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시대로 돌아간 신자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3:13,14)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고 산 밑으로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만약 이스라엘이 그 광채가 결국에는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하나님의 영광과 방금 전해준 율법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할까 염려하여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때나 그 이후로나 그 광채가 너무나 영광스러워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가 복음의 율법에 대한 우월성을 입증하려 스스로 추측한 내용이 아닙니다. 당시 상황을 성경은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출34:29),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33절)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광채를 보고 가까이 하다간 혹시 죽지 않나 두려워했지만 모세는 율법을 전해주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염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반사된 광채도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찬란했는데 그가 직접 대면했을 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수건을 벗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눈이 부셨던 광채만 기억하고선 율법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자기들만 사랑하여 그 큰 영광을 보게 했다고 착각했고 아직도 그 착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도 여호와의 영광을 목도했습니다. 둘 다 죄에 찌든 인간들이었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오히려 광채가 없어질 것을 염려했습니다. 수건을 가린 의미가 광채가 너무나 찬란했다는 것보다는 곧 사그라진다는 점에 초점이 있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택하였기에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축복해주겠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떤 죄인이라도 당신과 인격적인 대면을 하여 진정으로 회개하면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요컨대 십자가 복음이 모세의 수건에도 드러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직도 그 수건으로 마음을 가리고 있지만 언제든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질 것입니다.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처음 염려했던 대로 하나님의 광채를 바로 쳐다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바로 쳐다봐도 죽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자기들을 무조건 사랑해서 율법까지 주셨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를 범했어도 당신께로 돌아 왔으니 이제는 율법대로 살라는 뜻인 줄 몰랐습니다. 마음을 수건으로 완악하게 가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그 착각에서 스스로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이스라엘만 범하는 잘못일까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다 감당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교리만 붙들고 있는 신자가 작금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이 정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처절한 고백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무슨 죄를 지어도 무조건 용서해주고 기도하면 다 들어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을 가린 것이 모세의 광채였다면 오늘날 신자에게는 값싼 복음일 뿐 본질적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열방을 구원하는 데 있었듯이 오늘날도 신자를 통해 불신자를 구원하기 원하시는 데도 말입니다. 그리스도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의 몸만 신약시대에 있지 마음은 구약시대에 머물러 있는 셈입니다.
10/23/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