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에 속한 삶을 사는 신자.

조회 수 692 추천 수 27 2009.11.20 01:29:22
마귀에 속한 삶을 사는 신자.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찌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찌어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찌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찌어다 큰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찌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 할렐루야.”(시편 150)


너무나 무례한 예수님

존 웨슬레는 전도하고 온 제자나 교인들에게 꼭 두 가지를 물어 보았다고 한다. 우선 그 사람이 회심하고 예수를 영접했는지 물어 보았다. 아니라고 하면 그 사람이 화를 내었는지  확인했다. 회심이나 분노가 아닌 어정쩡한 반응을 보였다고 대답하면 도리어 전도하러 간 자를 야단쳤다고 한다. 복음을 정확하게 전해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십자가 복음을 전한다는 뜻이 간단히 말해 무엇인가? 너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세상에서 무슨 공적을 쌓아도 그 죄를 씻을 길이 없으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해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죽을 죄인이라고 지적당했기에 수긍하면 하나님 앞에 철두철미 뉘우치고 아니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고 대들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바울 사도는 그래서 신자는 세상 사람들에게 오직 두 가지 냄새만 풍겨야 한다고 설파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5,16)

요컨대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사망과 생명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바로 하나님께 겸비하게 무릎 꿇고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평생을 그분과 상관없이 혼자 방황하다 허황되게 일생을 마치며 또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영원한 형벌까지 받게 된다.

바꿔 말해 믿음이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서 좀 더 선하게 살거나 하나님을 의지해서 위로를 얻는 차원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 믿고 기도하여서 병이 낫고 사업이 흥하고 아이들이 일류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예수 믿으면 영생을 준다고 하니까 열심히 믿어보자는 것도 믿음이 아니다.

신앙이란 예수를 통해 자기 존재 전부가 참 생명 가운데 들어가 그 인생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정확히는 완전 반대로 바뀌는 것이다. 진짜로 사느냐 죽느냐를 예수를 통해 판가름 받고 또 오직 그분으로 인해 실제로 살고 죽는 문제다.

따라서 신앙의 근본 출발은 예수님 그분이 과연 누구인지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나 성경을 배워서 따르는 것과는 다르다. 존 뉴튼이 말한 그대로다. “당신이 예수에 관해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있지 않는 한 그 나머지에 관해서도 올바를 수가 없다.”

전도 또한 반드시 예수님 그분을 정확하게 소개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을, 기독교 교리가 아니라, 믿든지 안 믿든지 택일 하라고 해야 한다. 그 택일에 따라 영원히 살고 죽음이 갈라짐을 올바르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물론 그런 요구가 언뜻 무례해 보일 수 있다. 그래서 강요는 하지 말되 아주 심각하고도 진지하고 명료하게 삶과 죽음을 제시해야 한다. 최소한 상대가 예수 믿는 문제가 자기가 이해했던 도덕적, 정서적, 종교적 개선책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각인시켜 주어야 한다.

정작 예수님은 훨씬 더 과격한 방식으로 복음을 제시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2-24)

당신을 믿지 않으면 살인자이자 거짓말쟁이인 마귀의 자식이라고 했다. 또 믿지 않는 것이 바로 마귀의 욕심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귀와 동격 즉, 살인자요 거짓말쟁이라는 뜻이다. 당신을 믿고 안 믿고의 여부가 종교를 택해 신앙생활을 하는 차원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과 하나님의 아들 둘 중 하나가 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라. 이런 말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떠했을 지를 말이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고 율법과 성전제사도 성실히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어디에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한 시골 랍비가, 말하자면 경전이나 제사 같은 종교적 형식이나 체계를 전혀 갖추지도 않은 채 바로 본인을 믿으라고 했다. 베드로처럼 저는 죄인이니 떠나달라고 요구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돌로 쳐서 죽이든지 둘 중 하나의 반응 밖에 더하겠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좋은 소식이 되는 이유가 단순히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말로 모든 인간에게 참 생명을 주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은혜 안에서 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놀랍고도 엄청난 소식을 어떻게 다른 여러 종교의 하나처럼 소개할 수 있겠는가? 십자가 앞에 항복케 하든지 끝까지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고 항의케 하든지 둘 중 하나의 반응을 유발토록 제시 되지 않으면 다른 복음을 전했거나 참 복음을 온전하게 전하지 못한 것이다.

믿은 후에도 적용되는 두 가지 나눔

그렇다면 영적인 차원에선 모든 사람을 오직 두 종류로만 나눌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하나님과 마귀 둘 중 하나에 반드시 속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둘을 나누는 기준은 예수를 믿어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는지 여부다. 그분이 자기의 모든 죄를 사하려 십자가에서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가슴이 뜨거워지는지와 말도 안 된다고 반발하는지의 차이다.

