교성으로는 아무리 헤아려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만큼 똑똑하고 선하고 영성이 깊은 자는 없다고 자부했는데 심령 한쪽 깊숙한 곳에서부터 무엇인가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절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내용이, 원인이, 해결책이 무엇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다른 나라에까지 가서 예수 믿는 신자들을 박해하려고 설친 이유가 유대 율법을 무시하는 듯 한 그들을 나사렛 이단으로 정죄해야겠다는 나름대로의 사명감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도대체 이들의 정체와 신앙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특별히 자기와 비교도 할 수 없는 범부(凡夫)에 불과한 스데반마저 죽어 가면서도 자기 스승이 십자가에 죽을 때처럼 원수를 용서해주는 사랑을 보인 이유와 근거를 알고 싶어 미쳤던 것입니다. 본인으로선 의식을 했던 안 했던 끝까지 하나님과 쟁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드디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예수처럼 사흘간 완전히 죽었다 사는 그야말로 극적인 체험을 했습니다. 추측컨대 구약 성경에 능통한 그는 그 사흘간 이 말씀도 떠올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그리고 예수님도 바울에게 성령의 미세한 음성을 통해 진지하고도 단호하게 이렇게 물으셨을 것입니다.

“그래 네가 나를 끝까지 쫒아 다니면서 십자가 복음을 믿는 것 대신에 율법대로 따르는 것이 인간 구원의 길임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내가 잘 안다. 그래서 네가 나를 믿는 자를 진멸하여 세상에서 예수라는 이름마저 없애려 들었지만, 나는 지금 십자가에서 했던 것과 동일하게 또 다시 너를 용서하고 네 죄를 사해 주겠다. 너를 봉사가 아니라 당장 목숨마저 앗아갈 수 있지만 살려 주겠다. 그러나 이제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과연 네 죄를 너 스스로 없앨 수 있더냐? 희생 제사, 율법 준수, 선행과 구제, 그 어느 것으로도 너 죄를 없앨 수 없었지 않느냐? 네가 지금 이렇게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하는 중에도 사실은 네 심령에는 두렵고 부끄러운 죄책감으로 가득 차있지 않느냐?”

바울은 그 주님의 단호하고도 자비로운 음성 앞에 완전히 엎드려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고 그 순간 비로소 썩어 없어질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자였던 사울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 가장 작은 자 바울로 바뀐 것입니다.

말하자면 바울이 믿게 된 데는 예수님과의 대면이 결정적이었지만 그전에 스데반이 그의 영혼에 찔림이 있게 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심어 준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죄와 구원에 대해서 스스로 갈등하고 씨름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중에 자기와 똑 같은 고집과 불신에 붙잡혀 있는 유대인 형제들을 향하여 이런 기도를 하게 됩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1-3) 형제들이 구원 받을 수만 있다면 심지어 자신은 기꺼이 지옥에라도 가겠다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저들의 죄를 사하여 줄 수만 있다면 자신은 기꺼이 돌에 맞게 죽겠다고 한 그 현장에서 돌을 쳐들도록 명했던 바로 그가 이제 똑 같은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지옥에 간 것은 아니지만 자기 소원대로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춥고 헐벗었노라.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후11:24-29)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 바로 그 형제들로부터 온갖 핍박을 받았습니다.

구원에 신자가 도울 수 있는 길

바울의 예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믿지 못하는 형제들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더러 기도하라, 성경 공부하라, 회개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을 위해서 애끓는 심정으로 눈물로 기도했을 뿐입니다. 그것도 자기가 모든 핍박을 당할 테니까 형제부터 구원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삶에서 자기가 기도한 그대로, 권면하고 가르친 그대로 살았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길인 십자가 복음에 자기 생명을 온전히 걸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에게서 찔림을 받아 예수님과 씨름했던 자기의 구원 체험이 너무나 생생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은혜를 주지 않고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확신하기에 다른 사람 앞에서 스데반의, 아니 예수님의 전철을 온전히 따랐습니다.

