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1:4,5)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14:16) 예수님이 “또 다른”이라고 한 의미는 전혀 이질적인(different 예: 사과와 배) 것이 아니라 동일하지만 개체만 다르다는(another 예: 여러 사과 중의 하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과 똑 같되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 대신에 영으로 오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제 부활하여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한 그 성령을 기다리라고 당부합니다.
그런데 당시 제자들로선 무턱대고 기다리자니 참으로 갑갑했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란 무엇인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지, 와서 하는 일(기본적인 설명은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실감을 못하므로)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날의 신자는 성경 기록을 통해 모든 전후 경과와 그 의미까지 알지만 막상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은 과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는 뿔뿔이 도망갔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여러 번 만났고 또 승천하는 영광스런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어도 이제는 스승의 말씀대로 따를 각오와 믿음만은 확실히 생겼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성령이 오시는 시기와 방식을 말해주지 않았던 이유는 이야기해주어 봐야 제자들이 어떤 대비를 할 수도 없고 또 미리 알게 되면 회피하려는 자도 분명 나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전혀 알지 못해도 미래에 대한 온전한 기대와 믿음이 있다면 간절히 기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성령은 그 역사를 실제 체험해본 자만이 그 권능을 제대로 알고 따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은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마28:19) 일을 성령 받기 전까지는 절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전한 후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하는데 제자들이 아버지와 아들은 이제 알게 되었지만 성령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성령이 임하여야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오직 성령의 권능에만 의지하고 그 인도를 받아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의 권능과 그 인도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무식한 어부였던 베드로가 오순절 절기를 지키러 천하각국에서 모인 수많은 유대 군중 앞에서 거침없이 복음을 전할만큼 담대해진 것입니까? 그리고 어떤 가혹한 핍박에도 생명을 걸고서도 전혀 굴복하지 않았던 것입니까?
기본적으로 맞습니다. 그런 담대함이 초대교회에선 더더욱 필요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영원한 진리로서 모든 세대에 동일한 의미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성령의 권능이 신자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어떤 핍박에도 견디게 하는 힘이 전부라고 하면, 오늘날 미국 같이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된 나라에서 아주 적극적이고 웅변술이 뛰어난 자에게는 그 권능이 없어도 된다는 이상한 뜻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따라서 성령의 권능을 좀 더 본질적인 면에서 따져 보아야 합니다. 성령 받기 전에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신자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는 능력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담대하게 전한다는 측면이 복음에 관해서 만은 두려움과 거침이 없다는 일반적인 의미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생전 못 보던 낯선 이방 민족에게도 전해야 하니까 담대함은 당연히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모든 족속의 더 근본적인 의미는 복음을 전해 받는 자에게 어떤 제한도 두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남자와 여자 같은 성(性), 자유자나 노예 같은 신분, 부자나 거지같은 사회적 지위, 유식자나 무식자 같은 지식, 늙은이나 어린이 같은 연령, 등 어떤 차별도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전하는 자들부터도 그런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 무식한 자나 유식한 자나, 여자나 남자나, 자유자나 노예나 전하는 자의 신분과 위치로 인해 복음이 전파되는 데에 장애가 나타나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외적 능력으로 따지면 많이 배운 지성인이나 경건한 종교인이, 최소한 담력이 큰 자가 복음을 잘 전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전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역으로 따져도 성령의 권능이 담대해지는 것만이 아니라는 결론에 쉽게 이르지 않습니까?)
전하는 자나, 전함을 받는 자 공히 어떤 차별도 없어야 함은 복음의 근본 성격 때문입니다. 모든 세대의 세상 모든 족속에게 기쁜 소식이라 복음입니다. 복음이 필요치 않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지성인이나 귀족이라고 해서 복음이 적게 필요하고 무식하고 비천한 자라고 해서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모두가 죄인이며 그것도 점수로 따져 우월이 전혀 없습니다. 복음 이전의 모든 인간은 본질상 똑 같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만약 사람마다 죄 사함의 정도가 각기 다르다면, 즉 어떤 자는 십자가 죽음이 필요 없을 만큼 죄인이 아니고 어떤 자는 죽어도 수십 번 죽어야 할 극악한 죄인이라고 하면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은 아무 효과가 없어집니다. 하나님 기준에 인간은 모두가 똑 같은 죄인이었기에 십자가로 영단번(永單番, once-for-all)의 용서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죄인이라고 깨닫는 데에 특별한 지성과 지위와 신분과 계급이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세상의 외적 조건들은 인간의 죄를 가감시키고 위장하는 데에만 소용되지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데는 하등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자신의 실체를 깨닫는 일은 성령이 없이는 전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권능은 한 마디로 죄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자기를 대신해 죽으셨기에 죄 사함을 받아 그분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케 만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근본 목적도 죄인을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해 죄 사함을 받도록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죄 사함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영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다른 말로 성령의 권능은 복음을 전하는 자부터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이며 십자가 공로 없이는 단 한 치의 소망도 없었음을 철두철미하게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하고 안타까운 존재인지 절감토록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열정과 소망으로 가득 채워주는 것입니다.
