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가 정말로 당신의 깃발인가?

조회 수 307 추천 수 0 2018.01.13 09:44:17

여호와가 정말로 당신의 깃발인가?

출애굽기 강해 (37)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출17:8-16)

 

기도로만 승리한 것이 아니다.

 

구약성경에는 경건하고 심오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심지어 미신과 비슷해 보이는 내용이 종종 나온다. 본문 11절에 모세가 하늘을 향해 팔을 올리면 전투에서 승리하고 내리면 패배했다는 기록도 초신자가 보기에는 그렇다. 신앙연륜이 좀 쌓인 신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승리를 주셨다고 배워왔고 또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실제 삶에선 기도한다고 다 승리하지 않으니 곤혹스러워진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열심히 기도하려는 의욕마저 꺾인다. 구약성경도 모든 세대에게 진리가 되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완전한 말씀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문에서 반드시 주목해서 살필 내용이 크게 셋을 들 수 있다.

 

첫째로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에 첫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 기도의 힘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세가 사람을 택했다.(9절) 남녀노소 이백만 명이 전쟁에 다 참여할 수 없다. 비록 전쟁 경험이 전무(全無)하고 변변한 무기조차 없지만 오랜 육체노동으로 다져진 강건한 장정들을 선발했다. 평소 담대한 믿음에 지도력도 갖춘 여호수아를 사령관으로 임명해 실제 전투를 지휘하게 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꼭대기에 올라갔다.(9절) 뱀으로 바꾸었고 열 재앙을 일으켰고 홍해를 갈랐으며 반석을 쳐서 물을 낸 그 지팡이다. 그와 동일한 하나님의 권능이 이번 전투에도 임할 것임을 상징한다.

 

모세가 하늘을 향해 손을 들 때에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의 남편으로 알려진 훌이 양쪽에서 받쳐주었다. 나이 80이 넘어서 팔에 힘이 빠지자 돌로 받쳐서 전투가 끝날 때까지 계속 손들 들고 있게 함으로써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모세를 중심으로 지도자들이 합심해서 기도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한 종 한 명으로도 당신의 역사를 얼마든지 달성할 수 있다. 출애굽도 사실상 모세 혼자 감당한 셈이다. 그러나 혼자서 당신의 일을 하다 힘들고 지치고 낙심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반드시 위로하고 동역할 특별히 기도로 후원할 자들을 붙여 주신다.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의 어떤 일도 이뤄지지 않는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태도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일사불란’이다. 힘을 합쳐서 한 마음이 되었고 각자 맡은 일에 충성했다. 바로 앞의 르비딤 반석 사건을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모세와 이스라엘이 다투었고 죽일 듯이 덤벼들었다고 했다. 지금은 정반대다. 왜 가족과 측근을 중용하느냐고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단합하도록 외부의 대적을 붙여준 것이다. 신자와 그 공동체가 평안하고 나태에 빠지면 십중팔구 쓰러지거나 또는 고난이 닥친다. 그러면 합심해서 기도해야 하고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여호와 닛시의 숨겨진 의미

 

둘째로 모세가 이 전투를 어떻게 결론을 내리는지 주목해야 한다. 여호와께 단을 쌓고 감사하며 “여호와 닛시 즉,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고 찬송했다. 그가 왜 이런 표현을 사용했는지 조금 이상하지 않는가? 모세가 기도하는 대로 승리하게 되었는데 그럼 손을 들게 하는 하나님, 혹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칭해야 더 적합하지 않는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깃발을 만들어 흔들면서 전투했기 때문인가? 지금은 광야에서 먹고 마실 것이 없어서 고생한 직후다. 아말렉이 기습적으로 침공해 와서 어쩔 수 없이 전쟁하게 되었고 깃발을 만들 여유라곤 없었다. 여호와는 이름도 없는 분이라 그 철자도 쓸 수 없는데 어떻게 특별한 상징을 만들 수 있겠는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전수받고 가나안을 향해 본격적으로 진군할 때에 전투 편대를 조직하고 지파별로 깃발도 제작했다.(민2장)

