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1-5)
자고로 아무 죄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 그것도 하나님을 잘 믿는 신실한 신자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왜 미리 막아주지 않고 그런 자마저 죽도록 허용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유대인 두어 명도 비슷한 질문을 예수님에게 던졌습니다. 예수님은 예를 든 두 경우 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남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당하지 않은 자의 죄가 더 많거나 같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똑 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질문자에게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아니라”라고 반문하면서 부정하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두 번이나 사용하였습니다. “저렇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니 평소에 죄를 많이 지었나보다”라는 선입관을 갖고 질문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질문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에서 나온 잘못된 질문이라고 지적한 셈입니다.
그럼 “신실한 신자는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우리가 평소 갖고 있는 의아심은 어떻습니까? 그 표현만 반대지 내용은 본문의 질문자와 동일한 선입관이기에 잘못된 질문이지 않습니까? 나아가 죄 많은 자는 언제든 불행을 당해도 마땅하며 나는 그런 자와는 다르다는 영적인 놀부 심보마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만약 오늘 날의 신자가 예수님에게 그런 생각을 말하면 틀림없이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죄가 덜 있는 줄 아느냐? 아니라”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죽은 자나 살은 자나 동일한 죄인이라고 말씀 해 놓고 너희도 회개치 않으면 같은 경우를 겪게 된다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죄를 지은 정도는 대동소이한데 회개를 안 했기에 죽었고 살은 자는 회개를 했기에 죽이지 않았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물론 그 말씀의 일차적인 뜻은 모든 사람이 자기 죄를 회개하는 일에만 관심을 쏟아야지 남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따져보아선 안 되며 그럴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 남이 그런 억울한 불행을 겪으면 피해자를 안타까이 여기고 위로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죄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촉구한 내용은 개별적인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하나 반성하라는 것보다는 근본적인 삶의 태도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사는 자답게 삶에서 거룩한 열매를 구체적으로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비유를 통한 부연 설명에서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9절)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 모두가 동일한 죄인이라면 하나님의 우선적 관심은 당연히 어떤 사람의 전인격적인 변화에 있지 특정한 범죄의 경중에 따라 반드시 상벌을 내려야겠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설령 하나님이 어떤 개별적 범죄에 대응해 상벌을 내리신다 해도 그 배경에는 당사자와 그 상벌을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의 전인격적인 변화를 시키겠다는 의도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본문의 예처럼 당사자가 죽어도 그 사건을 바라보는 자들이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에 대해서 제대로 깨달을 수 있게 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성경적 표현으로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은혜 혹은 징계를 내리십니다.
따라서 이런 예기치 않은 불행을 바라보는 신자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태풍 지진 같은 자연적인 재앙이나 사람들의 잘못으로 일어나는 재난에는 신자 불신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따로 있을 때에 간절히 기도하면 불신자는 전혀 맛볼 수 없는 특별한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때로는 신자에게 기적적인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렇다면 그 역을 따지면 당신의 특별한 목적이 있을 때에는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회개치 않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특별한 벌을 내리기도 한다는 뜻이 됩니다. 본문에 예를 든 두 경우에 예수님은 다른 이보다 죄가 더 많은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따지면 회개치 않은 자들임도 분명합니다. 어떤 특정한 범죄를 반성하지 않은 것을 떠나, (실제로 세상 어느 누구도 자기 지은 죄 전부를 일일이 회개할 수는 없기에), 평소 삶의 자세와 가치관이 하나님 중심으로 되어 있지 않은 자들이었다는 뜻입니다.
먼저 빌라도가 성전에서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었다는 표현은 성경학자들은 로마에 항거한 과격한 사람들이 성전에서 예배를 보다 살해당한 일로 추측합니다. 그 일만 두고 볼 때는 아무 죄가 없는 자들을 비록 타민족의 종교이지만 성전 안에서 무참히 살해한 로마 폭정의 하수인 빌라도 총독의 전적인 잘못입니다.
