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의 큰 비밀을 알아라.

조회 수 1982 추천 수 160 2008.12.09 19:12:14
1.3. 경건의 큰 비밀을 알아라.


감정은 신앙의 대적이 아니다.


대대로 유교적 관습과 가르침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교인은 경박하게 행동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인식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실제 기질은 이탈리아인처럼 아주 감정적이다 못해 격정적이라고 할만하다. 그런데도 외적으로만 경건하려드니 지정의의 전체적 균형이 이뤄질 리가 없다. 당연히 한국 신자들 대부분이 감정을 잘못 절제하여 실패한 경험이 성공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결과 감정은 신앙성숙의 중요한 대적으로 꼽히게 되었고 영적인 문제와는 아예 연결시키지 않으려고까지 한다.  

바꿔 말해 많은 신자들이 경건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 종교적인 말과 행동과 몸에 밴 태도에서 경박성을 제거하고 대신에 온유하면서도 엄숙한 모습을 띄면 경건이라고 착각한다. 예컨대 제사 지낼 때에 절도 있게 행하는 것 같은 모습이 경건함의 대표가 되었다. 경건은 모양으로만 따질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능력으로 판정해야 한다.(딤후3:5)

성경은 경건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1:1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 가운데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가운데서 올리우셨음으니라.”(딤전3:16)

상기 세 구절 모두 경건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를 한 마디로 하나님,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미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는 경건한 자다. 신자가 인위적으로 성격, 태도, 습관을 고치고 훈련해서 엄숙한 종교적 모습을 취하는 것과 성경적 경건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따라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와 권능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면 당연히 경건의 능력도 나타난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이 임재 하는 하나님의 전이 이미 되었기 때문이다. 경건의 능력이란 신자가 성령 충만한 가운데 얼마나 그분의 인도대로 따르느냐는 싸움에 좌우된다. 역으로 말해 성령의 권능으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는 자연히 경건의 모습도 띄게 된다.

재차 강조하지만 경건이 절대 종교적으로 엄숙한 모습을 갖추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엄숙해야 할 경우도 있지만 경건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초대교회 당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다”는 말씀의 앞뒤 문맥상의 정확한 의미는 말세에 예수를 몰라 하나님을 사랑치 않고 자기와 돈을 더 사랑하여 심판이 예정된 자들을 칭한 것이다.(딤후3:1-4) 그래서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딤전6:5)들이 오히려 더 종교적 외형적 경건을 강조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성령이 충만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더 깊이 깨닫기에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고후5:15) 된다. 한 마디로 예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된다. 그분과 깊이 교제하면서 세상 끝 날까지 세상 땅 끝까지 동행하게 된다. 그분이 바로 진리이기에 오직 그분을 앎으로써만, 즉 진정으로 경건한 자가 되어야만 자유함이 생긴다. 그렇다면 그 자유함도 그분의 도우심으로 기도하여 모든 환난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분의 뜻만 따라 사는 것이어야 한다.  

경건은 가장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발견하고 가난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어찌할꼬?”라고 구원을 간절히 소원하는 절규가 따라 나오는 것이다. 그럼 성령이 간섭하여 그분의 조건 없는 긍휼을 받아들인 후에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 아래 들어감으로써 생전 처음 온전한 평강과 위로와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신자가 된 후에는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려고 노력하다가 때때로 실패하게 되면 여전히 죄의 권세에 눌려 있는 자신의 영적 실체에 대해 애통해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이 자기를 떠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붙들어주심을 깨닫고 진정한 경배와 감사와 찬양을 오직 그분께만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죽을 때까지 세상 앞에 그분의 사신이 되어 그분이 시키는 일만 최선을 다해 하는 것이 경건이다.

