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를 간략히 설명해주십시오.

조회 수 174 추천 수 0 2018.10.13 08:06:31

삼위일체를 간략히 설명해주십시오.

 

[질문]

 

삼위일체에 대해서 어떤 목회자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별개의 인격이 아니다. 그러면 세 하나님이 된다. 성부하나님의 입 즉, 말씀이 예수님이고, 또 성부하나님이 후하고 내쉬는 숨(호흡)이 성령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성부하나님이고 예수님(성부하나님)이 자기 숨(호흡)을 신자에게 불어 주셔서 이제 우리가 그 호흡을 마시게 되니 그분이 성령님(동일한 성부하나님)으로 우리 속에 거하는 것이다.” 또 그 근거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20:22)를 들었습니다.

 

그럼 결국 예수님과 성령님은 없고 성부하나님 한분만 계신 것이니 성경 진리와는 맞지 않는 것 아닙니까? 성부 성자 성령은 각기 다른 인격이시지만 모든 걸 공유 역사하시는 한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삼위일체에 대해서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숫자놀음에 빠지지 말라.

 

삼위일체에 대해서 신자들이 또 일부 목회자들이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점은 어떻게 세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증의 초점이 셋이 하나가 될 수 있음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모아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숫자로만 따지면 어쨌든 셋은 셋이고 셋이 하나로 될 수는 없습니다. 삼위일체 변증을 셋도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데에만 집중하면 결국은 숫자놀음에 빠지고 아무리 논리적으로 잘 성명해도 결국은 뭔가 불합리한 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논리적으로 불합리하다기보다는 성경에 계시된 진리와는 상충 모순되는 측면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숫자로 하나를 만들려는데 급급해 잘못된 변증인 줄도 모르고 가장 자주 가르쳐지는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물(水)이 주로 액체로 존재하지만 온도가 아주 낮아지면 고체인 얼음으로 변화되고 또 아주 높아지면 기체인 수증기가 되지만 여전히 물질의 분자구조상 동일한 물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시대는 성부가, 예수님의 성육신 동안에는 성자로, 승천 이후는 성령으로 이 땅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아주 잘못된 설명입니다. 상황에 따라 물의 겉모양만 바뀌었을 뿐이지 숫자는 여전히 하나인 물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는 동안에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분명히 세 분 하나님이 동시에 따로 존재했었고 또 세 분이 함께 계획, 상의, 합력하여서 이 땅을 다스렸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를 드신 목사님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별개의 인격이 아니다. 그러면 세 하나님이 된다.”는 설명은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세 분의 본질과 속성과 권능에서 전혀 불일치가 없이 동일하면서도 세 위격(person)이 있다는 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항상 어디서나 한 분이라고 하면 물의 변증처럼 장소와 시간에 따라 인간에게 나타나는 양태(樣態)만 다를 뿐이라는 오류(Modalism)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은 오순절에 임했다.

 

“성부하나님의 입 즉, 말씀이 예수님이고, 또 성부하나님이 후하고 내쉬는 숨(호흡)이 성령이다.” 그 목사님은 성부에게서 말씀인 성자가 나오고 성령도 성부(혹은 성자)에게서 나온다고 설명했습니다. 성자와 성령이 따로 존재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강변하려다보니 또 다른 오류를 범했습니다.

 

이 설명의 잘못에 대해 여러 논의가 가능하지만 가장 큰 오류는 성자나 성령이 어쨌든 성부의 피조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던 성부에게서 나오면 우선 능력에서 뒤처지고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성자가 피조물이라면 피조물이 같은 피조물인 인간 구원을 위한 완전한 대속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2) 성경은 맨 서두에서부터 성령이 태초에도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선언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신약성경의 영적 창세기라고 할 수 있는 요한복음 1장도 태초에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이 성부와 함께 계셨다고 선언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세 분 하나님이 태초부터 공존(共存)하셨다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말씀’과 ‘신’이 성부의 피조물이라는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성자와 성령이 성부로부터 유출(유출)되어 나온 것이라는 언급도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성자와 성령을 성부가 창조했다는 또는 성부에게서 유출된 것이라는 의미가 있으면 비성경적입니다. 말하자면 삼위 사이에 어떤 방식으로든 극히 일부분이라도 우열, 종속, 지배, 상하 등의 관계가 형성된다면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20:22)는 말씀은 삼위일체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성경의 올바른 해석과 적용은 반드시 당시의 상황과 앞뒤 문맥에서부터 찾아내야 합니다. 당시 그 현장에서 성령이 예수님에게서 나와서 제자들에게 임재 내주하게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며 제자들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바로 앞의 절과 이어지는 설명과 연결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23절)

