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서 승리하고 있는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4-16)
로마 군대가 승전기념 퍼레이드를 벌릴 때에는 항상 향을 피웠는데 맨 뒤쪽에는 곧 사형시킬 적국의 포로들이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 향은 로마 군인들에게는 명예와 기쁨이 되었지만 포로들에게는 그야말로 죽음의 냄새였을 것입니다.
흔히들 다른 성도들에게 말이나 글로 위로할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히 승리하길 기원한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복음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 이상 정죄가 없으며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어서 이미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말을 아무 염려 없도록 매사에 형통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것도 “넉넉히”라는 뜻대로 아주 복을 많이 받아서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것의 의미를 훨씬 다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나타나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항상”, “각처에서” 그래야 한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하던 신자라면 예수의 냄새가 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냄새에 반드시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신자는 십자가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구주임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전해야 합니다.
그분의 죽음을 단지 한 인간의 죽음으로 이해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자 즉, 얼마든지 자신의 죄를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만큼 스스로 깨끗케 할 자신이 있다는 자에게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반면에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자, 즉 자기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임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바라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기다립니다.
따라서 신자는 복음을 세상 모든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죽음과 생명으로 가르는 유일한 길로만 소개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분명히 구분하지 않거나 제 삼의 대안이 있는 양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같아도 그리스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17절)만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가 말로써 복음을 순수하게 전하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자기 삶에서도 똑 같이 죽음과 생명의 두 냄새를 앞에 피워야 합니다. 집안에 하루 종일 향을 피우는 다른 종교인들처럼 찬양 테이프를 항상 틀어놓고 성경만 읽고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신자를 보면 죽음 아니면 생명 둘 중 하나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느껴야 합니다.
예컨대 이웃으로부터 이런 두 가지 말 중에 하나를 분명히 들어야 합니다. “그리 넉넉한 것 같지도 않은데 남 도와주는 일에는 발 벗고 나서니 정신 나간 것 아니야? 예수 믿는 것이 밥을 먹여 주나 돈을 벌어 주나? 나 같으면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 “사람들이 뭐라 하던 세상 돌아가는 것과는 정반대로 사니 참 이상한 사람들이야. 자기들도 어려우면서 남이 힘들면 도와주지 않는 법이 없어. 어떤 일이 생겨도 불안해하지 않고 도리어 웃으며 감사해. 저 사람만 보면 나에게도 평강과 기쁨이 전해져. 나도 저 사람처럼 살고 싶어!”
아직 전부가 아닙니다. 주안에서 승리하려면 또 다른 하나가 남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또 “냄새를 나타내신”다고 했습니다. 자기 노력과 의지로 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칫 그렇게 하려다가는 인간적 공로와 자랑이 앞서게 될 뿐입니다. 바울은“항상 각처에서”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의탁하여 그분의 의와 나라만 구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향해 생명과 죽음의 냄새를 동시에 피우지 않고는 신자에게 승리의 방도가 없습니다. 또 그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
10/15/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