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17:1-8) 인간 고집에 대한 하나님 고집의 완벽한 승리 

구약성경강해 (36) / 민수기강해 (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 중에서 각 종족을 따라 지팡이 하나씩 취하되 곧 그들의 종족대로 그 모든 족장에게서 지팡이 열 둘을 취하고 그 사람들의 이름을 각각 그 지팡이에 쓰되 레위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라 이는 그들의 종족의 각 두령이 지팡이 하나씩 있어야 할 것임이니라 그 지팡이를 회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를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매 그 족장들이 각기 종족대로 지팡이 하나씩 그에게 주었으니 그 지팡이 합이 열 둘이라 그 중에 아론의 지팡이가 있었더라 모세가 그 지팡이들을 증거의 장막 안 여호와 앞에 두었더라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민17:1-8)

 

이스라엘을 너무 못 믿는 하나님

 

고라 일당이 모세와 아론에게 반역을 시도한 것은 여호와에 대한 신탁을 바꾸어서 광야를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내린 형벌을 거역하겠다는 것은 하나님 그분을 완전히 무시한 것입니다. 불로 소멸되고 산 채로 매장당하고 염병으로 죽은 심판dl 오히려 가벼울 정도의 큰 죄였습니다. 

 

본문은 다시 한 번 아론이 당신께서 택하여 세운 종임을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분명한 증거로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모세에게 열두 지파 족장들의 지팡이에 각 족장의 이름을 써서 회막 안 언약궤 앞에 두라고 명했습니다. 하루 만에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까지 열렸습니다.(8절) 그 싹 난 지팡이를 언약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라고 명령했습니다.(10절) 아론의 대제사장직을 하나님 당신께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 족장들에게 공식적으로 재확인시켰습니다. . 

 

고라당의 반역을 하나님은 우리가 봐도 끔찍한 벌로 이미 세 번이나 심판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스라엘이 두 번 다시는 아론의 직분에 대해 군말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꼭 이렇게까지 번거로운 절차를 또 행해야만 했는지 조금 의아해집니다. 반역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모세와 아론은 아무 요구도 하지 않았는데 당신께서 그들의 입장을 살려주었습니다. 솔직히 당신의 종들은 너무 사랑하고 백성들은 너무 못 믿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길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두 가지 이유를 스스로 밝히셨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자손이 아론에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5절)고 했습니다. 둘째로 “패역한 자에게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찌니라”(10절)고 말합니다. 아론에게 원망하는 것을 패역의 죄라고 했고 그런 죄는 바로 죽음으로 다스린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럼 오늘날 하나님이 세운 종이라고 할 수 있는 목사에게 신자들이 원망하면 죽음의 벌까지는 아니라도 패역한 죄가 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아론과 오늘날의 목사가 위치하는 신분이 대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본문과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들자면 모세와 아론은 정말로 하나님에게 직통 계시를 받아서 그대로 대변했습니다. 그들의 말이 바로 하나님의 말이었습니다. 죄에 찌든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면 그 자리에서 소멸됩니다. 이스라엘이 아론에게 원망하면 하나님을 대면한 데다 대놓고 대들었으니 두 번 소멸되어 마땅한 죄입니다. 

 

오늘날에는 확정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이미 따로 마련되었습니다. 목사는 그것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가르칠 뿐입니다. 목사가 잘못하면 신자들은 얼마든지 원망하고 따질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오늘날 목사에 해당되는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딤전5:19)라고 했으니 심지어 목사가 잘못하면 고발까지 해도 됩니다. 

 

이처럼 본문은 오늘날의 신자와 목사의 관계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아론에게 원망한 것이 사실상 하나님에게 더 패역한 죄였다는 점은 여전히 간과해선 안 됩니다. 또 그런 하나님께 패역이라는 차원에선 오히려 오늘날의 신자에게 더 엄격하게 적용해야 할 내용을 본문이 담고 있습니다. 

 

패역 하는 죄의 실체?