 

당시의 모든 정황상 모세가 산 위에서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이스라엘 이백만 중에 전쟁을 경험한 자는 모세가 유일하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바로의 왕자로 40년을 보냈다. 고대의 왕자는 무술을 연마시켜 전쟁에 지휘관으로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이스라엘도 가나안 땅을 차지한 후 사백년의 사사시대를 마치고 하나님께 결국 왕을 달라고 요구했던 첫째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다른 나라처럼 전쟁을 잘 치르는 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머리가 하나 더 큰 사울을 주었고 실제로 사울 왕은 블레셋에 연전연승했다. 그러니까 다윗을 쫓아다닐 여유가 있었다. 반면에 마지막 전투에 패배한 것은 다윗 쫓느라 너무 경황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세는 세계 최강 애굽 군대의 장교 출신이다. 그러니까 애굽 관원을 순식간에 죽일 수 있었고 미디안 목동들과 우물을 다투며 혼자서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특별히 이런 대규모 전쟁에서의 그의 전략과 지혜는 과장해서 말하자면 사막의 도적떼에 불과한 미디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가족과 측근을 중용했지만 그 뛰어난 전략을 듣고는 아무도 불만을 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쟁에서 했던 것처럼 산꼭대기에서 전투 진행 상왕을 훤히 뚫어보았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동시에 깃발은 아니더라도 수신호로 여호수아와 교통하며 지휘했기에 여호와는 깃발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기도가 가장 강력해도...

 

누차 강조한 대로 기도만큼 강력하며 효과적인 무기는 없다. 그럼에도 출애굽 전 과정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을 놓쳐선 안 된다.

 

애굽에서 열 재앙은 이스라엘이 살았던 고센 땅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가만히 있고 즉, 기도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다 행하셨다. 그들의 고난을 하나님이 하늘에서 관념하고 계시다가 당신의 언약의 때에 당신께서 일방적 이루셨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마라의 쓴물과 만나 사건과 르비딤 반석에선 먹고 마실 것이 없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원망했고 하나님은 야단치지 않고 순순히 다 들어주셨다. 예수 믿은 후 얼마 되지 않은 초신자 시절에는 현실 삶의 고난에 대해 기도하면 응답 받아 술술 풀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신자들의 삶을 책임지시는 분임을 확신시키는 과정이다.

 

지금 아말렉 전투는 기도를 하면서도 최선의 실력과 지혜를 동원해 실제로 전투를 수행 중이다. 혼자서만 기도하면 그대로 다 응답되지 않는 시기가 반드시 온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서로 교제 위로 권면 특별히 합심해서 기도할 과제들이 생긴다. 나아가 신자이기에 더욱 실력 신용 정직 지혜를 쌓아서 다른 이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 갓난아기 같은 이스라엘을 조금씩, 조금씩 그 믿음이 자라게끔 이끌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 하시는가? 우리의 신앙체험과 동일하게 현실의 고난과 세상 대적을 통해 믿음의 면역력을 증강시킨다.

 

그와 동시에 당신께서 하신 약속도 어김없이 성취하신다. 모세를 바로의 궁정에서 개인적으로는 정체성의 혼란과 동족과 격리된 고독한 삶을 살게 했지만 바로 이런 전투를 대비한 것이다. 그로 출애굽과 가나안 행군의 최고 적임자로 준비 훈련시켜서 세운 것이다.

 

신자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주시고, 또 하나님의 일에 동역자를 붙여 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나님의 백성들끼리 다투지 않고 하나님만 머리로 모시고 그분의 지혜를 받아 합심해서 진군하면 그 앞에 훼방하는 세력들을 얼마든지 무너뜨릴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권능에 힘입고 담대하게 세상 죄악과 흑암의 세력에 맞서면 승리는 보장되어 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모든 것을 바쳐 주님만 따라 가면 그 행군을 가로막을 존재는 결코 없다. 지금 비록 4백년 만에 처음 하는 전쟁이라 많이 두려웠겠지만 바로 옆에 처자식과 부모를 두고 행하는 전쟁이다. 죽기 살기로 덤볐을 것이다.

