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물을 단물로 너희가 바꾸어라.

조회 수 170 추천 수 0 2017.10.12 08:50:44

쓴물을 단물로 너희가 바꾸어라. 

출애굽기 강해 (33)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출15:22-27)

 

 

가죽주머니에 물이 떨어진 이스라엘

 

홍해의 기적으로 사백 년의 노예 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은 진심으로 전심을 다해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 그 찬양은 순수했고 하나님도 기쁘게 받으셨다. 그런데 사흘 길을 가도 마실 물을 얻지 못하자(22절)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다(24절).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인간 본성이 너무나 연약하고 가난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그러나 고난이 닥친다고 해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실존하시어 세상만사를 주관한다는 기본적 믿음이 없어지거나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믿음이 있으니까 더욱 기도하고 말씀을 본다.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허락했는지 그 이유와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몰라서 의심과 불안이 생기는 것이다.

 

본문의 사건도 성경을 앞뒤로 잘 살펴서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하고 또 하나님이 쓴물을 허락하신 이유를 정확히 따져봐야 한다. 바꿔 말해 단순히 어떻게 3일 만에 믿음이 그렇게 빨리 떨어졌는지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그래서 우린 믿음을 굳건히 다지고 성숙해지자고 다짐하고 치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고 치우면 믿음이 성장하기는커녕 자칫 퇴보할 수 있다.

 

전쟁이나 자연재앙이 발생해 피난 갈 때에 제일 먼저 무엇을 챙기는가? 두말 할 것 없이 물이다. 아무리 이스라엘이 한 밤중에 황급하게 애굽을 탈출했어도 짐승가죽 주머니에 물을 가득 채웠다. 식구끼리 아껴 마시면 일주일에서 사흘 정도는 버틸 수 있다. 이스라엘이 당장 물이 없어서 죽게 된 것이 아니다. 물이 주머니에 간당간당 남았고 물을 다시 주머니에 채울 때가 된 것이다.

 

그래서 모세에게 원망하며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라고 물은 것이다.(24절) 아직은 하나님에게 정식으로 불평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네가 40년간 광야의 전문가였다면 어느 곳에 물이 있는지 알았어야 하지 않느냐고 따진 것이다. 지금도 오지를 탐험할 때에는 기후 지리 풍습에 능통한 현지 가이드를 채용한다. 모세가 그런 역할을 맡았는데 길잡이를 하려면 똑바로 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본문의 수르 광야는 모세도 처음 가보는 지역이다. 모세가 40년간 양치기했던 미디안 광야는 시나이 반도 동쪽 바다의 건너편에 있다. 수르 광야는 시나인 반도 서쪽에 위치한다. 거기다 모세는 항상 애굽에 체포당할까 두려워 애굽 가까운 쪽으로 올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애굽에서 사흘 밖에 안 떨어진 마라는 모세에게도 완전히 생소한 지역이었다.

 

무엇보다 실은 지금 마라로 모세가 인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따라왔다. 그곳에 이른 것이 모세의 잘못이 아님을 이스라엘 백성이 모를 리 없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원망하려니 괜히 두렵고 3일 전에 큰 은혜를 입어서 자기들 입으로 찬양을 했는데 갚은 입술로 바로 원망하는 것은 스스로도 염치가 없었을 것이다. 애꿎은 모세 탓만 했는데 인간의 치사한 심령의 또 다른 단면이다.

 

마라는 중간 경유지였다.

 

그럼 하나님이 왜 마라의 쓴물 쪽으로 인도하셨는지 따져볼 차례다. 마라와 엘림의 오아시스(27절)까지는 하루 길밖에 안 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할 목적지는 엘림이었고 마라는 그곳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였을 뿐이다. 만약 모세가 그곳 지리에 익숙했다면 이스라엘더러 처음부터 이 물은 쓰니까 마시지 말라고 말리고 또 하루만 더 참으면 엘림에 도착할 것이라고 설득했을 것이다.