전도의 현장에는 또 다른 보혜사, 역으로 따져 예수님이 공생애 때와 똑 같은 심정을 안고 함께 와 계십니다.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에 눌려 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시고 때로는 불같이 분노하셨던 그 심정을 갖고 성령이 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으로만 알 수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바로 그런 심정을 품게 해서 전도의 현장에 임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권능입니다.
신자들에게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천하의 모든 족속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하고 세상의 모든 외적조건을 뛰어 넘으라는 것입니다. 불완전하고 연약한 인간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만이, 그것도 모든 죄인들을 너무나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만이 그럴 수 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불을 받아 방언을 하게 된 것 자체가 성령의 권능이 아닙니다. 천하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 모두가 너무나 불쌍한 죄인으로 보이게 된 것이 그 권능의 본질입니다. 성령의 인도도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예수가 없다면 당장에 십자가를 전하고 싶은 소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계시를 받아 아프리카로 날라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데는 특별한 기교나 지식이 구태여 필요치 않습니다. 담대하지 못해 사람들에게 선뜻 말을 잘 건네지 못하거나, 논리적이지 않아 체계적으로 교리를 전하지 못하는 것이 성령의 권능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기질과 성격 탓입니다. 또 그런 것을 바꾸려는 데에 성령의 권능이 동원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진실로 자신의 구주로 모신 자는 이미 성령의 권능을 충만하게 소유하고 있습니다.
전도란 한 마디로 나도 죽을 죄인이고 너도 죽을 죄인이라는 것을 서로가 온전히 실감하는 작업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없이는 나도 너무 불쌍하고 너도 너무 불쌍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자들 앞에 예수 있는 자로만 서 있으면 됩니다. 정말 남들보다 하나 나을 것 없는 겸손한 자가 되어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진정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라 다른 사람의 영이 어떠한지 아무 말을 안 해도 저절로 깨닫습니다. 상대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는 어린이나 노인이나 자유자나 노예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유익과 보상을 바라고 잘해주거나 인간적 친분으로 좋아하는 것과 신자가 자기라는 존재 전부를 두고 안타까이 여기는 사랑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무리 신자라도 자신의 본래 모습만으로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와 있기에 그분의 권능으로만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고 또 실제로 실천하게 만드는 것이 성령의 참 권능입니다. 다른 말로 한 죄인의 영혼을 진정으로 안타까이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하는 전도는 전도가 아니라 단지 교세 확장 작업일 뿐입니다. 심하게 말해 교회에 나중에 분란을 일으킬 자를 교인들이 나서서 끌어들이는 일입니다.
초대 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수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고 온갖 이적들이 일어났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맹수의 밥이 되어 산 채로 물려 죽어도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큰 권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까? 단순히 담력이 커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영혼을 서로 사랑하는, 정말 내 몸같이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너무나 단순했습니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마땅히 죽어야 하는 천하의 죄인이다. 그런 나를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신 죽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었다. 이제는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해서 살고 이 큰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죽을 때까지 땅 끝까지 가서라도 그 사랑을 전하겠다.” 이런 믿음을 갖고 전하는 데에 지성, 신분, 지위 같은 것들은 아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담대하지 못해서 성령의 권능을 아직 간구하고 있습니까? 그보다는 예수 없는 사람을 보면 눈물이 납니까? 아니 최소한 가슴이 답답해지기라도 합니까? 그럼 이미 성령의 권능을 넘치도록 충분히 받은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자신을 통해 나타나 상대의 마음 문이 열리고 복음을 자연스레 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잠시라도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럼 어느 순간엔가 오순절 날의 베드로처럼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2/7/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