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한국교계에선 1907년에 있었던 평양의 대부흥을 다시 한 번 맛보기를 소원합니다. 그 백주년이 되는 올해 각종 행사를 준비하고 있으며 또 부흥을 일으킬 여러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신앙상의 모든 과제에 대한 해답은 오직 성경에서만 찾아야 합니다. 모든 상황에 대한 구체적 해답이 다 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원리는 분명히 찾을 수 있습니다.
오순절 날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의 불이 내리고 명절을 지키러 천하각국에서 모인 수많은 유대인들을 상대로 열린 전도 집회만한 부흥은 기독교 역사상 없을 것입니다. 그 방에 모인 약 120명의 제자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고 베드로의 설교 한 번으로 그날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여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요컨대 성령이 충만하게 임재 하여 강력하게 역사할 때에 부흥은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따져보아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성령의 충만한 임재와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게 할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물론 오순절의 경우는 예수님이 직접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 전무후무한 강력한 역사가 일어난 것은 틀림없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획을 긋는 일로 하나님이 이미 계획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와 유사한 역사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능치 못할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신자들이 모인 곳에 항상 그런 부흥이 일어나기를 당신께서 먼저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신자들이 부흥을 받고 감당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초대교회 신자들과는 다른 모습이라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우리와 어떻게 달랐습니까? 우리도 부흥을 바라며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함께 모여서 뜨겁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전혀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 그들의 믿음이 우리보다 견고한 것입니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을 꿰뚫고 있고 이미 성령을 받아 성령의 전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성령을 받기 전이지 않습니까?
당시의 그들의 입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특별히 그들이 어떤 기도를 했을 것 같습니까? 성령을 보내 달라, 능력을 덧입혀달라고만 했겠습니까? 아무리 봐도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이 무엇인지 어떻게 올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성령을 기다리라고 했지 성령 받기 위해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이제 주님이 십자가 달리기 전의 그들과는 달라졌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끝까지 따를 헌신과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당부를 지키고 말 그대로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동시에 성령을 빨리 보내달라고, 자기들을 성령 받기에 적합한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알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락방에서 며칠이나 모여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가장 관심을 가졌고 열심히 기도했던 일은 승천하신 예수님에 관한 내용일 것입니다. 그분을 그리워하며 생전의 일들을 기억해 내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십자가에 달려야 할 자들이 바로 자신들인데도 스승이 대신 달리셨던 그 의미를 이제는 좀 깨닫게 되어 서로 회개하는 고백들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자기들 세대 중에 다시 오신다고 했으니 그 때는 정말 잘 섬겨야지 다짐도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다시 오시는 보혜사가 주님 당신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마저 했을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주로 십자가 사건을 회상한 것입니다. 스승을 다시 볼 수 없을까 하는 갈급한 마음과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즉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 철저하게 깨닫는 가난한 심령으로만 가득 찬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에서 자기들을 구원해 주실 이는 오직 예수님뿐임을 공통적으로 고백하고 함께 회개했을 것입니다.
또 실제로 성령이 임할 당시는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성령이 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는 당부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회상하며 사뭇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성령이 홀연히 그러나 역사상 가장 강력하게 임재한 것입니다.
그럼 부흥이 되는,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드러났습니다. 단순히 성령의 역사가 있게 해달라고 뜨겁게 기도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모인 자들이 전부 자기 죄를 철저하게 통회 자복하며 십자가 보혈로 그 죄를 씻어주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절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단순히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 병이 낫고 방언이 터지기만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뜻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성령이 하시는 근본 역할이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하고(고전12:3)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는(요16:8) 것이지 않습니까? 나아가 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공존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고 또 인간 스스로는 씻을 수 없으므로 예수님의 보혈에만 의지하겠다는 갈급함이 있어야 성령이 임재할 것 아닙니까? 평양 대부흥도 단순히 죄를 회개함으로써 시작된 것이지 큰 행사나 부흥을 강구하는 방법을 통해 일어난 것이 결코 아니었지 않습니까?
나아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자들은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 그대로 따르겠다고 헌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자신을 전부 내어드렸습니다. 세상을 향한 미련과 욕심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예수님이 하셨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죄인의 심령을 깨끗케 해서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일이었지 않습니까?
영적 부흥(Spiritual Revival)은 말 그대로 다시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부흥은 오순절과는 달리 성령이 소멸되어 없어졌거나 아직 오지 않아서 새롭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이미 모두 성령의 전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떠나버린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지 않을 뿐입니다. 역사는 성령이 일으키는 것이지 신자가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임재가 약해진 원인들만 제거하면 자연히 성령이 충만해지고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는 법입니다.
신자에게 성령 임재가 약해진 원인은 세 가지뿐입니다. 우선 심령이 죄와 세상을 향한 미련으로 가득 차 있거나 더렵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죄와 욕심을 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갈급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일인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할 소원과 헌신보다는 세상과 사람 앞에 자기의 의를 드러내려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참 복음을 전하지 않고 종교적 업적을 쌓으려거나 일신상의 안락과 풍요를 위해 복만 받으려고 믿음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영적 부흥은 아무리 위대한 사역자들이라도 절대로 사람이 일으킬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되는 곳에서만 당신께서 일으키십니다. 죄를 회개하면 회개하는 그만큼, 세상의 정욕과 미련을 버리면 버리는 그만큼, 십자가를 갈망하면 갈망하는 그만큼,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면 헌신하는 그만큼만 부흥이 일어납니다.
따로 행사를 할 또 어떻게 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가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미 성경에 해답이 나와 있고 목회자들도 그 해답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 행사나 온갖 세미나를 갖는 것 자체가 바로 세상 앞에 자기 의를 드러내며 종교적 업적을 쌓으려는 인간적인 일이 아닐까요? 오히려 부흥이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부흥은 모든 자가, 특별히 사역자부터 십자가 앞에 철저하게 가난하고 낮아진 심령으로 눈물 흘리며 되돌아오면 됩니다. 강대상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담대하게 선포하면 됩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모두 버리고 오직 예수님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 보혈로 씻어 주께 헌신하는 일은 따로 모아 행사로 치를 일이 아니라 목회자를 포함한 모든 성도 개개인이 매일 매 순간마다 해야 하는 일 아닙니까? 말하자면 평양 대부흥 백 주년이라고 해서 금년에 부흥이 다시 일어난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입니다. 죄의 회개 없는 부흥은 결코 참된 부흥이 아닙니다.
2/9/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