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라사 지방 같은 한국교회들

조회 수 717 추천 수 23 2009.11.20 04:24:26
거라사 지방 같은 한국교회들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막5:9,10)


예수님은 거라사 지방으로 건너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 귀신들린 자를 치유해 주었습니다. 고랑과 쇠사슬로 묶었어도 끊을 정도로 귀신의 힘이 세어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귀신의 이름이 군대이고 거의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에 들어갈 정도였으니 한 사람에게 이천이나 되는 귀신이 들어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자(사실은 귀신)는 예수님을 멀리서 보고 달려와 절하며 자기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탁의 구체적인 내용이 그 사람에게서 쫓아내지 말아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 지방에서 내어보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귀신은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아보았고 예수님도 이미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하였으므로, 귀신은 그자에게 계속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눈치 채었습니다. 그럼 다른 사람이나 지역으로 옮기면 되는데도 구태여 그곳에 남기를 원했습니다.

사단은 인간을 개인별로 자기 노예로 삼지만 어떤 특정 지역도 흑암의 세력으로 지배하려 듭니다. 이 세상에 사단의 세력이 없는 곳이 없지만 특별히 고래(古來)로 우상 숭배가 심한 곳이나 이단 종교의 메카들처럼 사단이 주도적 지배권을 확보하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 주위의 가까운 사람부터 전도하는 것과 동시에 그런 흑암의 지역으로 찾아가는 선교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군대 귀신은 심지어 돼지 떼에 들어가더라도 그 지역에 남아 있으려 했습니다. 예수님마저 속이려고 얕은꾀를 부린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귀신 들린 자만 치유하게 하고 군대 귀신은 그곳에 남아 계속 농간을 부리겠다는 것입니다. 아마 돼지 떼에 잠시 피신해 있다가 예수님이 떠나면 나와서 처음 나왔던 그 사람에게 다시 붙으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런 흉계를 모를 리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표적만 구하는 당시 세대를 귀신들린 자에게 비유하면서, 사람에게 쫓겨나간 귀신이 쉴 곳이 없으면 깨끗케 된 자에게 다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 거하므로 나중 형편이 더 심하게 된다고 경고 했습니다.(마12:38-45) 예수님은 귀신만 쫓아낸 것이 아니라 귀신들린 자를 완전히 구원해 주셨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군대 귀신과 동네 사람들이었습니다. 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는 바다를 향해 비탈로 내리달아 몰사(沒死)했습니다. 사단은 돼지를 임시피난처로 삼으려 했지만 예수님은 그 돼지를 몰사시켜버렸습니다. 돼지가 미처 사단의 조종을 받기 전에 예수님이 당신만의 권세로 돼지를 미치게 한 것입니다. 발람의 당나귀나, 다니엘의 사자굴이나, 벳세메스의 암소에서 보듯이 동물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뿐이며 예수님은 당신이 바로 그분임을 증명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엄청난 이적을 목격했음에도 예수님을 그 지역에서 떠나 주기를 요구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눅5:8) 예수님을 바라보면 도저히 죄인으로 그 앞에 서기가 두려운 영적 권위를 분명히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들은 이미 그 지역을 묶고 있는 사단의 노예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떠났으면 좋아 해야 함에도 귀신을 쫓아낸 예수님더러 떠나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남아 있고 하나님은 떠나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죄악 가운데 남아있겠다는 뜻입니다. 사단에게 사로잡힌 상태임을 드러낸 말입니다. 아마 당사자들은 사단에게 잡혀 있는지, 죄를 계속 즐기고 있는지, 심지어 지금 자기들이 예수님께 부탁하는 말이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조차 모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악이 분명하다는 인식이 있으면 아무리 불신자라도 섣불리 말이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법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계속해서 돼지 사육하는 생업을 유지하겠다는 단순한 뜻에서 그런 부탁을 한 것입니다. 돼지 떼가 몰살하는 것을 보고 앞으로도 그런 일이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으리라 눈치 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동일한 사건이 또 일어나리라 예상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라사 지방의 정확한 위치가 신학자들 간에 이견(異見)이 있지만 유다 지역 내의 변방 혹은 유다에 비교적 인접한 이방 지역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또 로마인들에 의해 10개의 도시가 세워진 데가볼리에 가까워 많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 땅에선 율법으로 금지하는 부정한 음식인 돼지 사육을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곳에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돼지고기를 데가볼리의 이방인 혹은 이미 이방인화 되어버린 유대인들에게 팔아 많은 이득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한 유대인 랍비가 나타난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로선 그가 앞으로도  큰 능력을 사용해 돼지 사육을 막을지 모른다고 쉽사리 짐작했을 것입니다. 자기 동네의 큰 골칫거리였던 군대 귀신 들린 자가 정상으로 돌아 온 것은 사실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어차피 무덤 사이에 버려두면 그만이지만 당장 돼지 사육을 못할까봐 더 걱정이었습니다.  