그 동안 믿지 않는 지체더러 이렇게 저렇게 해보라고 권면은 많이 했습니다. 그분도 권면 받은 대로 최선을 다해 따르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그분 스스로 노력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 스데반이 있었듯이, 유대인 형제들에게 바울이 있었듯이, 아니 모든 죄인에게 예수님이 있었듯이 실제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을 주신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도록 영혼의 찔림이 생기게 만드는 사람이 주위에 필요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성령의 간섭이 아직 없어서 영혼이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신앙적으로 어떤 것을 해보라고 권하기 이전에 정말 주님의 심정을 갖고 내색 않고, 지금 그 정도 상태라면 내색하면 오히려 반발할 소지가 있으므로, 은밀히 그러나 간절하게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주위 성도들이 그가 온전히 믿어질 때까지 쉬지 않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조지 뮐러가 평생을 기도해도 믿지 않던 세 명의 친구가 그가 죽고 나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누군가 오늘 날 대부분의 신자가 가끔 입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빼면 세상 사람과 똑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불신자에게 아무런 찔림을 주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 입으로 전도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정말 찔림을 주어 도대체 신자가 사는 방식과 생각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못 견딜 정도로 영적인 도전을 주어야 합니다.

질문자님이 잘못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을 향한 사랑이 없으면 이런 질문을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는 주위 사람부터 생각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구원과 신앙이 개인적인 문제라 해도 그분 스스로 알아서 하겠거니 맡겨만 두어선 안 됩니다. 그분은 할 만큼 했습니다. 이제는 동료 신자들의 실제 사는 모습과 가치관으로 그분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두 가지만 첨언하자면, 혹시라도 그분에게 말로 신앙적 조언을 해주더라도 반드시 그분의 기질에 맞는 적절한 접근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무조건 회개하고, 성경보고, 기도해 보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분에게는 별 효력도 없을뿐더러 이미 다 해 보아서 용도가 폐기된 것입니다.  

우선 증거나 체험이 없어서 못 믿겠다면 아주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실생활의 문제를 두고 직접 기도해서 응답을 받아보라고 권하는 것이 좋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에게 믿음이 생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조언하는 대신에 작은 일에서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체험토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응답이 되어도 우연의 일치라고 무시할지 모르지만 그런 우연이 자꾸 겹치면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고 싶어서 표적을 달라고 기도하면 기드온의 예처럼 참으로 오묘하고 신기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아니고는 절대로 해낼 수 없는 해결책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렇게 많은 표적을 받았고 또 계속 구하면서도 예수님을 끝까지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본인이 기도로 영적 체험을 쌓아가고 있는 동안에도 주위 성도들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 분의 존재 전체가 완전히 깨어지는 참 중생이 일어나도록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만약 그분이 아주 지성적인 분이라 기독교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버티면 가장 큰 의문부터 참 복음에 입각한 올바른 변증으로 잘 납득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지식을 구하던 헬라인도 끝까지 예수님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변증은 의심을 풀어주는 데만 유용하지 믿음이 생기는 것은 여전히 성령의 역할이므로 계속해  그 일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 외에도 감정적으로 예민한 사람이라면 찬양 집회나 기도 모임에 같이 가도록 한다든지, 교회와 교인의 부조리 때문에 마음이 닫혀 있다면 잡음 없이 바르게 운영되는 교회로 옮기도록 권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식의 접근법이 중요하며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수단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중생, 즉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전제가 안 되고는 생기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위 사람들이 도와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그 사람은 둘째 치고 자기부터 정말 어떤 환난에서도 평강을 잃지 않고 더럽고 추한 세상에서 거룩한 빛을 발하는 참 신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으로부터 영적인 찔림과 부러움을 사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분의 영혼을 끌어안고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심지어 성령의 강권적 역사가 일어나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사방팔방이 막혀서 도저히 하나님을 찾지 않고는 안 되도록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이 가끔은 그렇게 역사 하고 신자의 솔직한 심정도 그렇게 해서라도 예수를 믿는 것이 그런 일 없이 예수를 안 믿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확신하지만, 불신자더러 완전히 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보다는 모세나 바울처럼 그가 믿게만 된다면 자신은 어떤 박해 심지어 재앙을 겪어도 좋다는 절박한 심정을, 즉 주님과 그대로 닮은 긍휼과 안타까움을 갖고 기도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분에게 립서비스만, 너무 안타까워서 말로 복음을 전하고 또 그래야 할 때도 분명 있지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우고 싶은 마음이 있는 자부터 자신을 돌아보아 정말로 올바르게 살면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아가페 사랑으로 섬기는 것 말고는 인간이 한 죄인의 구원을 도와줄 길은 없습니다. (참고로 “하루를 열며”의 # 310 “가장 효과적인 전도 방법”이란 글도 읽어봐 주시기 바랍니다.)

김요한

2007.04.22 14:29:48
*.216.56.249

넘 좋네요...관리자님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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