예수에게만 붙들려 자유로워진 모습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도덕적 종교적 경건과는 훨씬 다르다. 예컨대 예배 중에 설교 말씀을 듣고 눈물이 주체 할 수 없이 흐르거나 자기도 모르게 아멘하고 크게 소리칠 수 있다. 또 환난 가운데 주님의 구원을 갈구하며 기도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 의심, 불신앙까지 갔다가도, 기도 중에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확신하게 되면 다시 평강과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울다가도 웃으며, 웃다가 울기도 한다. 남들이 보면 경박하다 못해 약간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 성경적 경건이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9,10)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이 없는 자로선 도저히 흉내조차 못내는 모습이다. 아니 아예 그럴 수도 없고 그런 영적 상태로 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정상인이 특별한 의도가 없는 한 어떻게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는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십자가 진리를 모르고 성령도 없이 오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스스로 경건을 가장하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겉으로 경건해 보여서 다른 사람들이 믿음이 좋은 것처럼 여겨줄 것을 기대 내지 계산하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그에 비해 성경적 경건의 비밀이 참으로 놀랍지 않는가? 십자가 예수를 알기에 그분을 따라 가기만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걸었기에 세상의 보이는 것에 전혀 좌우됨 없이 성령의 인도대로 신자의 내면적 질서가 적절하고도 합당하게 작동되는 것이 바로 경건이다. 특별히 신자에게 어떤 감정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목적대로 자연스럽고도 합당하게 감정이 절제 되고 표출 되는 모습이다.

감정은 신앙의 대적이 결코 될 수 없다. 감정이 신앙의 대적이 되는 것은 경건을 가장하려는 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가장은 겉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행위다. 신자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먼저 경건해져야 한다. 말씀을 묵상하다 자신의 더럽고 추한 실체를 깨닫고 가슴을 치며 비통해 하는 것이다.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며 충만한 기쁨 가운데 찬양을 하면 감격에 겨워 자신도 모르게 눈물 흘리는 것이다. 성령이 교통하는 가운데 성도들이 서로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며 발을 씻어줄 때의 감격은 도무지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요컨대 성령의 인도대로 따르는 감정표현은 신앙 성숙의 통로이자 오히려 영적으로 성숙해진 증거다.

신앙 실패의 가장 확실한 원인

많은 신자들이 감정을 신앙의 대적으로 여기는 중요한 원인이 있다.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이해하고 인식하고 있는 지성적 믿음과 실제로 하나님에 대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발생한 그 불일치를 잘 조절하지 못해 신앙상의 실패나 미성숙이 따라오는 것이지 감정 자체가 나빠서, 자신이 느끼기에 부정적이든 말든, 그렇게 된 것은 결코 아니다. 성령의 인도대로 따르는 감정은 오히려 신앙이 자라 의와 화목의 열매를 금할 법이 없도록 맺게 해준다.

따라서 믿음이란 다른 말로 평생토록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느낌 사이에 발생한 차이(gap)를 줄여 나가는 싸움이다. 또 차이를 줄여 나간다는 최종적 목표는 당연히 그 차이가 완전히 없어져 이해와 믿음이 일치토록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가 하나님을 지성적으로 이해하고 믿는 믿음에는 별다른 하자가 없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시고 신자와 항상 함께 동행 하시며 어떤 환난에서도 지켜 주시며 당신의 영광으로 인도하신다는 진리를 잘 알고 또 믿고 있다. 반면에 현실에서 감정적으로 느끼는 그분에 대한 인식은 훨씬 다르다. 자신을 외면하고 있고 오히려 고통을 더 주시는 것 같은 분이다.

그럼 어느 쪽이 그분에 대해 잘못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당연히 감정으로 느끼는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하나님을 감정으로 느끼는 것과 지성으로 이해하는 것의 차이를 줄여 나가되 주로 감정적 하나님을 지성적인 하나님에 맞추어나가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껏 신자들은 자꾸만 감정으로 느끼는 하나님에 너무 좌우되어서 지성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마저 스스로 변질시키는 잘못을 저질러 왔다. 자기 신앙 실패의 무덤을 스스로 파고 있는 격이다. 그렇다고 감정으로 느끼는 하나님을 무조건 부인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당장의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의 믿음을 그 동안 배우고 확신해 왔던 지성적 믿음의 수준과 일치하게끔 끌어 올려야 한다. 바울이 청년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 한 일에 거하라고 권했지 않은가?(딤후3:14) 젊다는 것은 감정이 진동 폭이 가장 큰 시기라는 의인데 그러니까 더더욱 확신한 믿음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다.  