 

주님이 이 땅에 구원의 복음을 실현하러 왔듯이 제자들도 앞으로 그런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그 일을 잘 감당하도록 선교에 필요한 성령의 권능을 장차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복음의 전파가 인간의 능력 지혜 말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승천 직전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고 약속하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실제로 성령이 제자들에게 강림 임재 내주한 것은 알다시피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였습니다.

 

삼위일체는 예수님이 제정한 교리

 

삼위일체는 인간 이성만으로는 아무리 깊이 살펴보려 한들 한 점 의심이나 이해부족 없이 명료하게 깨달아지지는 않습니다. 천국에 가서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맞대면하여야만 온전히 이해될 것입니다. 현재 이 땅에 있는 신자가 삼위일체에 대해 취할 가장 좋은, 아니 유일한 태도는 성경이 말하는바 그대로 순전히 믿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반드시 성경이 영원하고도 절대적이고 유일한 진리임을 믿는데서 출발 유지 성숙되어야만 합니다. 특별히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관해선 성경만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종교나 관련서적에도 이와 비슷한 신관(神觀)은 아예 없습니다. 삼위일체를 성경이 말하는 바를 넘어설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교회사적으로도 이 주제에 관해 비성경적인 의견을 제시하면 모두가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그들의 설명이 비논리적 비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더 납득 동의하기 쉬워서 많은 추종자를 모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의 주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기독교 신앙상의 모든 문제와 교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과 연결시켜서 해석 적용 실천되어져야만 합니다. 삼위일체도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와 경륜에만 비추어 해석되어져야 하고 또 그러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선 성경은 삼위일체는 바로 예수님이 확정한 교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 부활하여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당부합니다.

 

성경에서 ‘이름’이라고 할 때는 어떤 존재의 전인격성을 대변하는 것인데다 성부 성자 성령을 동격으로 열거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어떤 면에서도 단 한치도 다르지 않다고 예수님이 선언했습니다. 이 땅에서 사역할 당시에도 그런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10:28-30) 예수님은 당신과 성부 하나님이 하나라고 선언합니다. 또 당신께서 영생을 준다고 즉, 구원을 베푼다고 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제자들이 스승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만 한다고 하니까 실망에 빠지자 주님이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는 성령입니다. 또 다르다는 뜻은 완전히 틀린(different) 것이 아니고, 같은 종류 중에서 단순히 다른(another) 것입니다. 성자와 성령은 모든 면에서 똑 같다는 것입니다.

 

실망한 제자들에게 스승을 대신해서 스승이 지상에서 했던 사역을 똑같이 행하실 성령이 온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성령이 예수와 우열 지배 상하 종속의 관계가 되어선 안 됩니다. 위격만 다르지만 똑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천국 보좌로 올라가시고 성령은 이 땅의 모든 민족에게 보편적 포괄적 적극적으로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부와 당신을 하나라고 했고, 이제 성령과도 똑같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주님이 삼위일체 교리를 제정한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면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으로 당연히 이단이 됩니다. 또 삼위의 본질 속성 권능에서 차이가 생기는 방식으로 진술하는 것도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확정했기에 사실상 이것 이상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할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구분

 

그래서 바울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라고 성삼위의 이름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축복의 기도를 했습니다.

 

이 구절이 오늘날 예배 후 축도에 인용되기에 기독교의 전통적인 예배 혹은 기도의 양식인 줄 예사로 여기고 치웁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진술입니다. 성경의 핵심 교리이자 이단 여부를 가름하는 기준인 삼위일체가 예배에 참석한 사람 모두에게 계시 실현되길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는 또 그래서 삼위일체를 조금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됩니다.