빌라도는 하나님을 전혀 알지도 경배하지도 않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니 타 종교의 신을 조금이라도 두려워했다면 그런 일을 감히 저지를 수 없습니다. 이처럼 불신자 즉 사단의 자식이 저지른 횡포에 의인 혹은 무고한 자들이 희생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항거하는 열성당원들이 비록 성전에서 예배를 보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시도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단지 자기들 계획에 힘만 보태어 주는 해결사로 경배했습니다. 하나님으로선 빌라도나 열성당원이나 동일한 관점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인간적 계획을, 그것도 성전에서 열심히 예배드리며 끝까지 고집하는 불신앙을 불신자로 하여금 벌을 주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원칙이 두렵고 떨리지 않습니까? 성전에 나와 하나님의 뜻은 겸비하게 묻지 않고 로마를 왜 하루 빨리 무찔러주지 않느냐고 떼만 쓰니까 오히려 로마 사람에게 성전에서 벌을 받게 했습니다. 가데스 바네야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들 생명만 부지하려고 차라리 광야에서 죽겠다고 아우성을 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은 자기 입에서 나온 말 그대로 처벌하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구태여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진 사건을 예로 든 이유도 따져보면 앞의 예와 동일한 맥락입니다. 빌라도가 성전고에서 불법으로 탈취한 자금으로 건축한 수로(水路)의 일부분인 망대가 무너지는 바람에 그 일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이 죽었습니다.
이 또한 빌라도의 전적인 잘못입니다. 공공사업이므로 얼마든지 로마 제국의 예산으로 공사할 수 있었을 것인데도 틀림없이 그 돈은 자기가 착복하고 그로선 가장 만만해 보이는 돈을 빼앗아 공사비로 전용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으므로 성전에 모인 돈은 유대 종교 당국이 사람들을 선동해 손쉽게 모아들인 불로소득처럼 여겨진 것입니다. 다른 데서 돈을 모아들이려면 아무리 총독이라도 무리한 수단을 동원해야 하지만 성전고는 말 한마디로 빼앗을 수 있고 또 시민들에게 직접 피해가 가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선 윤리적 측면의 잘못도 크지만 당신의 권위에 도전한 것을 그냥 버려둘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인간이 도적질 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성전고에 손을 대는 순간 번개를 치든지 손이 말려들어가는 방식으로 그에게 직접 벌주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 불의의 삯으로 공사하는 일에 종사한 유대인들, 말하자면 하나님을 아는 자들을 벌주었거나 혹은 그런 재난을 허용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당시로서도 빌라도가 하나님의 돈을 도적질해서 공사를 벌린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면 그 공사에 참여해선 안 됩니다. 물론인부들 중에는 로마제국에 감히 항거할 수 없는 정말 무고하고 연약한 시민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공사에 동원된 인부가 열여덟 명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죽은 자들은 그 공사에 돈만 벌 욕심으로 가장 먼저 자원했던 자들이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런 자들만 따로 모아서 벌을 주실 수 있는 분이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 그 가운데도 신실한 신자가 있었다고 칩시다. 그런 자는 천국의 면류관을 예비 해 놓으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신자가 꼭 깨달아야 할 사항은 하나님은 당신의 권위가 손상이 되면 반드시 세상 사람은 몰라도 신실한 신자가 깨달을 수 있는 방식으로 그 권위를 회복하신다는 것입니다. 두 사건 다 당신의 거룩한 전에서 유대인 로마인 막론하고 교만하게 배교한 것이 발단이 되었지 않습니까? 평소 때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라야 감히 성전에서 그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런 자를 그냥 가만히 놓아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죄악 된 행위 자체는 당장에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 행동 한 두 개 뜯어 고치기보다는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시길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오래 기다리시며 때로는 강권적으로 역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로 가만히 있는 것은 참고 기다려 주시지만 하나님을 알면서도 고의로 배반하거나 아예 당신의 권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는 자들은 결코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결단코 용서 받지 못합니다.
우리 눈에 억울해 보이는 죽음이라도 예수님 말씀대로 회개치 않아서 하나님의 벌을 받은 경우는 많을 것입니다. 그 배경의 구체적인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벌을 받고 되살아난 당사자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억울해 보이는 죽음일수록 그 되어진 과정에 신묘한 측면이 있으며 또 사람으로, 특별히 신자로 하여금 당신에 대해 사고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신자가 확고하게 붙들어야 할 진리는 그분은 당신의 공의를 굽게 행하시는 법은 절대로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 당신을 진정으로 경배하는 신자에게 내리는 벌은 오직 사랑에 바탕을 두고 신자의 유익과 당신의 영광을 위한 일시적 조치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죽음으로 내 몰아도 여전히 당신에게는, 아니 신자에게도 일시적 조치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에게는 영생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신자는 어떤 자세로 이 땅에서 살아야 합니까? 간단합니다. 자기에게는 더 이상 억울한 죽음, 환난, 고통, 상처란 있을 수 없다는 진리를 확신하고 또 그 확신에 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대신에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행동과 말과 생각의 중심에 항상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지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죄가 더 많고 더 적고의 구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얼마나 더 경배하고 찬양하며 순종했는지, 덜 했는지의 구분은 분명히 있습니다. 요컨대 회개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의 구분입니다.
1/24/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