흔히들 머리로 믿는 것은 냉정하고 이론적이며 메마른 믿음이라고 천대(?)한다. 반대로 가슴으로 믿는 것이 더 뜨겁고 열심을 낼 수 있는 좋은 믿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든 신자가 실제 삶에서 확실히 실감나며 감정적으로도 감격할 수 있는 믿음을 소망한다. 말하자면 감정은 믿음의 대적인 것처럼 치부해 놓고는 사실은 감정적 믿음에 매달리는 자가당착을 범하고 있다.

또 환난 중에 주위 여건이 힘들기만 하니까 가슴으로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환난의 와중에는 누구라도 자연히 은혜를 실감할 수 없기에 감정이 침체되거나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정작 굳건한 믿음이 가장 필요할 때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믿음보다 냉정한 머리의 믿음이 더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말한 대로 대부분의 신자들이 머리로 믿는 믿음에는 하자가 없으니 그에 맞추어 느낌의 믿음을 바꾸기만 하면 환난 중에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신자들이 실제로 추구하는 것은 정 반대다. 환난 중에도 무조건 자동적으로 기뻐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환난 중에 느낌으로는 결코, 그것도 자동적으로 즐거워질 수는 없다. 그러나 환난이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아니까 즉, 지성으로 믿는 믿음에는 하자가 없으니까” 그에 맞추어 괴로운 느낌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보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또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1,2절) 신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환난 중에 키우는 소망이 반드시 실현될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도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기”(5,6절) 때문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 때문에, 정확히는 그분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제대로 알아 확신하고 또 그 확신하는 일에 거한다면, 어떤 환난 중에도 얼마든지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감정이란 오감(五感)으로 이미 인지한 외부 상황에 대해 자연발생적, 직접적, 즉각적 반응이기에 가슴에 먼저 와 닿기 마련이다. 또 명료한 이미지나 데이터로 인식되기에 그 파급효과 또한 아주 지속적이고 강하다. 다른 말로 언제 어떤 경우에나 신자가 감정으로 느끼는 믿음이 곧바로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반해 머리로 이해하는 믿음은 그에 맞추어 미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성격과 믿음의 성숙도에 따라 다르지만 반드시 누구에게나 시차(時差)가 있다. 그러면 그 차이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안은 머리의 믿음이 힘을 발휘할 때까지 절대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조금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가 영적으로 실패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다. 기도나 말씀이나 금식, 철야, 찬양 등은 아주 잘 한다. 단지 너무 조급하다. 기다리지를 못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성적 믿음이 힘을 발휘할 때까지조차도 기다리지 못한다. 아니 머리로 믿는 믿음은 나쁘다는 선입관과 편견에 너무 사로 잡혀서 차분히 말씀으로 되돌아 올 시도조차 아예 하지 않는다. 그저 울고불고 구원해 달라고 외쳐 대기 바쁘다. 기도라는 종교적 형식을 갖췄다 뿐이지 진짜 믿음이 감정에만 좌우되는, 어쩌면 가장 부정적인 방향으로, 대표적인 예다.  

대부분의 신자의,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실천적인 믿음에 영향을 더 많이, 더 오래 끼치는 것은 오히려 감정이다. 가슴에 새겨진 느낌이 머리의 믿음을 좌우하게 방치하게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역으로 말하면 감정의 본질을 잘 이해하여 제대로 절제하면 믿음이 한 순간에 크게 성숙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즉 머리의 믿음이 가슴을 점령하여서 즉각적으로 발생한 가슴의 믿음을 분석하고 조절하여야 한다. 흔히들 단순히 의지로만 감정을 조절하려 드는데, 사실은 억제만 하려는데 오히려 감정을 지성의 흐름에 맞추어 적절히 조절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성경의 권면대로 환난 중에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진정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의 영광은 언제 어디서든 그분의 방식으로 틀림없이 드러날 것임을 확신하여 염려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최소한 반드시 언젠가는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키워서라도, 아니 십자가로 인해 영생을 이미 확보했다는 참 안식 가운데서 감정적 소용돌이를 잠재울 수 있어야 한다.