 

첫 상대가 왜 하필 아말렉인가?

 

마지막 세 번째로 이스라엘의 첫 전투 상대가 하필이면 아말렉 족속인가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도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마주쳐야만 했는지 살펴야 한다. 흔히들 이스라엘이 자기들 사는 땅으로 접근해오자 아말렉이 정복당할 것을 염려해 사전에 예방전쟁을 일으켰다고 해석한다. 과연 그러한지 더 깊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말렉은 어떤 족속인가?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의 후손이다.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의 첩에게서 난 아들이 아말렉이다.(창36:2)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과는 혈족이다. 알다시피 에서는 야곱에게 장자권을 빼앗겼다. 가나안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상속 받지 못했다.

 

야곱은 형의 불같은 저주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주했다. 약 20여 년간 고생한 후에 귀향할 때에 얍복 강가에서 여호와의 사자와 밤새 씨름하여 이기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그가 여호와와 밤새 씨름한 내용이 무엇인가? “이제 강을 건너면 에서가 나를 기다릴 텐데 형과는 싸울 수 없지 않습니까? 사냥꾼 출신에 전투에 능한 에서와 맞서면 패할 것도 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처음 피신할 때에 베델에서 이 땅으로 반드시 돌아오게 해주신다고 약속했지 않습니까? 제가 미리 형에게 보낸 소유의 절반에 해당하는 예물을 보고 형의 나에 대한 미움을 반드시 누그려 뜨려 주셔서 저화 화해할 수 있게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셨는가?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아예 전투가 불가능하게 했다. 혈족과는 절대 다투지 말라는 뜻이다. 또 야곱이 기도한 그대로 에서의 마음을 이미 녹여 놓았다. 쌍둥이 형제는 만나자마자 서로 끓어 안고 눈물로 화해했다.(창33:4)

 

선조들의 이 파란만장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 후손인 아말렉이 모를 리가 없다. 바꿔 말해 이스라엘이 자기들 땅을 정복할 의사가 없고 오직 관심은 가나안 땅,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임도 알았다는 뜻이다. 그럼 그냥 통과시키든지 최소한 우회시키면 되는데도 구태여 먼저 쳐들어온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출애굽 당일 밤에 애굽의 엄청난 은금 패물을 챙겨서 나왔다. 그 일은 금방 인근 족속들에게 소문이 났을 것이다. 출애굽 시에 중다한 잡족들도 따라 나왔는데 그들을 통해서도 인근에 전해졌을 것이다.

 

야곱이 거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듯이 지금 그 후손 이스라엘도 거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약 450년 전의 역사가 재현되고 있다. 에서는 야곱과 화해했으나 아말렉은 재물에 눈이 멀었다. 혈족이 400년 만에 노예 살이에서 해방되었는데 함께 축하해줘야 할 판에 그랬다. 최소한 통과세만 받고 보내주었어야 한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것이 한국 고유의 속담이 아니라 바로 이 아말렉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닐까?

 

역사는 재현되는가?

 

에서 때와 판박이 같은 역사가 재현되었지만 그 결말은 판이하다. 역사가 반복된 것 같은 이유는 인간이 죄로 타락한 양태가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 결말이 달라진 이유는 하나님은 역사를 절대로 순환시키지 않고 오직 당신의 이름을 위해 당신의 언약을 당신께서 이루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이끄는 궁극적 방향은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한 것이다. 그 한 곳의 종착점을 향해 직선적으로 인도한다. 인간은 그것이 싫어서 자꾸 우회 후퇴하거나 안 따르려고 버티니까 온갖 문제와 고난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 지점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곳을 창조 당시처럼 아름답고 진실하고 선하게 당신의 나라로 완전히 회복시키는 것이다.

