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눅19:5-7)
토끼는 매우 소심하고 겁이 많은 동물입니다. 매일 아침에 기거하는 땅굴에서 나와서 하루 종일 풀을 뜯어 먹고는 저녁에 그 굴로 돌아갑니다. 낮 동안에는 오직 동료 토끼를 빼고는 작은 동물을 만나도 무조건 피하고 도망갑니다. 아마 저녁에 집에 돌아가선 틀림없이 “휴! 오늘도 무사하게 마쳤군.”이라고 한숨을 쉴지 모릅니다.
토끼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오직 큰 일만 안 일어나는 것일 것이며 또 그러기 위해 동료 토끼 말고는 아예 상종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미국 목사가 교인들끼리만 교제하면서 삶의 골치 아프거나 귀찮은 일을 피하려드는 신자를 두고 “Rabbit-hole Christian(토끼구멍신자)”이라고 별명을 붙였습니다.
가까운 신자들과만 교제하는 것이 인간관계의 전부이다시피 한 신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와 또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어찌 상관하며”(고후6:15)라는 성경 말씀을 듭니다.
이는 성경 말씀을 곡해한 것입니다. 아무리 죄에 찌든 불신자라도 악 자체는 아닙니다. 악은 사단이 이 세상을 조종하는 음흉하고도 가공할 세력이자 그 힘이 만들어낸 온갖 결과입니다. 신자도 자주 그 힘에 넘어가기 때문에 일단 그 힘을 이길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멀리하는 것입니다. 악은 멀리해야 하지만 불신자까지 멀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화될 수 없기 때문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끼리는 상관(相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삶의 목적과 방식이 상충되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함께 계획하고 도모하지 말라는 뜻이지 상종(相從)조차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사람과)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5:10) 성경은 음행, 탐심, 토색, 심지어 우상 숭배하는 자들도 교제 대상에 포함시켰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과 사귀지 않으려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실은 하나님과도 제대로 교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잘 교제하기 위해 성도들끼리 거의 매일이다시피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 보는 데도 그러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정작 교제해야 할 하나님은 멀리 해놓고 동료 성도들과만 교제했거나 엉뚱한 하나님과 교제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누구와 교제했습니까? 세리장이자 부자인 삭개오였습니다. 뭇사람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자였습니다. 로마 당국의 앞잡이가 되어서 동족의 돈을 수탈하는 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세리장이며 부자라는 입장 때문에 대놓고는 말을 못해도 뒤에서 경멸하는 자였습니다. 요즈음으로 치면 신자의 모임에는 절대로 끼이지 못하거나 신자가 상종도 하지 않아야 할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 쪽에서 먼저 그와 교제하기를 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세상에서 소외 받아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자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을 몸소 보이시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돈, 권력, 가문, 학벌, 외모, 정의, 도덕, 등등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이 인간을 대우함에 있어서 차별 요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세상이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분은 더 큰 사랑으로 다가가십니다.
