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사람과 육의 사람

조회 수 1453 추천 수 126 2005.07.11 22:36:51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행 3:6)

노숙자들 중엔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으나 대개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불구인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내 머리 속엔 베드로의 이 말이 떠오른다. 나 또한 그들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또는 멀쩡해져라라고 명하고 싶은 맘이 간절하다. 그런데도 번번이 그러지 못하고 속으로 저들을 위해 기도만 하고 지나치는 까닭은 자신이 없어서이다.

사실 언젠가 겉으로는 말 못하고 속으로 그렇게 명해 본 적이 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래서 혼자 쑥스럽고 또 속으로 그러기 다행이다 싶었던 경험이 있다. 드러내어 그렇게 말했는데 아무 일도 없으면 정신병자 취급받지 않으면 놀린다고 한 대 맞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내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내놓고 그렇게 말했더라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을 지도 모른다는 의구심과 후회가 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런 기회가 올 때마다 여전히 속으로만 중얼거릴 뿐이다. 의심과 체면 때문이다.

오늘 출근 길 차 속에서 느닷없이 또 그 말이 떠올랐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그리고는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곧 그 사람의 발과 발목이 힘을 얻어 벌떡 일어서더니 걷고 깡충거리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베드로의 마음 속엔 추호의 의심도 주저함도 없었다.

무엇이 다른가? 베드로와 나의 차이가 무엇인가? (내가 감히 스스로를 베드로와 비교한다 하여 뜨아해 하겠지만, 아다시피 오순절 성령을 받기 전까지의 베드로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엇이 다르기에 그의 마음 속에는 조금의 의심도 들지 않았던 것일까?

당시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후였고, 그로써 그가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그를 따르던 많은 무리들의 마음 속에서 지워졌을 것이며, 부활의 소문은 그의 제자들이나 사실로 믿을 뿐 많은 사람들에겐 예수가 메시야라는 소문보다 더 황당무계한 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조롱과 경멸 아니면 기껏해야 동정이나 반신반의 정도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가 아마도 평생을 성전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해 온 앉은뱅이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한 것이다. 그가 예수를 또는 예수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그가 예수를 대단히 여긴 것같지는 않다. 그랬더라면, 예수가 살아 있을 때에 예수에게 고침받기를 구했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당시 베드로가 처한 상황이 오늘 내가 처한 상황보다 못하면 못했지 더 나을 것이 없다. 그럼에도 그가 그토록 당당하게 추호의 의심없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말할 수 있었고 나는 그러지 못하는 그 차이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 . .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 . .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행 3:11,12,16; 4:10)

베드로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걷게 된 것은 자신의 권능과 경건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그를 걷게 하고자 하는 그 마음조차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의 마음이라는 것을. 베드로가 추호의 의심이나 주저함없이 당당하게 명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 속에 자신의 이름, 즉 자신의 체면이나 사욕은 전혀 없었고 있는 것은 오직 예수와 예수 이름에 대한 믿음 뿐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예수와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의 지상명령 외의 다른 생각은 일체 배제된 듯하다. 베드로는 오순절 이후 철두철미 성령의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몸과 그 성격만 베드로였지 그 내용은 완전히 예수로 바뀌어 있었다고 보아진다.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내 속에는 아직도 내가 시퍼렇게 살아서 예수 이름에 대한 믿음보다 내 체면이 망가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지 않은가? 나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누군가를 치유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를 만나 거듭난 지 몇 년이 지났으면서도 아직 난  성령의 사람이 되지 못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난 아직도 많이 세상적인 사람인 것이다. 아, 난 언제나 성령의 사람이 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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