 

아말렉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은 돈에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군을 훼방한다. 그 뒤에는 불신 세상들이 의식은 못해도 하나님의 이 계획을 훼방하려는 사탄의 조종 농간이 개입된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더러 애굽의 은금 패물을 갖게 한 것은 10전10승을 해서 당연한 탈취물로 밀린 임금을 일시불로 받은 셈이다. 나아가 본문의 아말렉과 전투를 하게끔 하시는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과 섭리가 그 안에 있었다.

 

중동의 광야에는 지금도 강도떼들이 출몰한다. 하나님은 출애굽 직후에 이스라엘이 전쟁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광야로 우회시켰다. 그 앞에 강력한 블레셋 군대가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었지만 본문의 아말렉처럼 사방에 이리떼가 이스라엘을 호시탐탐 노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전쟁 경험이 없고 무기도 없다. 사백년간 노예로 지낸 근성이 몸에 붙어 패배의식에 젖어 있다. 노약자 어린이 부녀자는 물론 가축까지 동행하고 있다. 그 보화들을 탈취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 먹고 마실 것이 없는 광야로 인도하셨다. 그 광야는 실제로 불모의 땅이었다. 들어가면 죽을 수밖에 없다. 애굽에서 노예로 지내면서 먹고 마실 것은 걱정 없었다. 애굽이 다 조달해주었다. 생물이 전혀 살지 못하는 광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몰아넣었다. 이런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이리떼 같은 다른 종족들이 아무리 은금 패물이 탐이 나도 자기들 목숨을 걸고 따라 들어갈 수는 없다. 애굽에서 노예로 사백년 고생시킨 것이 모든 대적의 위험에서 안전하게 보호해 창성케 만드는 하나님의 비책이었다. 지금도 광야로 이끌어 모든 대적에서 보호해주셨다.

 

정말로 들어가면 죽는 곳

 

이스라엘이 통과하는 광야는 정말로 아무 것도 없는 곳이다. 오직 하나님께 빌고 또 빌어야만 하는 환경이다. 비록 믿음이 없거나 연약해서 하나님께 원망 불평부터 나왔어도 어쨌든 자기들의 생명을 완전히 하나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지금 그들로 살고 죽음이 누구 손에 달렸는지 철저하게 교육시키고 있는 중이다. 은금 패물이 결정적인 순간에 무용지물이 될 뿐 아니라 오히려 고난과 문제를 불러오는 원인이 됨을 알게 해주려는 것이다.

 

들어가면 무조건 죽는 땅이라 이방족속들이 전혀 따라오지 않은 것이다. 그런 현실적 이유 외에 종교적 이유도 있었다. 자기들이 믿고 따르는 우상 신들은 그곳에서 아무 힘도 쓰지 못한다는 것을 자기들 스스로 알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지혜롭지 않거나 영적으로 완전히 어리석은 것도 아니다. 훨씬 영악하다. 다만 자기들 고집이 완악한 것이며 또 그래서 믿는 대상을 잘못 고른 것이다. 오직 자기 뜻대로 따르는 신을 자기들이 만든 것이다. 바꿔 말해 자기가 자신의 신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초기에 하나님께 불평 원망한 것은 사실 크게 탓할 문제가 아니다. 구름 기둥 불 기둥으로 하나님이 이끄셨다. 그 전에 홍해를 가르는 큰 기적을 베풀었지만 무슨 뜻인가? 사실은 돌아갈 수 있는 다리를 하나님이 폭파한 셈이다. 이전의 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 갈 수 있는 곳이라곤 죽음의 땅 광야뿐이다. 이런 하나님을 체험한 적이 있는가?

