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조회 수 29 추천 수 0 2015.03.05 01:19:39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나의 대적이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찌어다 나는 엎드러질찌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찌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미7:8,9)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에 대해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곧 임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 심판은 적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모습으로 실현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고 결국은 그 대적의 손에서 구출해줄 것이며, 나아가 메시아가 오시어 최종적이고도 완전한 구원이 이뤄질 것이라고 예언하고 그 날을 소망하라고 말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얻을 그 장래의 승리를 바라보며 부르는 선지자의 찬양입니다. 그 승리는 가깝게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함으로써 이뤄졌으며, 멀리는 예수님의 초림 시의 십자가 승리로 달성되었습니다. 나아가 주님이 재림하시어 베푸실 영광스런 구원을 예표합니다. 따라서 미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신약성도들도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이 노래를 진심으로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들이 그럴 수 있을지 너무나 의심스럽습니다. 모두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별로 강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주님이 가능한 늦게 오시길 더 바라지 않나 싶을 정도입니다. 구원의 영광스런 완성을 기대하지 않고 심판까지는 몰라도 뭔가 야단맞을 것이 많을 것 같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진심으로 믿어서 옛사람을 그분의 십자가와 함께 죽여 버리고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완전히 유턴한 신자라면 비록 성화의 열매가 아직 제대로 맺지 못했어도 반드시 그 구원은 영광스럽게 완성됩니다. 마지막 때에 꾸중도 당연히 없고 다만 상급에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런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고, 심지어 잘 알지도 못하니 큰일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니 그렇다 치더라도 본문에 비추어 볼 때 더 실감나고 두드러진 하자가 현재의 신자들에게서 발견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선지자는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라고 합니다. 우리의 치명적 문제가 무엇인지 눈치 챌 수 있습니까?

과연 우리 중에 자기가 겪는 고통을 주님이 거두실 때까지 담담히 감수하겠다는 자가 얼마나 있습니까? 그 전에 그 고통을 자신들의 죄와 연결시키는 자는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설령 자기 죄와 연결시켰다 해도 회개는 잠시뿐, 거의 형식적으로 하고 일단 회개했으니 어서 빨리 구출해달라고 아우성만 치지 않습니까? 심지어 자기 죄를 구체적으로 되돌아볼 생각은 아예 하지 않습니다. 혹시 내 죄나 허물 때문에 하나님이 벌로 이 고난을 주시나 지레짐작하고선 두리뭉실하게 무조건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빌지 않습니까?

인간이, 신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임, 겪는 고통의 거의 대부분은 자기 쪽의 실수, 허물, 잘못, 죄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은 그런 점을 잘 알고 있기에 일이 잘 풀리지 않고 고난이 닥치면 곧바로 자기와 자기 주변의 원인부터 분석합니다. 혹시 자기 계획과 집행에서 오류가 발견되면 곧바로 시정합니다. 도덕적 선악 간으로 따지지는 않지만 어쨌든 자기반성은 철저히 합니다.

정말 이상하게도 많은 신자들이 아예 그러지 않습니다. 만사를 하나님이 주관하기에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하나님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라고 단순히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하나님께 바로 잡아달라고 떼만 쓰는데 너무나 어이없게도 그러는 것이 좋고 뜨거운 믿음이라고 간주합니다. 만약 기도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면 기도가 만병통치약이 되다 못해 하나님의 자리마저 넘볼 참입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만약에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단 하나도 없이 완전히 기계적 로봇이었다면 그런 판단과 대응은 당연히 옳습니다. 최소한 그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서 그분의 뜻이라고 확신한 후에 시행했다면 당연히 그렇게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나마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분별했는지 여부는 둘째로 치고 논리적으로만 따져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고통에서 빨리 구출만 해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이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엄마가 시장 보고 올 동안에 아이에게 집에서 조용히 숙제하고 있으라고 당부했습니다. 아이는 그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밖에 나가서 제 멋대로 실컷 노느라 옷과 신발을 다 버리고 숙제마저 못해 선생님께 혼났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엄마 책임이고 심지어 학교성적도 엄마가 올리라고 우기는 꼴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적국에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벌어지니까 이스라엘은 마땅히 자기들 죄를 회개하고 또 그 벌을 받겠다고 한 것 아닌가? 그럴만한 큰 죄를 짓지 않은 우리와는 다르다.”고 항변할 계제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그들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우상 숭배나 도덕적 악행은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하나님 대신 돈을 주인으로 모시고 내 탐욕을 세속적 수단으로 달성하려다 실패하고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도 모든 일을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연결시켜서 사유했고 때로 지나쳐서 형식적 율법주의로 흘렀습니다. 그럼에도 만사를 신본주의로 살폈기에 환난이 생기면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는지 따져서 회개는 했습니다. 비록 회개, 구출, 타락, 심판, 회개를 반복적으로 행했어도 최소한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 앞으로 겸비하게 돌아오긴 했습니다.

