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눅17:15,16)
예수님이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 주었더니 사마리아인 오직 한 명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돌아와 사례했습니다. 그렇게 큰 은혜를 입고도 배은망덕하게 감사하지 않은 자가 오히려 아홉 명이나 되었고 그것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왜 구태여 예수님이 묻기도 전에 자기의 신분을 자진해서 밝혔을까요? 그럼 다른 자는 모두 유대인들이라는 뜻이 되고, 필연적으로 서로 비교되어 자기의 도덕적 우월성은 드러나는 반면에 그들에게 비난이 더 쏠리게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좋다는 칭찬을 받으려 한 것일까요?
불후의 찬송가 “Amazing Grace"를 작시한 존 뉴톤이 노예선 선장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불신자로 죄악과 쾌락을 짝 삼아 살다가 폭풍우를 만나 바다에 표류하여 죽게 되자 하나님을 찾았고 정말 기적 같은 은혜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 후 회개하고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에게 드렸으며 모든 세대의 신자가 아끼는 명곡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 찬송가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어찌 나 같은 천하의 죄인도 구원해 주셨는지요?(Why me?) 너무나 크고 경이로운 은혜(Amazing Grace)에 오직 감사할 따름입니다.” 세상 윤리로 따져도 그는 가장 먼저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할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목숨을 건져 주었을 뿐 아니라 성령의 거듭남으로 그 모든 죄의 사함을 받았으니 그로선 그 은혜가 이해도 안 되고 ‘경이롭다’는 말 외는 표현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의 바로 그 감격입니다. 아직도 사단에 미혹되어 그리스도의 광채 안에 들어오지 못한 자들을 바라봄으로써 더 실감합니다. 탐욕과 쾌락에 사로잡혀 온갖 추한 죄악을 범했던 자기 이전 모습을 비로소 확연히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선 전혀 소원도 기대도 하지 못했었는데 어느 듯 자기는 이미 빛 가운데 들어와 너무나 큰 은혜를 받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나 같은 자가 왜 이렇게 변화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고 단지 기이할 따름입니다. Why me?
지금 사마리아인 문둥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 족속과 결혼하여 유대인들로부터 민족의 반역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긴 그들을 아예 구원 밖에 있는 자로 여기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율법 상 부정한 자의 대표인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로선 “유대인 랍비가 어찌 나 같은 사마리아인에게 이런 기이한 일을 베푸십니까?”라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Why me, a Samaritan?
문제는 신자들의 경우 처음 구원 받았을 때 감격에 들떠 자기도 모르게 고백했던 그 “Why me?”가 차츰 변질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감격과 감사의 정도가 줄어들면 다행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라도 세월이 가면 퇴색되기 마련이니까 말입니다. 아예 정 반대로 바뀌니 큰일입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만 이런 불행한 일을 자꾸 겹치게 만드십니까? 저는 주일 성수, 성경공부, 기도 모임, 구제와 헌금에도 정말 내 분에 넘치게 열심히 했다는 것을 주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회 활동에 불성실하고 아직도 세속적으로 살고 있는 저 집사는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저는 왜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입니까? Why me?"
감사하지 않은 유대인 문둥이 아홉 명의 잘못은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사장에게 자기들 깨끗해진 몸을 보이고 정결례를 마침으로써 자기들 할 바를 다했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단순히 유대인 랍비의 한 사람으로 봤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과 율법이라는 구원의 도구를 너무나 믿고 있었기에 자신의 전인격적인 변화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처럼 자신이 철저하게 낮아지는 체험이 없었던 것입니다.
일회용 감사는 믿음과 크게 상관없이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처음 믿었을 때의 감사의 "Why me?"가 갈수록 불평의 “Why me?"로 바뀌는 까닭은 신자마저 일회용 감사만 하려들기 때문입니다. 일회용 감사란 다른 말로 일어난 일에 대한 감사입니다. 감사를 베푼 사람에 대한 감사는 뒷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자도 포함해서 세상살이에선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감사를 베푼 자를 꼭 찾아가 답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지라 차츰 그 절차를 등한히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감사할 일을 베풀어주어야만 감사하는 타성에 빠져버립니다.
신자가 감사할 대상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가 아니라 그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감사할 일이 생겨야 감사한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선물 보따리에다 대고 절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왜 나에게 불행이 자꾸 생깁니까?”라고 불평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감사하지 않겠다는 심보이지 않습니까? 이 또한 선물 보따리에만 절하는 것과 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그분을 감사하라는 것은 일회용이 아니라 지속적인 감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처한 환경과 일어난 일과 상관없이 그분에 대한 신자의 지속적인 마음가짐이 감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그분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야만 합니다. 그분의 전지전능성만 믿으면 감사할 일만 찾게 되지만 그분의 내 자신을 향한 진정한 계획과 뜻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믿음을 온전하게 바꾸는 것이 신자가 해야 할 참 감사입니다.
성경이 신자더러 범사에 감사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의지적으로라도 감사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범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그 기이한 계획과 뜻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고 나면 당연히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관계에서 주고받는 감사도 그 발단은 서로에게 도움을 준 일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도움을 준 사람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 사람을 새삼스럽게 좋게 보게 되는 것이 감사이듯이 하나님에게도 이런 인식 없이는 참 감사는 절대 되지 않습니다.
처음 구원 받았을 때에 왜 “Why me"라고 하면서 감격할 수 있었습니까? 사실은 자기에게 현실적으로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영혼이 충만한 감동으로 벅차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만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뀐 사건이지 않습니까? 존 뉴톤이나 본문의 사마리아인 문둥이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 줄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는 뜻 아닙니까? 당연히 벌을 줄줄 알았는데 오히려 구원을 베풀었으니 하나님을 다시 보게 되었고 그래서 감사가 자연히 그분께로만 향했지 않습니까?
신자가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이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고 그 바꾸어진 생각으로 평생토록 그분을 대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분께 항상 감사를 바치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감사의 "Why me?"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신자의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자기도 모르게 불평의 “Why me?"가 나온다는 것은 원인이 어디 있든 간에, 물론 현실의 환난이 너무 고달픈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제사보다 제삿밥에 신경이 더 쓰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회용 감사는 참 감사가 아닙니다. 지속적인 감사만이 참 감사인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일관되게 유지하지 않는 한 그런 감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은혜보다,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항상 그분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예수님의 십자가만 날마다 순간마다 묵상하는 길 말고는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Why me?”를 고백하고 있습니까?
1/26/2007
예수님의 십자가만 날마다 순간마다 묵상하는 길 말고는 지속적인 감사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