그런데 이는 전도 당시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기준이지만 신자가 된 후에도 적용이 된다. 그럼 신자가 마귀에 속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신분과 위치와 소속이 다시 마귀에게로 돌아가는 법은 결코 없다. 그러나 실제 현실의 삶에선 수시로 사단에게 속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말씀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며 성실하게 봉사하면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 반대로 현실의 바쁜 일정에 묶여 평소 도무지 성경 볼 짬도 없고 기도는 아예 하지 못하며 겨우 주일만 지킨다고 사단에 속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힘든 일이 술술 잘 풀리면 하나님께, 그 반대로 꼬이면 사단에 속한 삶이라는 뜻도 전혀 아니다.

하나님께 속한 삶이란 아주 근본적인 차원에서 따져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보다는 정작 내면에 갖고 있는 사고에 따라 달라진다. 가장 먼저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싫든 좋든, 이해가 되던 안 되든, 그 일의 진행과정과 결과를 예측 할 수 있든 못하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라는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싫고, 불편하고, 힘들고, 억울하고, 갈수록 더 꼬여가도, 그래야 한다.

심지어 자신의 실수와 잘못으로 인한 것이나 외부의 나쁜 세력에 의해서 일어난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어도 그래야 한다. 물론 그 일의 적극적 능동적 원인은 하나님 쪽에 있지 않다. 그래도 최소한 그분이 묵인하셨다는, 그 좋지 않은 일을 막아주시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온전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지금 당장 겪고 있는 사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신자가 처한 모든 환경 즉, 직업, 가정, 교회, 모임 등등 모두가 그렇다. 개인적인 건강, 외모, 지성, 성품, 기질, 지난 경험 등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현재 일어난 사건의 모든 배후가 하나님이 이미 마련해 주신 것이라면 범사가 그분의 절대적 통제와 간섭 아래 있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세상만사를 그분이 주관하신다는 원리를 확신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 정도도 모른다면 아예 신자도 아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중심으로 만사를 움직인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그것도 오직 세상에 그 신자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만사를 이끄신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과 사건들이 아무리 많고 복잡하며 또 신자의 숫자가 아무리 늘어도 그러하다. 하나님이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또 그러니까 참 하나님이다.

그분이 신자 한 사람을 중심으로 주변 모든 것들을 운행하고 계시다면 어떻게 되는가? 모든 상황을 그에게 가장 좋고 유익한 방향으로 이끄신다는 의미가 아닌가? 물론 세상과 사람과 사단의 훼방들이 있고 아직 죄의 본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본인의 잘못도 함께, 사실은  아주 많이 작동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잘못된 모든 것까지 궁극적으로 당신의 선(善)과 조화를 이루도록 운행하신다. 신자가 이해, 납득할 수 없는 고난과 실패 가운데도 당신만의 너무나도 거룩하고 오묘한 뜻이 있다.

온전히 수긍할 수 없는가? 예수님이 바로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더 정확히는 대신해서 죽으셨지 않는가? 당신의 생명과 맞바꾸고 피 값으로 사신 신자라면 반드시 거룩하고도 영원한 완성을 위해서 이끄시지 않겠는가? 역으로 따져보라. 그렇지 않을 양이면 대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는가? 또 신자가 이 땅에 살고 있을 동안에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시겠는가? 신자가 실패와 환난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이 멀리 있다고 여기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는가?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은 신자의 궁극적 완성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증거다. 단순히 모든 죄를 사해서 천국 영생을 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신자는 이 땅과 천국 양쪽의 완성을 이미 손에 쥐고 있다. 이 땅에서부터 신자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성공할 수 있다.

아무리 신자가 세상에서 쓰러지고 넘어져 실패한 것 같아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게는 절대로 실패가 없다. 신자가 느끼기에 도무지 성공한 기미가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일 가운데도 그분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신자가 자꾸만 하나님의 성공은 뒷전이고 자신의 성공부터 챙기려 드니까 혹은 하나님의 성공에 자신의 성공도 편승시키려 하니까 매번 힘든 것이다.      

영적전쟁의 진짜 실체

이제 믿은 후에도 신자의 삶이 마귀에 속할 수 있다는 의미가 밝혀졌다. 아직도 점쟁이를 찾아가거나 세속적 쾌락과 죄악을 즐기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 자는 아예 구원조차 받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경건한 종교생활을 게을리 하는 것도 아니다. 사단과의  전투가 종교의 모습을 띌 수 있지만 종교생활을 한다고 다 영적으로 바로 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자가 십자가 은혜를 잊거나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마귀에게 지고 있는 삶이다. 내가 죄 사함을 받아 구원 얻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는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권세와 은혜가 나에게 구원 받을 때의 일회성 효과로 끝나지 않고 일생을 두고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부터 신자가 무슨 일을 만나도 승리할 수 있다는 진리를 모르거나 잊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어떻게 자기는 오직 그리스도가 주는 사망 아니면 생명의 두 가지 향기만 사람들 앞에 낼 수 있다고 그렇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었겠는가? 사망과 생명을 나누는 예수님이 자기와 함께 하고 있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바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힘을 가졌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함에 하나님에게 실패란 단 하나도 있을 수 없다고 철저하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대신해서 그분의 일을 지금 하고 있는데 실패란 도무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과 죄악과 사단에 대해 전혀 기를 죽지 않고 너무나도 당당해졌다. 그러니까 그 수많은 고난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고(고후11:23-29) 생명마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주를 위해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처럼 담대해지기는 참으로 힘들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실패해도 하나님은 성공한다는 확신은 있어야 한다. 단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일에 한해서 말이다. 궁극적 승리는 항상 하나님 편임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신자가 할 일이란 예수에게 붙어 있어서 그분의 사신(使臣)으로 세상 앞에 서는 일 뿐이다.  

