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평생 풀리지 않는 과제

조회 수 291 추천 수 16 2011.10.28 20: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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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평생 풀리지 않는 과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34)


신앙 연륜이 아무리 오래되어도 항상 미진(未盡)하게 다가오는 숙제가 있습니다. 왜 나의 믿음은 조금만 주위 여건이 힘들어지면 불안과 염려에서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지 도대체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죄의 문제는 어지간히 이겨낸 것 같고, 또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아가 화려하고 풍요한 인생에 대한 미련이 없어진지 오래이며 주님을 위해 살려고 헌신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환난이 닥치면 한 순간에 믿음이 완전히 무장해제 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지금껏 말씀 공부하고 간절히 기도했던 열매는커녕 그런 흔적조차 별로 남아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불만은 왜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내지 못하냐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신자가 평생을 믿어도 풀지 못하는 숙제라면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정의마저 “고난에 대한 적절한 대처법”이라고 고쳐야 할 것입니다. 지금 예수 믿어 구원을 얻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들어와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믿음에 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진지하게 따져볼 여지가 있지 않습니까? 고난에 대한 대처법은 성경에 가장 자주 다루는 주제입니다.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도 바로 “염려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입니다. 누군가 세어보니 공교롭게도 365 번 나온다고 합니다. 일 년 365일이니까 평생을 두고도 환난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매일 아침 이 말씀만이라도 가장 먼저 붙드는 것이 믿음의 출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대한 의심은 전혀 혹은 거의 없습니다. 그분이 함께 하시는데도, 거기다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온갖 고난이 그치지 않으니 염려가 더 됩니다. 나아가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는 줄 알고, 또 언젠가는 해결해 주신다는 약속도 믿습니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너무 힘듭니다. 그렇다고 믿음을 진통제, 최면제, 환각제처럼 단지 고통을 잊어버리는 용도로만 활용할 수 없기에 우리의 고민은 깊어집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한 벌로 땅은 가심덤불과 엉겅퀴를 내며 인간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또 그런 피조세계의 불완전한 모습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 땅의 완전한 구속이 이뤄질 때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인생에 고난이 넘치는 것은 너무나 정상이니까 절대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 성경이 맨 처음부터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신자더러 제일 먼저 잘 믿으면 복 받으리라는 기대부터 버리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고난이 없어지지 않는 까닭이 우리 믿음이 연약한 때문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믿음의 적용을 잘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고난이 매일 닥칠 정도로 일상적인 것이라면 "나는 왜 고난만 닥치면 이렇게 믿음이 약해질까?"라고 실망 한탄하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거기다 내일이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또 다른 걱정이 틀림없이 닥칠 텐데 계속해서 믿음 없음이나 약함을 한탄하며 보낸다면 얼마나 부질없는 짓입니까?