고난이 닥쳐도 회개는 않고 빨리 구출만 해달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보다 훨씬 못합니다. 예수 믿은 후에는 율법을 아예 무시합니다. 도덕적 판단이 완전히 무디어버렸습니다. 은혜가 율법을 완전히 대체하고 율법은 용도 폐기 되었다고 여깁니다. 제사법, 정결법 등의 문자적 규정만 폐지되었지 그 배후에 흐르는 하나님의 뜻은 그대로 유효합니다. 도덕법은 엄연히 신약성도도 지켜야 합니다.

작금 성경에도 없는 싸구려 복음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은 다 용납해주시고 무조건 복만 부어주신다는 이상한 신앙이 형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범사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 자신의 기준, 그것도 감정과 욕심에 비추어 매사를 판단합니다. 조금만 고달프거나 생각대로 안 풀리면 제발 내가 기도하는 대로 바꾸라고 재촉합니다. 존대어를 사용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다는 것 빼고는 신자가 주인이고 하나님은 신자의 종으로 전락했습니다.  

자신의 죄와 연결시킬 때도 철두철미한 성찰과 반성이 부족합니다. 육하원칙에 따라 구체적으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어떤 점에서 잘못이자 죄이며, 그 원인이 무엇이며, 앞으로 어떻게 고칠 것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습니다. 순수한 진정성의 바탕에서 철저하게 책임지는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개선과 성장은 전혀 실현되지 않습니다.

신자의 잘못이 전혀 없이 억울한 혹은 원인 모를 고난이 생길 수는 있습니다. 그 때도 욥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는 진실 된 고백과 함께 입술로도 하나님께 범죄 하지 않는 믿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나아가 욥은 어서 빨리 그 고난을 없애달라고 하기 보다는 고난의 원인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와 뜻을 찾고자 매달렸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는 오직 긴급구호신호 SOS 말고는 하나님과 교통할 내용이 없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겠다”고 합니다. 그분의 징계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빠져나오겠다는 의사는 추호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노가 풀리기까지는, 당신께서 계획하신 징계의 수위와 일정이 다 완료되기 전까지는 그분의 화를 당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찌어다.”라고 합니다. 비록 지금 유다가 망하고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와 있지만 절대 너희가 뛰어나고 잘나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도구로서 그분께 사용 받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패전국이요 너희는 승전국일지라도 지금 하나님의 화를 당하고 있는 것이지 너희의 조롱을 받을 우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고 너희는 그분의 영원한 진노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보지만 너희는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너희가 그분의 심판을 받고 우리는 그분에 의해서 구원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최종 승리는 우리의 것이지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어지는 구절에서 선지자는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목도하리로다.”(10절)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고대에선 전쟁에 승리하면 자기들 신이 상대의 신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 상대의 신들도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상천하지의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절대자입니다. 다른 신들은 전부 인간이 고안해낸 우상으로 신이 아닙니다. 따라서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조롱하는 꼴입니다.

선지자는 지금 인간의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영적 원리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당한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이기에 그분의 노가 풀릴 때까지 잠잠히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구해주실 것이며 현실에서 당신의 백성을 괴롭힌, 그럼으로써 하나님 당신을 조롱한 바벨론을 심판하실 것도 확신했습니다. 본문은 궁극적 승리를 아는 자,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확신하는 자만이 부를 수 있는 찬송입니다.  