귀신은 영적 존재라 돼지가 죽어도 함께 죽지 않습니다. 급히 탈출해 나와 아마 순간적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흩어져 붙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사단은 한 지역을 통 채로 손아귀에 넣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처음부터 끝까지 노리는 것은 동물도 특정 지역도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람입니다. 사단에게 넘어간 사람이 없으면 그 지역도 당연히 넘어가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단에게 넘어가는 가장 손쉽고도 빠른 통로가 무엇입니까? 신비한 능력으로 이적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소복 입고 피 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나 겁을 주는 것입니까?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업을 통해서입니다. 무당, 마술사, 점쟁이가 아닌 다음에 생업 자체가 사단의 일이거나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들로 오직 돈만 목표로 생업에 매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거라사 지방은 당시에도 무덤이 많았습니다. 또 돼지 사육은 로마인들도 싫어하는 더러운 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곳에 모인 주민 전부가 처음부터 돼지 사육을 해서라도 돈을 벌겠다는 욕심꾼들이 모인 곳입니다. 돈에 묶인 자들이 모인 곳이라 사단은 별로 힘을 써볼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가끔씩 군대 귀신 들린 자가 난동을 부려 겁만 주면 그만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완전히 사단의 놀이터이자 안방이 된 곳이었습니다. 돈에 묶인 사람들 스스로  사단의 노예가 된 것이지 사단이 그 지역이 특별히 탐나 차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라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으로 그동안 동네의 골칫거리였던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주어도 아무 감동이 없었습니다. 돈은 하나님마저 눌러버리는 가공할 힘으로 사람을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지금 남한 아니 남북한 모두의 모습입니다. 세상을 움직이며 사람을 주관하는 가치관이자 힘은 오직 돈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많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야말로 군대 귀신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한반도라는 지역 전체를 흑암의 세력이 꽉 붙들고 눌리고 있는 듯합니다.

예수님은 거라사 주민의 요구대로 말 없이 그 지역을 떠나주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한국도 떠나버리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사역이 이천년 전 거라사나 지금의 한국에서 실패로 끝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실패할 사역은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친 것을 두고 성공이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를 그 지역의 한 사람의 의인으로, 그 의인으로 인해 그 지역을 멸하지 않는 그런 의인으로, 나아가 그 한 사람으로 인해 그 지역이 하나님 나라로 바뀌는 일꾼으로, 남겨 두었기에 크게 성공한 것입니다. 귀신들렸던 자는 자기 친속과 데가볼리에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일 행하신 것을”(20절) 전파했습니다. 사단의 직속 부하로 있던 자를 그 지역에 복음을 증거 하는 선교사로 세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당신이 직접 나서서 성공시키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당신의 마음에 합한 의인을 통해 이루십니다. 그것도 열 명까지도 필요 없고 단 한명이라도 족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겠습니까?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하도록 하여 이루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신자가 복음을 증거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단이 사람을 가장 손쉽게 조종하는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생업을 통해 돈에 묶이는 모습 아니었습니까? 그럼 예수님이 그런 사람을 건져내는 방법도 어떠해야 합니까? 당연히 그 반대여야 하지 않습니까? 신자는 가장 먼저 돈에 굴복하는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복음을 전해야 복음이 제대로 복음으로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도 작금 남한의 많은 교회들이 어떤 모습입니까?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생업을 통해 돈에 묶이는 모습을 솔선수범해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대신에 예수님더러는 교회에서 떠나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입술로는 예수님을 뜨겁고도 간절하게 수도 없이 부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책망, 특별히 돈에 묶이는 인생을 사는 것에 대해 아무 책망도 하지 못하고, 아니 스스로 돈에 묶이는 것은 예수님더러 교회에서 나가달라는 말과 같습니다.

골고다 십자가가 없는 예수님은 아무리 그 이름이 많이 거명되어도 그곳에는 예수님이 부재합니다. 반면에 십자가가 증거 되어 죄에 대한 통렬한 지적과 성도들의 진정한 회개가 따르면 예수님의 이름을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그곳에는 예수님이 충만하게 임재해 있습니다.

한반도를, 특별히 공산주의라는 마귀에 완전히 붙들려 있는 북한을 건져내어야 할 남한의 교회마저 거라사 지방으로 변해가고 있고 상당히 많이 변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사역은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 한 명의 진정한 의인이 있다면 말입니다.  

11/17/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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