 

그럼 이스라엘이 하루 정도 못 참아줄 리는 없다. 지금껏 애굽의 열 재앙과 홍해의 기적은 모세가 예고한 그대로 실현되었다. 홍해 기적으로 출애굽이 마무리 된 뒤에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경외했고 그 종 모세를 믿었다고(출14:31) 했지 않는가? 함께 큰 기쁨으로 하나님께 찬양한 것이 바로 사흘 전이었다.

 

모세도 하루 길만 가면 엘림이 있는 줄 전혀 몰랐다. 스스로도 하나님이 왜 이런 곳으로 인도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병약자나 어린이들을 위해서 깨끗한 물이 시급했다. 그래서 백성들을 야단치지 않고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했고 여호와가 지시하는 방식으로 쓴물을 단물로 바뀌는 기적적인 은혜를 또 받아 누렸다.(25절)

 

엘림이 목적지였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고의로 위험에 빠트린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당장에 고난처럼 보여도 본문처럼 빠져나갈 방도를 미리 다 마련해 놓으신다. 신자가 영적으로 무지해서 당신의 뜻을 전혀 감도 잡지 못해 믿음이 완전히 떨어질 수는 있다. 그래서 가만 두면 도무지 안 되겠다 싶은 지경에 이르면 본문처럼 기적을 베푸신다. 정확하게 말해 하나님만의 방식으로 구출해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온전한 믿음은커녕 애굽에서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어도 출애굽의 은혜를 베푸셨다. 그들을 통해 가나안 땅에 당신의 나라를 건설할 목적이었다. 그럼 모세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안락하고 풍요롭게는 아닐지라도 무사하게 그곳으로 인도해주실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공동체가 처음으로 닥친 고난이자 꼭 필요했던 것이 생존에 없어선 안 되는 물이었다. 그런데 아예 마시지도 못하는 곳으로 이끌고 왔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마라가 없는 곳으로 이끌었다면 서로 물을 아껴가며 힘내라고 격려하면서 하루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럼에 엘림에 무사히 도착했을 것이다.

 

기억할 것은 이스라엘은 구름기둥이 움직여야 행군했다. 불기둥이 서면 그곳에 장막을 쳤다. 사흘이 지나고 구름기둥이 멎고 불기둥으로 대체된 곳이 마라일 것이다. 그런데 그 물이 쓴물이니 어느 누구가 하나님께 의심 원망하지 않겠는가?

 

마라로 이끄신 이유는?

 

그럼 마라로 이끈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출애굽과 홍해의 기적을 체험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자 그분이 항상 함께 하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예수 믿어 구원을 얻은 것에 해당된다. 그런데 처음 도착한 곳이 마라다. 그럼 예수 믿은 후의 인생길 앞에 분홍 카펫이 깔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체로 힘든 일이 더 겹친다.

 

한국에 기독교가 부흥할 초창기에 예수를 믿겠다고 하면 부모나 집안의 반대가 극렬했다.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지금은 미신적 사고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당시는 집안에 반드시 흉사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또 실제로 그런 일들이 있었다.

 

물론 우연의 일치이거나 사탄의 훼방 둘 중 하나다. 사탄이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는 단 한 명이라도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등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재물도 주고 현실의 출세도 시킨다. 사람들은 받은 복이 커서 사탄인 줄 모르고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오해까지 한다.

 

하나님은 그런 줄 다 아심에도 당신의 완벽하고 오묘한 섭리 가운데 사탄의 그런 방해를 허용하신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처럼 사탄에게 씨앗을 빼앗기는 자, 현실의 재물을 주인으로 삼는 자, 예수님에 대해 마음 밭을 열지 않는 자들 즉, 쭉정이를 골라내려는 뜻이다. 알곡은 아무리 숫자가 적어도 당신께서 씨 뿌리고 잘 자라게 해서 그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수행하신다. 지금 우리 교회가 연약한 모습일지라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우리를 통해 그분은 얼마든지 큰일을 이루실 수 있다.