단순히 바벨론을 망하게 했다고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를 본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 구출해내고 대신에 바벨론을 망하게 하는 능력이 단순히 그분의 의가 아닙니다. 능력만 보일 것 같으면 처음부터 포로로 잡혀가지 않게 했을 것입니다. 포로생활을 통해, 또 끝까지 하나님의 노를 잠잠히 당하고 있는 동안 이스라엘이 철저히 회개하고 고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세상 앞에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설 때만이 그분의 의도 함께 드러나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풀리고도 또 다시 우상숭배와 타락에 빠지면 하나님은 바벨론보다 더 큰 징계의 수단을 동원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페르샤, 헬라, 로마 제국 등이 잇달아 하나님의 징계 수단으로 동원되었지 않습니까? 그럼 미가 선지자가 잘못 부른 노래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재림 때의 궁극적 승리를 소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닥치면 가장 먼저 하나님의 징계인지 살펴야 합니다. 명시적 고의적 죄는 짓지 않았어도 내 고집, 욕심, 감정, 편견, 선입관, 이기심 등이 작용하지 않았나 따져야 합니다. 최소한 불신자처럼 내 실수, 판단착오, 불성실, 오류, 지식 부족 등이 개입하지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고 범사를 그분 중심으로 판단하지 않았음도 절실히 돌아봐야 합니다. 일을 계획할, 아니 소원할 단계에서부터 그분의 뜻을 묻지 않은 것을, 최소한 그분의 원리를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을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이젠 무조건 고난만 빨리 없애달라고 요청하는 너무나 말도 안 되는 믿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는 말씀을 잘 압니다. 정금은 불순물이 다 제거된 순금을 말합니다. 이 정금을 믿음이 더 강해졌다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치웁니다. 예컨대 고난을 일주일 금식기도로 이겨냈으니, 그 다음의 더 큰 고난은 40일 기도면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차원입니다. 새벽 제단을 백일도 쌓았는데 천일인들 하지 못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성장조차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 떼쓰는 끈기와 의지력만 늘린 것입니다.

불순물이 제거되는 순금이 되려면 고난 중에 하나님의 의를 분명히 봐야 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난 중에 도덕적 영적 성숙이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주의 율례는 주님의 계명입니다. 단순히 고난 중에 기도하면 구원해주신다는 원리를 알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난 전에도, 아니 하나님을 믿을 때부터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기도만 해왔지 않습니까? 또 그러니 고난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따로 배울 내용도 없습니다. 고난 중에는 그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 쪽에 귀책 되는 이유, 원인, 잘못, 죄악 등부터 정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신자는 고난이 끝난 후에 반드시 불신자들 앞에 하나님의 의를 자랑해야 합니다. 단순히  기도했더니 구해주더라는 것만 자랑해선 안 됩니다. 너무나 유치하고 가난한 수준입니다. 그런 자랑은 골목대장을 둔 철부지 동생이나, 조폭두목을 아버지로 둔 아들도 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의롭고 거룩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기 죄로 인해 징계로 받는 고난을 담담히 감수하는 모습부터 보여야 합니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은 신자더러 불신자들 앞에 당신의 의를 보이라고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순전히 신자를 연단하여 강건하게 하려는 하나님 특유의 뜻이 있을 수 있는데 우리에게는 원인 모를 고난으로 다가옵니다. 또 아브라함처럼 단순히 시험(test) 하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원인이 신자의 죄와 허물일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어쨌든 모든 고난을 하나님과 연결시켜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허물과 죄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던 빨리 끝내달라고 간구하기 전에 그 안에서 주의 율례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자신을 고치고 성숙해지는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나아가 다시 그런 죄와 허물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의 믿음 없음이 한심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지 않습니까? 미가 선지자처럼 불신자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영광을 가리지만 않아도 많이 부족한데도 그마저 못합니다. 고난 중에 주님의 뜻을 알아서 그에 합당하게 자신이 자라려고 시도조차 않습니다. 작금 철저한 회개나 자기 성찰은 목회자에서 일반신도까지 교회에서 찾아보기 너무 힘들어졌습니다.

궁극적 승리는 이미 확보되어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우리가 자랄 준비가 되어 있으면 하나님이 그 고난을 언젠가는 끝내주실 것이라는 믿음조차 없습니다. 배고프면, 몸이 아프면, 기분 나쁘면, 오로지 어서 빨리 해결해 달라고 울기만 하는 갓난아기 같을 뿐입니다. 그나마 아기는 엄마가 안아주면, 엄마 소리만 들려도 방긋 웃는데 우리는 우리 욕심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끝까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웃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할 때에 우거지상이 아닌 적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2/24/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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