 

이스라엘이 패역했다고 해서 항상 하나님의 반대편에만 서서 그분이 시키는 일에 무조건 거역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차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잊은 것도 아니며,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가 세운 종인 줄 모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지금 자기들에게 내린 형벌의 내용도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내가 봐도 내 믿음이 초라하고 한심해도 그런 정도로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어제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오늘에 까마득하게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방금  제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권능을 잊을 리가 없다고 말해 놓고 그와 정반대로 말을 바꾼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큰 권능”은 잊지 않았지만 “어제 받은 은혜는 잊었다”고 말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언어유희를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어제의 일은 어제의 일이고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어제에는 어제의 일에 합당한 은혜를 받았고 그 점을 결코 잊지는 않았으나 오늘의 일은 자기들 보기에는 어제와 전혀 다르고 더 크고 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새롭고도 더 큰 은혜가 시급히  필요하니까 당장 내어놓으라고 고집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두 번이나 그랬던 사례를 이미 배웠습니다. 

 

가데스 바네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악평한 열 명의 정탐꾼들이 죽음의 형벌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광야를 사십 년간 방황하라는 형벌 받고 밤새 크게 슬퍼했습니다.(민14:39) 울면서 나름대로 회개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로 다음날 가나안을 치러 올라가 대패를 당했습니다. 

 

밤새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기들이 가나안 땅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어겨서 이런 벌을 받았으니 곧바로 다시 진군하면 하나님이 벌을 취소하고 도와주시겠지라고 섣부른 판단을 내렸습니다. 오늘은 상황이 바뀌었으니 하나님에게 오늘에 필요한 새로운 은혜를 다시 내려 달라는 요구였습니다. 

 

고라당 반역의 주역들이 불로 소멸되고 땅에 생매장 되는 그 끔찍한 벌로 심판을 받았을 때는 너무 경황이 없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저녁에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니 모세가 여호와께 그렇게 해달라고 신탁했다는 사실이 기억났고 다음날 바로 모세에게 네가 백성들을 죽였다고 대들었습니다. 여호와는 그럴 마음이 없었는데 네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에게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오늘 새롭게 감안해주시고 모세와 아론에게도 오늘 새로운 조치를 해달라는 간접적인 요구였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믿음은 지금 당장 여기서의 풍요 아니면 평안을 주시던지, 고난 아니 불편한 것은 도무지 못 견디겠으니 그것만이라도 신속히 없애달라는 데에만 모든 초점이 모입니다. 하나님더러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지금 당장 내 코가 석자인 것부터 반드시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도 오늘 일 해결하느라 자꾸만 뒷전으로 미루다가 아예 잊어버리는 지경까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해서 지금에 이르도록 우리가 보기에도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완악하게 거역해왔습니다. 그 이유는 어제는 어제이고 오늘은 오늘이라는 바로 이 생각 때문이라는 것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들의 지능이 낮았거나 기억력이 나빴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현실 상황에 대해선 너무나 영악하게 잘 파악하여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까지 잘 분별했습니다. 단 하나의 문제는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배풀었던 은혜들에 대해서만은 영적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입니다. 

 

대신에 지금 여기서의 평안만 보장해준다면 때로 목숨을 걸고 전쟁을 치르는 시늉도 얼마든지 감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걸고 순종하겠다고 피의 제사로 엄숙하고 경건하게 맹세도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때에 눈물로 감격하며 찬송 기도하며 헌신 순종하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이나 오늘의 우리나 그러는 중에도 조금만 고통스러우면 아니 불편하면 왜 당장 벗어나게 해주지 않느냐고 아우성칩니다. 믿음이 지향하는 바는 지금 여기서 자신과 자기 가족의 풍요와 평한 하나뿐입니다. 그것이 그들과 우리의 믿음의 처음이요 끝이자  전부입니다. 

 

이스라엘에겐 여호와라는 이름과 율법과 종교적 의식을 빼고는 이방인들의 믿음과 하나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도 불신자더러 지금 당장의 풍요와 평안만 추구하는 자라고 지적 비난하면서 그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으니 기독교라는 종교적 허울만 덮어쓴 것뿐입니다. 