 

사도는 각 삼위가 성도들에게 주시는 복을 성자는 은혜, 성부는 사랑, 성령은 교통하심이라고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권능에선 동일하나 성도들에게 역사하는 측면이 각기 다르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성경의 한 가지 주제인 예수 십자가의 구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한 영단번의 제물로 바쳐짐으로써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모든 죄인의 형벌이 벗겨졌습니다. 그 보혈의 공로를 믿는 자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해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서 영생을 주십니다. 은혜는 도무지 받을 수 있는 자격과 조건이 안 되는데도 공짜로 주는 선물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구원에서 신자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런 십자가 대속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죄는 죽기까지 저주하지만 죄인을 죽일 수 없어서 당신의 독생자로 그 죽음의 죄 값을 치르게 하여서 죄인을 살리신 것입니다. 골고다 십자가는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은혜의 합작품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인간이 원죄 하에 묶인 자연인의 상태에선 즉, 하나님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죄 중에 그분과 원수 된 위치에선, 스스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예수님은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한다고 답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12:3) 바울 사도도 성령의 간섭이 없이는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은커녕 그분을 성자 하나님이라고 시인도 못한다고 합니다.

 

성령은 한 죄인으로 하여금 성부가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지 또 그래서 성자가 자기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음의 형벌을 감당한 구원의 은혜를 알게 해주는 역할 즉, 신자 안에서 교통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성령이 없으면 골고다 십자가는 그냥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실에 그칩니다. 한 죄인이 회심하는 역사 즉, 십자가 구원이 한 개인에게 실체화되려면 성령의 간섭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구원은 성삼위 하나님의 합력 사역으로만 이뤄집니다. 신자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믿음을 가지는 것 자체가 성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교통하심의 일체화 된 역사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역으로 말해 골고다 십자가 구원을 이루려면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신자가 예수 믿어 구원 받았다는 확신이 있다면 신학적으로 구체적으로 정리 설명은 못해도 이미 삼위일체 교리를 믿은 것입니다. 또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그분 뜻대로 순종 헌신하기 위해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다면 삼위일체 교리를 신앙생활에 실제로 적용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일신 신앙이 삼위일체 신앙으로

 

주목할 것은 삼위일체 교리를 신약성서에 진술한 사도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철두철미 여호와 창조주 유일신 사상으로 무장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를 신성을 모독하는 참람(僭濫) 죄를 범하는 이단으로 간주했습니다. 알다시피 그래서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박멸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바로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대일 인격적으로 대면했습니다. 삼일 간 봉사가 되었다가 다시 시력을 찾는 체험을 통해 완전히 옛 자아가 깨어지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자신의 몸으로 직접 겪었으며 그 과정에서 예수가 성자 하나님임을 절감했고 그 모든 과정이 성령의 역사였음도 확신했습니다. 바울은 절대적 유일신 옹호자에서 적극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도자로 바뀐 것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6-18)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구원을 얻어 함께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 십자가 대속의 공로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성경의 진술이 진리가 되려면 삼위일체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아니 삼위일체 하나님이기에 십자가 구원이라는 유일한 생명의 길이 가능한 것입니다. 정말로 성령의 간섭으로 바울처럼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체험이 있다면 삼위일체 교리는 순전하게 이해됩니다.

 

“나의 나된 것이 예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만약 신자가 자신의 순전한 진심으로 바울처럼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삼위일체를 이미 알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구태여 다른 이에게 말로 설명해서 설득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실력도 없습니다. 삼위일체는 체험적인 신앙고백이지 논리적 교리로 접근해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이자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령의 간섭으로 회심한 체험이 없는 자에게는 바울, 어거스틴, 칼빈이 와서 설명해주어도 모릅니다. 반면에 정말 중생한 자라면 구태여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미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에 붙잡혀 살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0/12/2018

 

(첨언): 삼위일체 교리를 초월과 내재의 하나님으로 구분해서 신학적으로 잘 설명한 책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패서디나 풀러 신학교의 김세윤 박사가 저작한 “요한복음강해”(두란노 아케데미 2001년 발간)의 후반부입니다. 그분의 다른 저작들에서도 동일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참조하시라고 그분의 삼위일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아래에 인용했습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한 분 하나님, 그 초월자가 초월을 유지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육신하여 스스로를 계시하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었으며, 지금도 계속 그의 영을 통하여 이 세상에 계시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와 구원이 효력을 발생하게 하신다.” (37쇄판 19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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