다윗의 시편 23편이 참으로 은혜로운 까닭이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이미 인도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안락과 평강은 여전히 소망 가운데 머물렀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 대신에 대적의 목전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드니 성령의 놀랄만한 기름부음이 그에게 임하였다.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가운데도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은 절대로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윗은 가슴에 생긴 느낌의 믿음을 이미 배워서 확신 중에 거한 머리의 믿음에 맞추어 조절했던 것이다.

믿음이 단순히 인내력과 의지와 담력으로 환난을 이겨내는 싸움이 아니다. 환난 중에서도 정말로 기뻐하는 것이다. 환난을 당하자 곧바로 생긴 감정을 괴로운 상태를 믿음이라는 미명하에 그대로 방치 내지 무시하거나, 반대로 우선 염려 불안만 없애려 간절히 기도하여 이겨내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염려 불안은 당연히 없어진 그 내면의 자리에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가득 채워져서 그분의 영광을 바라볼 것이라는 기대로 실제로 설레고 들떠야 한다. 다른 말로 연단도 인내도 소망도 하나님의 영광도 잘 절제된 감정이 충만이 따른다는 것이다. 지성적으로 이해하는 믿음을 감정이 더 굳건하게 세우어서 신자로 완전한 확신 속에 거(居)하게 할 수 있다.  

솔직히 한번 자문해보라. 지금껏 참 경건에 들어간 적이 있는지를 말이다. 쉽게 말해 환난 중에, 환난이 끝난 후가 아니라, 더 즐거워하고 기뻐했던 적이 있는가를 말이다. 또 당신의 믿음이 얼마나 굳은지, 정말로 확신에 거하고 있는지 무엇으로 점검하는가? 교회행사 출석율, 대표기도 회수, 맡고 있는 교회의 직분, 말씀과 기도에 능한 모습 등인가? 아니면 지정의가 온전한 균형을 이루어서 내면의 믿음과 외부로 드러나는 행동이 일치하는 모습인가? 과연 어느 쪽이 참 경건의 모습인가?

혹시라도 참 경건에 도달한 적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감정이 신앙의 대적이자 영적 성숙에 방해 된다는 잘못된 편견부터 버려라.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지성적 믿음이 감정적 믿음을 조절하게 하라. 아무리 위급하고 격동적인 순간에도 절대 조급하지 말며 잠시 멈추어서 성경 말씀,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간절히 묵상해보라. 남들이 볼 때에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우는 이상한 경우가 생겨도 자신의 의지로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강이 넘치는 참 경건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12/9/2008

김순희

2010.11.01 10: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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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말미암은 기쁨, 감사, 감격, 희열... 그 결국은 천국이기에
넘쳐나는 기쁨이 바로 경건임을 깨닫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라의 웃음

2012.04.27 21:2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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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적 믿음이 감성적 믿음을 조절하도록 해야함을 배웁니다.
참된 진리의 말씀을 이론으로 잘 배워서 삶 속에 여러 모양의
어려움과 고통, 슬픔들이 몰려올 때 냉철하게 말씀을 실체화
시킬 수 있는 능력이 바로 믿음이며 감정의 조절임을 배웁니다.
그래서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그런 곳이 너무도 귀함을 깨닫습니다.
이 곳에서 귀한 말씀을 늘 배울 수 있음이 바로 축복 중에 축복임을..
감사합니다.

날마다순종

2020.08.01 16:53:25
*.14.99.253

이곳을 찾는 성도님들 모두, 주님의 동행하심을 체험하여 지성과 감정 양쪽 모두 확신하고 언제 어디서든 그 어떠한 상태에 있더라도 항상 주님안에서 기뻐하며 감사하는 자녀들 되도록 성령님 저희들을 그리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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