극단적, 역설적으로 말해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내려는 시도가 오히려 잘못된 것입니다. 고난을 무시하라, 아예 현실을 외면하라, 고난이 있는데도 없는 척 하라, 세상사를 보는 관점을 바꾸라는 말이 아닙니다. 현재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벌을 받아 왜곡된 상태에서 자기중심주의에 묶여 있는 죄인들이 매사에 서로 다투기에 고난은 결코 그치지 않습니다. 신자에게도 언제 어디서나 고난은 아무 예고 없이 닥칠 수 있다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고난은 믿음과, 심지어 기도와도 무관하게 닥치기 마련임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고난에 대한 바른 신앙이자,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첫 걸음도 되는 것입니다. 한 고난을 믿음의 기도로 이겨냈다 해도 다른 환난이 곧 닥친다는 뜻입니다. 고난을 이기려는 기도를 약하게 혹은 잘못했기 때문이 전혀 아닙니다. 인생 자체가 필연적으로 고난의 바다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만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까? 지금껏 성경이 365 번이나 담대하게 당신만 바라보라고 다그치고 또 그대로 따라 했는데도 잘 되지 않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본문에서 고난에 대한 너무나 간단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장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뿐 아니라, 미리부터 일어나지 않을 일까지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오늘 일은 염려해도 되고 또 오늘 일만 염려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일을 염려해도 된다고 해서 하루 종일 걱정만 하고 있으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그날의 염려거리는 그날 중에 열심히 해결책을 찾아서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너무나 지당하고 불신자도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는 권면을 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매일 닥치는 사소한 일, 특별히 자기가 아니면 다른 이가 할 수 없는 일, 자기 도움이 꼭 필요한 일을 성실히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이 내일의 염려를 없애주려고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분문은 예수님이 6:19에서부터 시작한 재물에 대한 가르침의 결론으로 제시한 말씀입니다.  문제는 그 중간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33a)는 말씀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먼저"라는 수식어 때문에 이 문맥(19-34절)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인 양 착각하게 되었고 또 진짜 결론인 34절을 아주 소홀히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재물의 궁핍으로 대표되는 현실의 고난에 대해 염려하는 것은 아주 잘못이고 신앙은 오로지 경건과 거룩과 의에 대한 싸움으로만 인식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은 재물에 대한 가르침의 삽입구입니다. 염려 말라는 것이 그 가르침의 보완 구절로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신앙에서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은 너무나 지당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강조하는 바는 내일 일까지 염려하지 말고 오늘 염려에 그치라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문제도 재물과 연관해서 고찰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이 속한 전체 문맥이이나 산상수훈 모두에 드러난 예수님의 뜻은 물론이고 성경전체가 일관되게 가르치는 바는 염려의 내용과 세기는 자신의 진짜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주인으로 삼으면 오늘은 물론 내일 일까지 계속 염려하게 될 것입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주인일 때는 내일의 염려는 그치게 되고 오늘 일만 염려, 정확히 말해 염려보다 오늘의 고난과 문제들을 당당히 맞서 최선을 다해 해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까닭도 재물이 그 문제들을 결코 선하게 결말지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완전한 인도에 달렸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 문맥에서 신자더러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라는 뜻도 내일의 문제를 주관하는 이가 바로 하나님임을 정말로 확신하는지 스스로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의를 구하라는 것도 자꾸 염려가 생기게 만드는 그 문제들이 하나님이 단순한 통치를 넘어 그분의 “선하고 완벽한” 계획임을 진짜로 믿느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해결의 실마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 너무나 극심한 고난도 단지 믿음으로 참아만 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하고 아름다고 의로운 인도의 과정임을 믿기에 감사하느냐는 것입니다. 요컨대 어떤 고난도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임을 확신하고 그렇게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와 의가, 즉 그분의 거룩한 통치가 들풀과 공중에 나는 새에는 임할지언정 솔로몬의 지상최대의 영광에선 거의 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당신의 자녀들에 베풀어지는 당신의 거룩한 통치는 하물며 어떠할지 제발 잘 따져보라고 합니다.  

알기 쉽게 말해 역사상 최고의 부귀영화를 자랑했던 솔로몬의 통치로도 내일 일에 대한 염려는 도무지 지우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만 간절히 소망하면 내일 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한 앗시리온에 팔리는 참새 두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죽지 않는다면 신자에게 고난, 아니 죽음이 닥쳐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계획 속에 있는데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는 이가 왜 자꾸 염려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본문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의 첫째가는 뜻이 무엇입니까? 내일 일이 염려될 만큼 재물이 없어 궁핍하더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 아래 있음을 확신하기에 내일 일의 염려는 그치고 오늘 나에게 맡기신 그분의 일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내일의 염려 거리 또한 그분의 의로운 계획에 속한 것이므로 더더욱 염려할 필요가 없기에 나에게 맡겨주신 공동체와 일과 사람에 대해 주께 하듯이 섬기는 것입니다. 구태여 도덕적, 종교적, 영적으로 거룩하고 심오하고 거창한 일을 따로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 번 엄밀히 따져 보십시오. 내일의 재물의 부족에 대한 염려에 파묻혀서 봉사, 사역, 전도, 찬양한들 과연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러는 중에 어떤 선한 열매가 맺히겠습니까? 우리도 내일 일에 대한 거룩한 통치를 확신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들에게 그분의 통치를 받으라고 권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그분의 완전한 통치를 받고 있지 못한 모습인데 어떻게 내가 속한 공동체와 그 구성원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내일 일에 대한 자연스런 염려가 생기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고 또 나도 모르게 그런  염려에 묶일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겸비하게 되어서 그분의 구원과 인도를 간절히 구할 수 있으며 또 그러는 모습을 세상사람 앞에 보일 수 있습니다. 염려보다 기도하고 의지하며, 그리고 기도하고 난 후에는 고난 중에도 평강을 되찾은 모습만은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 일만 염려하라는 것이 단순하고도 지혜롭게 인생을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을 주님 안에서 새롭고도 벅찬 감격으로 맞으라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든 하나님과 자신만의 친밀하고도 아름다운 관계 속에 푹 파묻히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바깥세상에선 어떤 심한 폭풍우가 불고 있어도 하나님의 의로운 나라 안에서 그분의 완벽한 통치를 받고 있기에 나의 평강을 결코 빼앗길 수 없음을 확신하고서 말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예수님이 본문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교회에서 만들어낸 종교적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고통이 없어질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9/12/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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