 

신자가 평생을 두고 행할 일

 

예수님은 모든 율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계명에 다 포함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2:40)  모든 율법이 그것으로 함축된다는 것은 바꿔 말해 신자가 평생토록 행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새벽마다 드리는 기도의 모든 제목들을 정말로 솔직히 구체적인 문장으로 리스트를 만들어 보면 그 중에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것 빼고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과연 이웃을 위한 기도를 얼마나 하고 있습니까?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주님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당신의 백성들의 모든 필요를 다 아십니다. 들꽃과 나는 새도 당신께서 먹이시듯이 그런 일용할 필요에 대해선 아무 염려말고 신자는 자신이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분야에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임해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먼저 구해야 합니다. 당연히 아니 이웃에게 먼저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임하도록 간절히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놀랍게도 구약성경에선 예수님보다 한 발 앞선 요구까지 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며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내 백성이 악한 길을 떠나서 스스로 겸비하여 당신의 얼굴을 찾으면 죄를 사해주고 이 땅을 고쳐줄 것이라 약속했다고 말했습니다.(대하7:14) 성전에선 죄로 타락한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달라는 기도만 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워준 소명에 충성 헌신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연약해 불신 세상을 위해서 아니 이웃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최대한 양보해서 내 죄를 사해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해달라는 기도는 얼마나 하고 있습니까? 지금 당장 내 문제만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죄나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우리에게 이스라엘을 패역하다고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매번 거역하는 완악함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우리 또한 하나님께 패역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분명히 받았음에도 순종하지 않고 있으니 그 이유와 상황이 어떠하든 대놓고 그분을 거역한 셈이지 않습니까? 거기다 모든 실제로 처해있는 상황은 이스라엘이 오히려 더 심각하고 고달팠던 것 아닙니까?

 

어쨌든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어제와는 색다른 고달픔이 아무리 사소해도 오늘 내 눈앞에 보이기만 하면 그저 안절부절 하기는 똑같습니다. 어제로 하나님 은혜는 완전히 끝났습니다.  오늘은 새로운 은혜가 아주 많이 있어야만 할 것 같은데 아직 그런 기미가 안 보이니까 자꾸 불안해집니다. 단 하루 만에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런 판국에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믿겠습니까? 당신의 약속과 계명들을 다짐시키고 또 다짐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으로선 이미 했던 말을 또 해야 하는 너무나 번거로운 절차입니다. 신자들더러는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 하지 않아도 다 알고 계시는 분인데 막상 당신은  입이 아플 정도로 모세를 통해 백성들에게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고집

 

출애굽 이후에 지금껏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과 상황을 보면 하나님 쪽에서 오히려 더 끈질기고 포기하지 않는 고집이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비교해서, 아니 비교도 안 될만큼 훨씬 더 강하지 않습니까? 

 

지금 또 다시 아론의 직분을 증명해주면서 그 싹 난 지팡이를 패역한 자의 표징으로 삼으라고  선언했습니다.표징이라고 했으니 앞으로도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패역할 것이라는 사실이 전제된 것입니다. 또 증거궤 앞에 간직하라고 명한 것은 당신께[선 절대로 당신이 그들과 맺은 제사장 나라의 언약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성실하게 지켜나가시겠다는 뜻입니다. 

 

아론은 출애굽 후에 시내 산에서 모세가 처음 율법을 수여 받을 때에 이미 대제사장으로 지명되었고 그 아들들도 성소의 직분을 받았습니다.(출28장) 이스라엘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모세가 자리를 비웠을 때에 금송아지를 만들 면서 아론더러 자기들을 지휘해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출32장) 

 

그런데 아론의 두 아들들이 여호와가 명하지 않은 불로 분향을 하다 언약궤를 모셔 놓은 지성소에서 불이 나와 즉사하는 벌을 받았습니다.(레10장)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언약 뿐 아니라 당신께서 그들에게 수여하신 율법을 당신께선 철저하게 지키셨던 것입니다. 제사장들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 민수기17장에선 언약궤라고 하지 않고 계속해서 증거궤라고 칭하는 데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본문의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셋을 보관토록 했습니다. 당신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셨고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보호 인도하셨다는 증거를 담은 것입니다. 당신께선 언제 어디서나 그들에게 꼭 필요한 은혜를 하나 빠짐없이 다 베풀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론의 직분을 다시 확인시켰다고 해서 그 개인의 체면을 세워준 것이 아닙니다. 아론은 얼마 안 되어 발람 사건 이전에 광야 방황 중에 죽었습니다.(민20장). 지팡이에 아론의 이름을 적은 것은 레위 지파를 대표하는 뜻이었을 뿐입니다.(3절) 열두 지파 중에서 제사장으로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또 여호와는 열두 종족의 주장에게 지팡이 하나씩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 또한 하나님이 택하고 세운 종이긴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그 신분과 특권에선 동일한데 그 중에 레위 지파에게 성막 봉사와 제사의 직분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신 뜻은 하나님은 구별된 레위인이 성막에서 드리는 속죄, 감사, 봉헌, 헌신 등의  제사를 통해서만 즉,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과 관계를 아름답고 거룩하게 유지하게 하는 방식으로만 그들을  다스리시겠다는 반복된 다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민수기 18장에서 다시 제사장에 대한 규례를 입이 아프도록 선언한 것입니다.