 

하나님이 그 선별을 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이며 자주 동원하는 방안은 바로 고난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단순히 의지력 인내심 테스트가 아니다. 고난 중에 자아가 철저히 깨어져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알게 하려는 것이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하나님이 누가 어떤지 몰라 그 반응을 보고 당신의 판단 기준으로 삼으려는 것은 아니다. 이미 택한 백성에게 당신의 은혜와 권능을 베풀어서 얼마나 좋고 풍성한지 직접 삶에서 체험케 하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고난을 겪어야 하나님이 반드시 합력해 선으로 이루시는 줄 확신하게 되고 그래서 앞으로 어떤 고난이 닥쳐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직 이스라엘이 믿음이 연약하고 아주 초보단계임을 알고 계신다. 그러니까 하루 길 만에 엘림을 예비해 놓으신 것이다. 그들의 원망을 모세를 통해서도 전혀 꾸짖지 않으셨다. 곧바로 기도에 응답해서 해갈하게 했다. 마라와 엘림은 정반대의 모습이다. 이 둘을 너무나 명확하게 대비시켜서 이스라엘로 당신의 섭리에 대해 쉽게 깨닫게 해준 것이다.

 

영적인 근시와 난시

 

하나님의 최종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다. 엘림도 중간기착지였다. 그 후의 여정은 정말로 마시고 먹을 것이 없는 신 광야였다. 수르 광야보다 훨씬 척박하고 황폐했다. 그곳에선 반석에서 물을 내셨다. 이왕에 있는 물을 바꾼 것이 아니다. 또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렸다. 결국은 시내 산에 도착하여 거룩한 율법을 수여했다.

 

하나님이 어떤 뜻과 계획으로 이스라엘을 이끄시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가? 당신의 나라에 합당하게 믿음의 훈련소를 통과시키는 계획임을 알 수 있지 않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가데스 바네야에서 하나님에게 거역했다. 출애굽의 그 큰 은혜, 광야의 반석과 만나 메추라기는 온 데 간 데 없어졌다.

 

세상 어떤 민족도 누리기는커녕 알지도 못하는 권능을 받았음에도 그랬다. 결국 인간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의 고난에만 모든 관심을 쏟는 영적 근시안을 지녔다. 당장 저부터도 그러하다. 영적 시야가 한정되니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지 못한다. 영적인 착시 내지 난시 현상마저 따른다.

 

그것으로 그치면 아무리 믿어도 힘을 발위 못한다. 하나님은 신자의 그런 증세를 막기 위해서 즉, 당신이 누구인지와 당신의 뜻을 잘 분별하도록 성경을 주셨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바탕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라는 것이다. 성경을 읽는 오늘날의 신자들은 이런 영적 근시와 착시 현상을 없애야 한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보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가? 하나님이 모든 질병의 치료를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실제로 죽게 된 것도 아닌데 쓴물을 단물로 바꿔주셨다. 그렇게도 완악한 이스라엘도 치유해 주셨는데도 우린 열심히 믿고 기도 봉사 헌금하는데도 전혀 치료해주지 않는다. 기적이 구약시대에만 있다가 신약시대에 끝난 것인가? 초대 교회에도 있었다. 그렇다면 왜 나에게만 은혜를 베풀지 않는가라는 의심과 불만이 든다.

 

이런 반응이 생기는 것은 본문을 읽고 싶은 부분만 읽은 탓이다. 읽고 싶은 것만 읽으니 영적 근시가 되고 결과적으로 착시까지 생긴다. 본문 26절을 다시 보라. “애굽에 내린” 모든 질병을 다시 내지리 않겠다고 했다. 열 재앙 중에 이나 독종 재앙처럼 전염병을 말하는 것이지 개인적인 병이 아니다. 치료하는 하나님이라고 해서 개인의 모든 질병을 치료해준다는 뜻은 전혀 없다.

 

또 그전에 어떤 조건이 달렸는가? 하나님이 정한 모든 규례를 지켜야만 한다.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그분의 규례를 모두 지키는 자여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고쳐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다.

 

시험에 통과한 이스라엘

 

문제는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지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럼 하나님은 아예 질병을 고쳐달라는 기도는 안 듣겠다는 뜻인가? 신유의 은사를 받은 자를 찾아다니며 기도 받는 크리스천 샤머니즘을 지지하는가?