아직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기에 자신이 아주 부족하다고 여긴다면 최소한 그러고 싶은 소망이라도 있어야 한다. 소망이 있다면 그러기 위해 각오를 다지고 또 그럴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더 깊이 깨닫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 그리스도가 증거 될 수 있도록 자기를 그분께 내어 드려야 한다. 매사에 언제나 성령의 인도를 겸손하게 구해야 한다.

이 일마저 힘들다면 마지막 한 가지만은 꼭 해야 한다. 현재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 가운데 예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기분 내키는 대로 일으킨 일이거나, 사단이 방해했어도 그분이 전혀 모르고 있거나, 아예 그분이 일부러 고생시키려 한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어떤 현실적 낭패가 따르더라도 궁극적인 손해는 절대로 없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한 무명의 저자가 150 편을 마감하는 시편에서 오직 하나만 강조했다. 하나님께 찬양하라고 했다. 성소뿐 아니라 권능의 궁창에서 찬양하라고 했다. 종교 생활 뿐 아니라 당신이 만드신 모든 땅 즉, 삶의 현장에서 찬양하라는 것이다. 호흡이 있는 동안에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하라고 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그분을 찬양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평생토록 찬양해야 할 이유도 오직 하나라고 한다. 그분이 지극히 광대하시기 때문이다.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능하신 행동으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은 너무나 광대하시다. 당신의 아들을 통해 골고다 언덕에서 이루신 일은 너무나 은혜롭다. 또 성령 하나님을 통해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죄인을 그 아들의 십자가 은혜 안으로 인도하신 일는 너무나 오묘하다. 그러니 신자가 그분 앞에 서면 평생토록 찬양, 감사, 경배 외에 드릴 것이 없다.      

사단은 절대로 신자를 다시 자기의 종으로 묶지 못한다. 신자가 천국 가는 그 신분과 권능을 결코 빼앗거나 무효화 시키지 못한다. 설령 신자가 평생토록 이런저런 죄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도 그렇다. 천국을 가지 못하게 할 수 없다면 사단이 신자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다. 이 땅에서 쓰러트리고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부터 신자에게 보장된 승리를 맛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 십자가 은혜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특권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 죄악, 사단, 죽음 앞에 예수님을 대신하는 자로서 당당하게 서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에게 실패는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만든다. 신자가 실패하면 하나님도 실패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바꿔 말해 사단과의 영적 전쟁의 실체는 아주 단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너무 신령하고 초자연적으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동원해서 귀신을 쫓아내거나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여 죄악과 시험을 이겨내는 힘겨운 싸움을 하는 것은 사실은 이차적 전투다.  그 이전에 일차적인 싸움에서 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려야 하는 소모전일 수 있다.

신자가 싸울 사단과의 일차전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가 신자의 구원 받은 이후의 이 땅에서의 삶에도 완벽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언제 어디서나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예수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 선교 사역 하다가 순교하라는 뜻이 아니다. 사나 죽으나 십자가 은혜와 권능이 얼마나 광대한지 잊지 않는 것이다. 또 그런 광대함 속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신자의 믿음과 그 실행의 폭도 자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생명과 사망을 주관하시는 이가 아니라 단순히 현실적, 정신적, 도덕적, 종교적 위로와 권면과 만족 밖에 주지 못한다. 그런 정도는 다른 종교들이, 심지어 종교가 아닌 세속적 방안으로도 그 질과 양에 차이만 조금 있을 뿐 얼마든지 제공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다시 강조하겠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이미 확보된 승리를 바탕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에 속한 삶을 살고 있는 실체이자 증거다. 세상에서 나의 외모가 후패할지라도 하나님의 승리는 절대 흔들 수 없음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종교 활동을 뜨겁게 해도 사실은 마귀에게 묶인 삶을 사는 셈이다.

여러분은 지금 당신의 성공을 목말라 하는가? 그래서 하나님께 굳센 믿음으로 모든 열과 성을 다해 뜨겁게 간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모든 일에 승리는 이미 확보되어 있기에 대신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만 목말라 하는가? 그래서 당신을 보는 자는 정말로 사망과 생명의 냄새 둘 중 하나를 맡고 있는가?

5/11/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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