 

신앙생활을 신실하게 잘 하고 있고 봉사 전도에도 열심인데 사방이 막혀 도무지 출구가 없는 고난이 생기고 또 더 악화된다. 이해도 안 되고 잘못한 것이 없어서 억울하기만 하다. 신자의 잘못과 죄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밀어 넣어서 통과시키려는 필수적 과정이다.

 

그분은 하늘에서 애처로운 마음으로 관념하고 계신다. 신자의 유익을 위해서다. 아말렉 같은 대적을 언제든 싸워 이길 수 있는 실력을 쌓게 해주신다. 오직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하신다. 특별히 공동체가 합심해서 기도할 때는 절대 패배하지 않음을 체험케 해서 당신의 나라를 함께 건설하게 하신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생수

 

아말렉도 거부가 된 이스라엘이 광야로 들어갔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도무지 따라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마침 자기들 쪽으로 오고 있는데다 광야를 빠져 나오느라 완전히 탈진했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 그들로선 여호와 하나님이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고 반석에서 생수를 터트려 이스라엘을 보호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다.

 

벤허 영화를 또 예로 들겠다. 주인공 벤허는 정말 잘못 하나 한 것 없었다. 우연히 낡은 기와 하나가 땅에 떨어졌을 뿐인데 로마 총독이 낙마하게 된다. 그로 인해 살아 돌아오는 것이 기적이라는 군함의 노 젖는 노예로 끌려간다. 중도에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한 젊은 랍비 바로, 예수님이 주는 생수 한 바가지 먹고는 피곤을 모르고 강건하게 버티어 내고 인생이 역전된다.

 

지금 이스라엘은 르비딤 반석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셨다. 매일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시는 만나를 먹었다. 아말렉은 현실적으로 아주 영악했으나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몰랐다. 당신의 백성에게 어떤 권능을 베푸는지 짐작도 못했다. 그들은 여호와 닛시의 깃발을 들고 행군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래서 우리 조상이 광야에서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에서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했다. 그런데 반석이 그들을 따라다녔다고 했다. 바위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따라서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반석이 곧 예수 그리스도였다고 즉, 우리를 단 한 시도도 떠나지 않으시는 주님이라고 선언한다.(고전10:4)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우회시키면서 다른 요구는 일절 하지 않으셨다. 오직 하나만 원하셨다. 먹고 마실 것이 정말로 없는 경우라도 과연 하나님 당신만을 바랄 것인가? 네 생명과 네 믿음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정하라고 했다. 육신의 생명이 당장 죽을 것 같더라도 여호와를 따르면 영과 육이 함께 살고 너희 대적으로부터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지만 당신을 위해 죽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아말렉은 패배의식에 젖어 있는 이스라엘로 일어나 걷는 걸음마 훈련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를 아파하다 못해 혈족임에도 죽여서라도 차지하려는 아말렉과 대비해서 환도 뼈를 부러트려 절름발이로 만들어서라도 혈족과는 절대 싸우지 않는 자리에 이르게 하려는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이었다.

지금 진지하게 스스로 자문해보아야 한다. 여호와가 정말로 나의 깃발인가? 거창하게 사탄과 영적 전투하고 있는지 물을 필요까지는 없다. 돈이 주인인지 예수님이 주인인지 정말로 따져 봐야 한다. 오래 신앙 생활했는데 무시하려는 뜻이 아니다. 질문을 쉽게 바꿔보자. 사촌이 논을 사면 아직도 배가 아픈가? 진정으로 축하해주는가?

 

물론 이에 완전히 자유로울 자는 없다. 저부터도 자신이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신자에게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완전히 깨트리게 하신다. 하나님의 생명과 세상의 생명 둘 중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까지 억지로 몰아넣으신다. 주위에 붙들 것이 다 사라졌을 때에 비로소 우리를 한시도 놓치지 않고 따르시는 반석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고 그분만 붙들 수 있다. 그것이 신자의 가장 큰 은혜요 권능이기 때문이다.

 

11/26/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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