 

하나님이 그럴 리는 없다. 당신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거나 특별한 목적이 있을 때에 고쳐주신다. 신자의 조건 자격 공로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시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마라 이상의 기적을 베푸신다. 죄송하지만 그 산 증인이 바로 저이지 않는가?

 

본문에도 하나님의 그런 특별한 뜻이 있다. 모든 규례를 지키라고 했지만(26절) 아직은 시내 산의 율법을 받기 전이다. 그럼 무슨 규례인가? 그 앞 25절 끝에 보면 마라의 쓴물의 현장에서 법도와 규례를 제정하셨고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럼 그 규례는 무엇이었는가? 아주 간단히 추측이 가능하다.

 

미국에 비행기를 탑승하는 순서가 어떻게 되는가? 먼저 핸디캡, 병자 다음으로 어린이 노약자 여자 마지막으로 남자 성인이다. 이백만 명이 가죽 주머니에 물을 채워 다시 행군해야 한다. 그냥 두면 완전히 아수라장이 된다. 출애굽 기사를 죽 살펴본 대로 이스라엘은 체계도 질서도 잡히지 않은 유랑민 내지 난민 수준밖에 안 된다.

 

거기다 모세는 광야의 전문가가 아닌 것 같다. 그럼 믿을 것은 자기뿐이다. 베데스다 연못에서처럼 힘이 센 자가 먼저 물에 들어가는 현상이 생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쓴물을 단물로 바꾸는 방안을 가르쳐 주면서 물을 분배하는 순서까지 함께 지시한 것이다.

 

이스라엘과 모세는 그 규례를 잘 지켜 하나님의 시험에 통과한 것 같다. 그러니까 엘림으로 인도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구름 기둥이 엘림이 아닌 신 광야로 바로 인도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래도 이때까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 감격이 채 가시지 않았다.

 

무엇보다 출애굽한지 며칠 밖에 안 되어 마실 물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정말로 마실 물이 없어 죽게 되었다면 규례도 완전 무용지물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세밀하고 자상한지 알겠는가? 이스라엘의 연약한 본성과 그 여건에 맞추어 믿음을 심어주고 자라게 해주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면 애굽의 모든 질병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 치료해주는 하나님(26절)이라는 뜻이다. 역으로 말해 공동체를 서로 사랑으로 섬기지 않으면 공동체에 그 벌로 전염병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웃을 진심으로 섬기는 공동체는 단체 벌로 전염병을 내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는 구약 전체에 일관된 그분의 원리다. 성경은 하나님을 계시한 책이므로 그분 중심으로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인간에 관해선 알 필요가 없다. 바로 우리 자신을 보면 인간에 대해 충분히 알고도 남지 않는가? 성경을 보고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마치 우리의 믿음이 이스라엘보다 우월한 양 착각하는 영적인 난독증(亂讀症)에 걸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첫째 명령도 지키지 않는 신자들

 

월드비전(World Vision)이라는 세계적인, 특별히 아프리카 구호에 힘쓰는 크리스천 구호기관이 있다. 그들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유엔의 한 통계를 인용해 놓았다. 지금 전 세계의 5세 미만의 어린이가 오염된 물로 인해 하루에도 천명이나 죽는다고 한다. 일 년이면 365,000명이고 어른들까지 합치면 그 몇 배가 된다.

 

물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첫째가는 필수 요소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후에 가장 먼저 준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정복하라는 것이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어 보존하고, 남녀 간의 결혼으로 후손을 번창 하게 하고,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물을 마시지 못해 천 명이나 그것도 아직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도 받아보지도 못한 어린이가 죽을 만큼 환경이 오염되었다. 정복은커녕 아직 개발도 못한 셈이다. 동성애가 번창해서 후손을 증식시키지 못한다. 동성애는 단순히 성적 타락이 아니라 생명이 이어지지 못하게 하는 즉, 죽음의 문화를 전파시키는 너무나 큰 죄다.

