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64:9,10)
신앙생활의 가장 큰 초점을 도덕적 삶을 사는 데 두는 신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또 그 뿌리가 너무 깊어 어지간해선 고쳐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다는 반증입니다.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는 죄를 안 짓고 선하게 살아야 하지만 그 자체가 신앙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것은 오직 그분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아직도 죄에서 자유롭지 않은 자를 의롭다고 칭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난 후에는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며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써 신자의 과거, 현재, 앞으로 지을 죄까지 모두 심판에서 완전 면제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마음 놓고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죄는 짓지 말아야하고 신자라면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이전에는 죄를 잘 몰랐거나 오히려 즐겼다면 이제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으니 죄를 지으면 더 철저하게 통회자복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영생은 이미 확보되어 있습니다. 믿은 후에 짓는 죄에 대해서도 영원한 심판이 없다는 것은 이제는 죄를 안 지으려 노력하는 것보다 다른 일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죄를 감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알기 쉬운 말로 바꾸면, “네가 아무리 지은 죄가 많아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때려 죽어도 사랑한다. 그러니 이제 죄를 안 짓는데 신경 쓰기보다는 나의 사랑을 받아서 생활하라”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것은 절대적 원칙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죄안 짓는 일에만 신경을 집중했습니까? 전혀 아니지 않습니까? 오직 이웃사랑만 하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 뜻 안에서만 말입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대로 살았고 그분이 시키는 일만 하셨습니다. 이 땅의 불쌍한 잃어버린 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는 일만 하셨습니다.
신자가 정작 닮아야 할 부분도 바로 이 모습입니다. 죄를 안 지으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이웃도 내 몸 같이 사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기에 바빠 죄와 자연히 멀어져야 합니다.
불신자가 죄만 안 지으려 급급 하는 이유는 사실 자기 혼자만 구원 받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잘못만 안 하면 의인이 되는데 결국 남이야 어찌되든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생각에 기인한 것입니다.
신자는 그들과는 정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은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 완전히 붙잡힌바 되었기 때문에 그 부분은 안심하고 대신에 이웃을 잘 먹고 잘 살게 만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공부하고 돈 벌어서 남 주나? 다 네 차지이지.”라고 가르치는 것이 불신자라면, 신자는 정반대로 “공부하고 돈 벌어 남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도 윤리적 삶을 살되 이전에 알던 윤리와는 차원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도덕과 상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훨씬 고급한 도덕이라는 의미에 그치지 않습니다. 절대적 선이자 그 기준이신 하나님 뜻에 따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여기까지는 분명 세상 윤리보다 더 고급한 차원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 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5-48)고 했습니다.
원수도 하나님이 지으시고 사랑하는 백성이니까 사랑하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이 온전한 것같이 신자도 온전해져야 하니까, 즉 주님을 닮기 위해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윤리의 기준, 목적, 결과 모든 것이 세상 윤리와는 다르며 오직 주님을 닮아가는 윤리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본 시편에선 신자가 정직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남이나 하나님 앞에 거짓을 말하지 않거나 숨기는 부분이 없어야 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면서 그 분의 행하심을 깊이 묵상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자기를 향한 간섭과 인도를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진짜로 신뢰하고 온전히 그분께 자신의 삶 전부를 의탁하였다면 그 믿은 바대로 정확하게 행하는 것이 정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공의와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서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현재 자기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어떤 힘든 일이 일어났든지 그분의 신비하고도 영원한 계획 가운데 일어난 일이기에 그분의 사랑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신자가 자기 믿는 바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해야 참 정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롭고도 강한 손에 이미 완전히 붙잡힌바 되었으므로 신자도 그에 걸맞게 반응하며 사는 것입니다.
다윗은 정직한 자는 어떻게 하는 자라고 합니까? 여호와께 피하고 그를 인하여 즐거워할 뿐 아니라 “그를 자랑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신자는 진짜 자기 믿음대로 살고, 믿음대로 즐거워하고, 믿음대로 자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하면 옳은 것임을 인정하고 또 그대로 따르는 것이 신자의 정직입니다. 그분이 싫은 것은 자기도 싫어하면서 죽어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살았듯이 우리 또한 죽기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신자도 과부가 솟구치는 욕정을 바늘로 찔러 누르면서 정절을 지키려는 것 같은 노력도 해야 하지만 그에 앞서 진짜로 하나님을 정직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범사에 감사하게 되고 또 자연히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예수님처럼 윤리적인 죄를 안 지으려고 신경 쓸 틈이 아니 그럴 필요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를 통해 예수님의 그리스도다우심이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당신은 지금 진짜로 정직한 신자인가요?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신분과 권세에 걸맞게 제대로 믿고 또 그 믿은 바대로 살고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여호와를 인해 즐거워하고 그분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2/2/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