그러나 모든 소외된 자를 하나님이 다 그렇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당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힘없는 일반 대중으로부터 예수님은 오히려 피해 다니셨습니다. 심지어 나드 향을 팔아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선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그것도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해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뒤에서 손가락질 할지 몰라도 세리장이자 부자라면 그 동네에선 명사입니다. 또 키가 작아 많은 사람들이 앞을 가렸다 해도 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그로선 체면과 위신에 아주 손상이 가는 일입니다. 키가 작아서 오히려 모양새가 더 부끄러웠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것에 개념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뵙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삭개오가 보인 열심과 정성이 가상해서 예수님이 교제해 주셨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소문을 익히 듣고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한 번 보기만 원했지 그분이 자기 집에 들어와 유숙하며 교제해 주리라고는 사실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의 이름까지 알아서 불렀고 또 교제하자고 요청했습니다. 한 죄인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으면 반드시 주님은 찾아와서 만나 주십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그런 갈급함을 심어준 이가 바로 예수님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 사람과는 달리 자기를 전혀 차별하지 않고 진정한 사랑으로 교제하기를 청하자 삭개오도 그에 걸 맞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본을 보였습니다. 그의 구제를 받을 가난한 자와 토색한 것을 변상 받을 자들 가운데 자기를 뒤에서 손가락질 하지 않았던 자가 없었을 텐데도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흉악한 죄에 빠져서 썩어가는 자라도 교제하기를 원해서 먼저 찾아주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바로 그 이유입니다. 단 자신이 죄에 빠져 있다는 것을 자인하고 그 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있는 자에게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선 그 허물로 완전히 따돌림을 당했을지라도 세상에 없는 온전한 사랑으로 교제해주십니다. 주님과 그런 교제를 맛본 자라면 자연히 자기도 그런 자를, 최소한 이전의 자기 처지와 비슷한 자를 찾아가서 교제하고 싶어집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처음 예수님을 찾을 때도 죄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성령이 심어주었듯이, 다른 자에게 그 사랑을 전하고 싶다는 열정과 소원 또한 성령이 심어주십니다. 예수님을 직접 모시고 3년간이나 배움을 받았던 제자들도 성령을 온전히 받고서야 그 사랑을 전할 열정과 소원이 생겼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성령을 받은 신자는 교제의 내용과 목적과 범위가 예수님과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예수님을 직접 일대일로 만나 교제한 자는 당연히 성령이 충만하게 되어 예수님이 세상에 베푼 교제와 똑 같은 교제를 세상에 베풀게 된다는 것입니다.
토끼구멍 신자를 우리말로 알기 쉽게 바꾸자면 “오늘도 무사히” 신자일 것입니다. 오직 자기의 안전만, 그것도 “바로 여기서 지금 당장의” 안전입니다. 그것은 불신자의 생각과 사실은 같은 것입니다. 불신자였을 때는 “오늘도 무사히”를 자기 힘으로만 이루려 했다면 신자가 된 이후로는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이루겠다는 것 말고는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물론 성도들끼리는 가능한 자주 만나 아름답고도 진실한 교제를 이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는 혼자 있을 때든 여러 명 있을 때든 반드시 주님과의 교제가 먼저여야 합니다. 그 후에 주님께 받은 은혜를 성도 나아가 이웃끼리 나누며 교제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성령 안에서 주님과의 교제가 먼저 있으면 신자들끼리의 교제는 불신자를 찾아가 교제하기 위한 준비요 연습임을 필연적으로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신자를 향한 뜻이 단순히 “오늘도 무사히”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 어떤 환경에 처하든 오직 하나님의 의와 그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참여하라는 것임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쓴”(행2:46)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시와 지금은 사정이 좀 다릅니다. 그들은 단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즉시 회심한 자들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제자훈련 코스를 필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나아가 교회도 생기기 전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선 우선 이 최초의(사도 이후로는) 크리스찬들을 모아서 교회부터 굳건히 세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어서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7절)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성도들의 선한 행실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려면 그들과 교제가 충분히 있어야 했습니다. 최소한도 성도들이 성전에 모여서 너무나 아름답고도 진실한 교제를 나누는 모습이라도 보여주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당시는 아직 유대교와 기독교가 나눠지기 전이라 성전에 함께 모인 모든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의 사랑과 섬김의 아름다운 공동체가 형성되어가는 것을 옆에서 목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성도들의 성령 충만한 모습을 통해 성령이 죄인을 구원하는 역사가 이뤄졌습니다. 지금처럼 신자들이 일주일 내내 교회 일에만 붙잡혀 있거나 신자들끼리만 교제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요컨대 성도간의 교제는 훈련이라면 세상에 나가 불신자와 교제하는 것이 실전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교인에 속합니까? “오늘도 무사히” 즉 “Rabbit-hole Christian"입니까? 계속해서 훈련만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실전에 임하고 있는 중입니까?
1/30/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