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71:14-18)
현세대의 문화는 젊고 활기찬 것을 무조건 선으로 여깁니다. 늙음은 자연히 거추장스럽고 추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젊어지려 합니다. 필립 얀시는 그런 풍조를 두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사후 생명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에겐 당연한 이상(理想)이다. 젊음은 불확실한 미래를 지연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불신자의 경우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기에 늙음은 자기 존재의 완전 소멸로 가는 과정이 됩니다. 늙음을 죽어라고 거부하는 것은 이 땅에서 자기를 어떡하든 더 오래 존재시키려는 몸부림입니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기에 필연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되며 물질로만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삼으려 듭니다.
그들은 또 오직 자기 능력에만 의존하는 삶을 삽니다. 자기 외는 어떤 것도, 심지어 부모와 형제, 매일 살을 맞대고 사는 배우자조차 믿지 못합니다. 그러니 자기 육신의 젊음은 자기 능력의 건재함을, 늙음은 그 능력의 상실을 의미하게 되며 늙어가는 미래는 자신의 안전과 쾌락 또한 당연히 함께 줄어들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나이든 여자 신자가 갈수록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시들해지고 이전 같은 감격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집사람이 모든 신체적 조건이 갑자기 저하되는 갱년기 여성 모두에게 일시적으로 따르는 현상이라고 조언해주었습니다. 본인도 똑 같은 체험을 했는데 열심히 운동하고 영양제를 먹고 신체 리듬을 조금 회복했더니 영성도 다시 살아나더라는 것입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은 신자에게도 분명 성립합니다. 물론 그 반대, 즉 모든 병이 마음에서 온다고 하듯이 정신이 건강해지면 건강도 잘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의 경우 이 땅이 전부이므로 늙음을 극도로 거부합니다. 말하자면 육체와 정신 둘 다 함께 건강하게 유지하려는 데에만 인생의 전 목표를 겁니다.
신자는 다릅니다. 육신의 죽음은 인간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그 존재하는 방식만 바뀌는 것에 불과합니다. 또 그 인생을 자기 힘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자연히 늙음에 대한 인식이 달라집니다. 늙음을 죽어라고 거부할 필요도, 늙음이 능력의 상실도 아닙니다. 미래는 불확실하지 않고 오히려 너무나 확실한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육신과 영혼 둘 다 붙들 수 없게 될 때에는 정작 영혼을 더 건강하게 붙들려 합니다. 노화(老化)는 불신자에게는 너무나 불필요한 악이지만 신자에게는 오히려 성장하면서 인생을 더 선하고 아름답게 꾸며가는 과정입니다. 심지어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는 기회도 되어 더욱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소설가 티 에스 엘리웃은 “나이 든 사람은 탐험가가 되어야 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말년을 빈둥거리며 보내는 것은 우리 인생을 최고로 바꿀 수 있는 기간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훔치는 셈입니다.
본 시편은 “노인의 기도”인데 그 기자가 지금 무엇을 기도하고 있습니까? 병에 안 걸려 건강하게 해주고, 자식에게 부담을 안 줄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있도록 해주며, 죽을 때까지 치매에 걸리지 않고 또 거동에 불편이 없을 때에 큰 고통 없이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자식들이 출세하여 번듯하게 자리 잡도록 해주며 그래서 자주 자기를 찾아오는 효성스런 자녀가 되어달라고도 전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소망을 품고, 더욱 주를 찬송하고, 종일 아니 백수가 되어도 주를 전하겠으니 하나님께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영원한 생명을 준 신자를 버릴 리도, 기자 또한 그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할 리는 없습니다. 그는 아무리 육신이 늙더라도 주를 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사그라지지 않고 또 잘 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늙어 가면 현장 지도자로서의 역할은 끝납니다. 또 현실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일도 종료됩니다. 말하자면 이 땅에서의 자신이 감당했던 한 세대를 마감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자기 말년을 안락하고도 남에게 부담되지 않도록 깨끗하게 정리하라는 뜻만이 아닙니다.
신자는 반드시 다음 세대를 하나님께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면서 인생을 마감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이삭의 하나님으로, 이삭의 여호와가 야곱의 여호와가 되게 해야 합니다. 모든 신자는 다가오는 세대에게 믿음이라는 귀중한 유산을 남겨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빨리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고 늙어 죽을 때까지 머물게 하신 목적입니다.
퀘이크 교도들은 노년기를 두고 “Soul-making(영혼 만들기)”을 할 수 있는 시기라고 말합니다. 육신적 능력이 떨어져 사회 활동을 할 시간이 줄면 반대로 혼자 있게 되는 시간이 늘게 됩니다. 불신자는 그 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보내는 것에만 목표를 두지만 신자는 하나님을 더 묵상하는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비슷하게 닮아갈 수 있는 시기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젊었을 때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미처 모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노인은 젊은이보다 하나님과 씨름하며 보낸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자연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인간의 실패와 하나님이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생생한 체험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일한 실패를 겪고 있는 젊은이에게 경고와 위로기 되게 전해야 합니다. 요한 웨슬레는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내 영혼을 주신 뿐께로 다시 돌려드리도록 부름을 받는 순간까지 젊은이들을 만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거동이 불편해 젊은이들을 만날 수 없는 순간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 때는 젊은이들을 붙들고 기도라도 할 수 있습니다. 세대차가 커서 서로 사고방식이 다른데 어떻게 젊은이들에게 전도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나이 들어 죽음을 앞둔 노인에게는 다른 모든 사람이 자기보다 젊은 자가 됩니다. 이 땅에 남아 있는 모든 자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만이 영원한 멸망 대신에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유일한 길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불신자에게 노년기는 모든 것을 정리하는 시기일 뿐이지만 신자는 오히려 더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신자가 해야 할 일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주위에 증거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거리가 멀어질수록 하나님과의 사이가 더 가까워지기에 노년기만큼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증거 하기에 적합한 시기가 없습니다.
혹시 연로한 교인이라면 어떤 은퇴계획을 마련하고 있습니까? 생명보험과 은퇴연금을 적립하고 있습니까?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운동하여 젊음을 유지하려 애를 씁니까? 늘그막에도 할 수 있는 적당한 취미활동을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습니까? 물론 신자도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대신 세상 힘에 의지한다고 보험과 연금을 경원시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가장 확실한 은퇴 계획은 “신자에게 은퇴란 절대 없다”는 것을 먼저 확실히 해두는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기에 따로 정리할 것이 없으며 오히려 백수(白壽)가 될 때까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구태여 따로 준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젊어서부터 해오던 일을 계속해서 하면 그만입니다.
젊어서부터 해 오던 일을 늙어서도 계속한다는 것은 전 인생의 목표를 오직 하나로 정했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살아도 죽어도 하나님에게 얼마나 더 가까이 가느냐 만을 인생 목표로 삼는 자인데 나이가 든다고 그 목표가 바뀔 수는 없지 않습니까? 목표를 이루는 방법만 달라질 뿐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그분을 증거 하고자 하는 소망과 열정과 능력은 더 생기게 됩니다. 또 어떻게 증거 해야 할지도 그분께서 다 인도하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신자가 자신의 소명을 접고 세속적 은퇴 계획을 세우는 순간 불신자와 동일하게 염려와 불편만 당장 앞섭니다. 반면에 주님을 백수가 될 때까지, 즉 죽을 때까지 증거 하겠다고 소원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영혼을 강건하게 붙들어 주시지 않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2/6/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