 

이런 심각성을 모르고 신체적인 결함이나 이유가 없으면서도 단순히 생활고를 염려해서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한다. 결혼을 해도 아이를 갖지 않으려 한다. 신자 청년들마저 그렇다. 하나님이 주신 첫째 명령 하나도 인간 창조 후 수천 년 수만 년이 지나도록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인류 역사상 문명이 최고로 발달되었다. 인권 자유 평등은 최고로 보장되어서 도덕적으로 가장 진화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한쪽에선 로봇이 사소한 일을 인간을 대신해 다 해 줄 정도로 안락하고 풍요롭게 지낸다. 그와 동시에 지구 다른 쪽에선 아직도 마라의 쓴물을 마시고 있다. 도무지 다른 방안이 없어서 그런 물이라도 마셔야하기 때문이다.

 

원인이 무엇인가? 아프리카가 무식하고 미개하고 하나님을 몰라서 그런 것인가? 물론 이전에는 그런 원인도 있었다. 지금은 도무지 그럴 수 있는 인력과 자원 즉, 돈이 없기 때문이다. 이웃이 굶던 목이 말라 죽든 상관 않고 내와 내 가족과 내 나라만 풍족하고 화려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인간의 탐욕 때문이다. 그 중에 크리스천이라고 크게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19세기와 20세기 초에는 크리스천들이 앞장서서 가난한 나라를 수탈했다.

 

하나님의 규례는 아주 간단하다.

 

마라에서 주신 하나님의 규례는 아주 간단했다. 질서를 지키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약하고 힘든 이웃을 먼저 돌보기 위해서였다. 물이 모자라면 남자 어른들은 적게 마시거나 마시지 않고 참으라는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행하면 하루 길 만에 엘림을 보장하신다는 것이 치료하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도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똑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치료하는 여호와의 더 구체적인 뜻은 그래서 너희가 서로 섬겨서 너희 공동체를 너희가 치료하라는 것이다. 너희가 쓴물을 단물로 바꾸라는 것이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피조세계도 하나님의 저주를 함께 받았다. 가시덤불이 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쓴물을 단물로 바꾸는 책임이 인간에게 맡겨졌다. 실은 타락 전 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주신 명령이 이 땅을 정복하라는 것, 바로 그런 의미였다.

 

본문 25절의 마라에서 이스라엘에 행한 시험은 오늘날은 물론 모든 세대의 크리스천에게 해당된다. 저와 여러분이이 시험을 통과할 자신이 있는지 진지하게 따져봐야 한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의미인지 모른다.

 

만약 통과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거나, 계속해서 우리 삶에서 마라의 쓴물을 마실 수밖에 없다. 그 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 사실을 생생하게 증거 하지 않는가? 다시 25절을 보라. 그 규례를 왜 제정했다고 말하는가? “그들을 위해서”라고 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유익이 되는 규례이자 시험이었다.

 

월드 비전에서 우물을 파주는데 중장비를 동원해야 하니까 1-2 만 불은 족히 든다. 여러분에게 부담주려는 뜻은 없다. 그러나 일인당 한 달에 최하 $35만 기부해도 얼마든지 도울 수 있다. 수십 명, 수백 명만 모으면 작은 마을의 적은 우물 정도는 파 줄 수 있다.

 

작금 “여호와 라파 – 치료하는 하나님”을 마치 주문처럼 외우면서 신자들끼리 교회에만 모여서 자기 질병만 고쳐달라고, 내 사업을 형통케 해달라고 뜨겁게 기도하고 있고 또 그것을 아주 좋은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물론 무슨 질병이든 무슨 문제든 간절히 기도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이니 큰일이다. 예수님이 그런 교회와 신자들에게 과연 임재 하겠는가?

 

이 또한 지난주처럼 인간, 특별히 신자를 비하하고 절망감이나 죄책감을 안기려는 뜻이 전혀 아니다. 그 정반대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하여 모든 규례를 지키라고 하셨다. 이웃과 나누고 섬기는 데에 인생 최고의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또 그런 공동체 안에 예수님이 아주 강력하고도 오묘하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게 임하신다는 것이다.

 

10/8/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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