 

표징이 되게 하라.

.

하나님이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들이 겪은 어제의 상황은 오늘과 분명히 달랐고 그래서 내가 베풀었던 은혜도 달랐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상황에서 오늘 내가 베푸려는 은혜도 분명히 어제와 다를 것이다. 내일의 상황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 될 것이며 따라서 전혀 경험해보지 못하는 새로운 은혜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있고 무엇을 요구할지도 다 안다. 단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라도 반드시 이 싹난 지팡이를 기억하라.“

 

왜 그 지팡이를 기억해야 합니까? 표징이니까 이미 있었던 사건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단 하루 만에 어제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는 잘못만큼은 앞으로는 절대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지금 당장 여기서의 평안만 구하는 그 생각 단 하나만은 제발 버리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그 생각대로 다 해주면 너희 생각에는 지금 당장은 너희에게 편하게 여겨질지 몰라도 사실은 영원한 실패 아니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뜻입니다. 

 

현재만 고집하는 것은 미래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미래를 너희가 주관할 수 는 결코 없으며 너희가 계획 추측은커녕 상상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만사의 미래는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먼 미래를 볼 수 있고 모든 상황을 종합적으로 완전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 모든 것을 당신의 완벽하신 계획에 따라 주관하고 조성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그 계획과 뜻을 인간이 처한 상황과 그에 대한 반응과는 전혀 무관하게 당신만의 고집으로 묵묵히 수행하십니다. 

 

그러니까 인간 신자가 느끼기에는 그분이 침묵하다 못해 부재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맺어지는 열매로만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증명하실 뿐입니다. 그 생생한 예와 표징이 바로 증거궤와 특별히 본문의 아론의 싹난 지팡이입니다. 

 

인간끼리 서로 믿는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한두 번 신뢰를 깰만한 잘못이나 실수를 범해도 그 결과로 내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끝까지 느긋하게 기다려 주는 것 아닙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처음부터 상대를 믿어줄 생각은 아예 없고 과연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테스트만 한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신자들이 하나님을 바로 그런 식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 믿습니다 큰소리치면서, 아니 눈물 콧물 흘려가며 감격하며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지금 당장 구해내라고 떼만 쓰고는 그분이 과연 어떻게 하실지 전혀 기다려 주지 못합니다. 위급한 일이 생기면 기도했다가 잠잠해지면 아무 것도 하지 않다가 다시 고난이 닥치면 안절부절 못하는 일만 계속 되풀이 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평생에 걸쳐서 계속 테스트만 하려는 것 아닙니까? 누구나 알고 있는 하나님의 큰 권능만 붙든 것입니다. 대신에 어제 받았던 그분의 은혜를 까마득하게 잊고서 오늘은 새롭고 큰 은혜를 당장 내놓으라고 떼만 씁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  

 

겉으로 드러난 허물과 약점이 여럿 있음에도 어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그 속내가 정말로 진실되고 최소한 배반하지는 않는다는 점 하나만은 정확히 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짜 속내를 모르면 느긋이 기다려 주지 못하고 또 느긋이 기다려주지 못하면 사실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로 실패 시키지는, 최대한 양보해서 절대로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순종과 무관하게 당신의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요나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는 지금 광야를 방황하는 이스라엘보다도 더 완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악한 도성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계시를 직통으로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악한 자들이 하나님이 구원해주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서 당시의 땅끝인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 

 

땅끝이란 이방족속들만 사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부재한 곳에 가서 사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다고 대놓고 거역했습니다. 거꾸로 따지면 하나님이 니느웨를 당장 심판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뜻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명령한 셈입니다. 소멸을 당해도 여러번 당해 마땅합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요나의 고집과는 비교도 안되는 하나님의 고집의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요나는 정말로 자기가 죽더라도 그 불합리해 보이고 말도 안 되며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과 자기에게 닥친 상황을 거부하려 했습니다. 실제로 태풍이 몰아치는 거센 파도에  몸을 던졌으나 하나님은 기어이 살리셨습니다. 요나가 이젠 하나님을 피해 도망갈 수는 절대 없으니 마음이 내키지 않음에도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회개하라고 선포했는데도 하나님은 그 사악한 니느웨를 단 하루 만에 금식하며 회개하도록 했습니다. 

 

그분의 크신 능력에만 감탄해선 안 됩니다. 지금 당장에 이 죄많은 온 세상을 회개케도 할 수 있고 반대로 전부 멸망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속내를 정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아니 신자라면 누구나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제사장 나라의 소임을 다하라는 것 하나뿐입니다. 신자더러 그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신자와 연관되는 모든 사건과 상황과 사람들을 당신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요나서만큼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오늘의 주제대로 표현하자면 죄송하지만 그분의 막무가내 식의 끈질긴 고집을 보여주는 책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끈질긴 고집이야말로 신자에겐 가장 큰 은혜가 됩니다. 그 고집이 바로 그분의 진짜 속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겨우 하루 만에 시들어버릴 호박 넝쿨만 붙들고서 그 열매를 따먹으려고 집착하고 그러지 못할 것 같으면 안절부절하고 신자임에도 하나님께 떼쓰기 바쁩니다. 아니 아예 등을 지고 거역하면서 원망하기 바쁩니다. 그것이 신자의 진짜 속내로 새벽기도마다 나와 내 주변만 지금 당장 풍성하게 해달라고 부르짖는 기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내는 당신의 택한 백성에게 온갖 사악하고 잔혹한 만행을 저지른 사탄의 자식들인 니느웨마저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회개하기를 오래 참으시면서 그와 동시에  당신의 종 한 사람을 통해서라도 회개케 만드시는 너무나 끈질긴 고집이 그분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그분만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너무나 신실하시고 완전하시고 영원하시고 변함이 없으십니다. 당신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고야 맙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게 하셔서 세상 앞에 소금과 빛으로 세울 것입니다. 우리더러 그분의 거룩을 드러낼 때에 세상으로 당신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영원까지 그분의 단 한치도 변함없는 당신만의 고집입니다.

 

그럼 신자가 행할 일도 딱 하나로 정해집니다. 그분의  그런 고집에 자신을 맞춰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을 넘어서 정말로 머리가 둔한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속담처럼 기다리는 것은 처참한 실패뿐입니다. 

 

지금 당장 나와 내 가족만의 평안을 구하는 것은 영적 치매를 넘어서 영적 시체라고 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해도 안 되는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구해야 합니다. 다시 입이 아프도록 강조하지만 우리 모두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평생 신자가 행해야 할 일을 다 가르쳐주었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의 어렵고 고달픈 형편을 하나님은 잘 아십니다. 어제와 다른 오늘만의 은혜가 필요한 것도 다 아시고 부어주려 준비하고 있습니다. 단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를 그분은 기다리고 계실뿐입니다. 최소한 그분만의 고집이 나를 통해서 이뤄지길 느긋이 기다릴 줄 알게 되는 믿음의 단계까지만이라도 이르길 그분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 주십니다. 

 

신자가 평생 행해야 할 이웃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이 결코 귀찮거나 고달프거나 뒤로 미룰 일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실천하면 그분의 은혜를 넘치고도 넘치게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길 외에는 주님이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므로 그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8/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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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왜 다윗에게 성전건축을 금지했나요? master 2018-07-10 59
114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master 2018-07-10 308
113 하나님의 뒷모습이라도 보는가? master 2018-07-10 282
112 하나님을 친구로 삼는 방법 master 2018-07-10 30
111 병 주고 약 주는 하나님 master 2018-07-10 25
110 십자가 목걸이를 걸지 말라. master 2018-06-07 243
109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는 하나님 master 2018-06-07 34
108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과 상충되지 않나요? master 2018-04-21 26
107 하느님과 하나님의 차이. master 2018-04-21 1320
106 여호와가 정말로 당신의 깃발인가? master 2018-01-13 307
105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첫째 이유 master 2017-11-3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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