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후하게 베풀어라.(1)

조회 수 1850 추천 수 136 2009.03.12 18: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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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남에게 후하게 베풀어라.(1)


비우지만 말고 채워라.

예수님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도움과 치료를 요청하면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다.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막7:27)고 거절한 경우를 빼고는 말이다. 그러나 이 거절의 말씀 바로 앞에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라고 했다. 순서를 나타내는 ‘먼저’라는 말이 있기에 그 다음에는 자녀가 아닌 자들에게도 먹게 할 것이라는 뜻이 내포된 것이다. 또 이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곧바로 고쳐 주셨기에 실은 그 믿음을 시험해 보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고 단 한 번도 외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항상 시간적, 육신적, 경제적 수고, 희생, 손해는 당신이 감당하셨다. 도움을 받은 상대에게는 그 반대로 치료, 회복, 구원이 따름은 당연했다. 당신은 낮아지고 죽으시되 상대는 높아지고 살아났다. 결국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그런 사랑을 하나 남김없이 완전하게 다 펼쳐 보이셨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내용이 무엇인가? 구제를 열심히 행했던 한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웃의 범위가 누구인지 물었다. 예수님은 길가다 강도 만난 자처럼 당장의 도움이 필요한 자는 누구라도 다 이웃으로 삼아 사랑을 실천하라고 대답하셨다. 상대의 신분, 인종, 종교, 처한 상황 등 그 어떤 것으로도 이웃의 범위를 제한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또 당신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바로 그 비유대로 온전히 행하셨다.  

지금 예수님의 완벽하게 절제된 감정 표출을 배우고 있는 중인데 이웃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로 배워야할 내용이다. 남을 도우려면 자기는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데 언뜻 감정의 절제와 상관이 없고 오히려 반대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남을 도우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단순한 이야기를 하려는 뜻은 아니다.

감정이 상하여서 잘 절제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가? 아무래도 자기 충족이 안 되기 때문이다. 경제적 풍요, 현실적 권력과 명예, 지성적 우월감, 정서적 평강, 원만한 인간관계, 영적 충만감 등 그 어떤 종류가 되었든 간에 자신에게 응당 채워져야 한다고 기대 내지 계획한 만큼 되지 못하면 염려, 불만, 분노 등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럼 역으로 따져서 자기 충족을 목표로 삼지 않으면 감정이 상할 이유는 없게 된다.

그런데 단순히 자기 비움만을 목표로 삼으면 우선 그 목표를 완전히 달성치 못한 데서 오는 불만족이 따를 수 있다. 수양과 득도에 실패한 자의 실망과 좌절은 아주 대단하다. 자기를 비우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하면 결국은 허무주의나 불가지론으로 빠짐으로써 그 절망감을 해소하려 든다. 설령 성공을 해도 단순히 무소유로 그치면 감정의 상함만 없는 덤덤한 상태로 머물지 감정의 충만함에서 오는 기쁨은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자기 비움에 그치지 않고 비운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좋은 것으로 채우고 또 채우고 넘친 것으로 남에게 나눠준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다시 강조하지만 단순히 남을 도와서 자연히 생기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나에게 남아도는 여유분이 있다는 뜻이다. 경제적, 신분적, 지성적, 정서적, 종교적, 나아가 영적이든 상대보다 어떤 면에서건 나은 것이, 최소한 양적으로라도 상대에 비해 많은 여유분이 있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남을 도우기 전에 이미 자신에게 충족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반면에 남을 도움으로써 얻는 기쁨은 도우기 전에는 기쁨이 거의 없었음에도 의지적으로 실천하니까 그렇게 되었다는 뜻도 내포된다. 자기 충족이 안 된 상태에서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 의무감만으로도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그럼에도 일단 도우고 나면 배은망덕한 경우가 아닌 이상 열이면 열 다 기쁨이 생긴다.

단순히 상대가 기뻐하고 감사해서 만이 아니다. 인간끼리 서로 돕는 일의 특성 상 돕고 돕는 당사자들 사이에는 반드시 기쁨이 생긴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창조했다.  삼위이신 하나님이 일체가 되는 것도 완전한 사랑이 그 사이에 넘치기 때문이다. 인간 또한 그분을 닮아 서로 사랑하면 그 둘 사이뿐 아니라 각자에게 자기 존재의 충족감이 필연적으로 생기게 만들어졌다.  

의지적으로 남을 돕는 것은 한두 번은 성공할 수 있다. 또 그 성공 뒤에 오는 기쁨이 크면 다음에는 아무래도 더 쉽게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자기 코가 석자가 되면 그런 기쁨은 다시 안중에 없어지게 마련이다. 의지적으로 행하는 일은 순수한 믿음에서 나온 행위가 아니다. 믿음의 훈련으로는, 그것도 단지 일시적으로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신자가 평생을 두고 목표로 삼아 훈련해야 할 경건에는 전혀 못 미친다.  

신자가 정말로 배우고 따라야 할 대상은 오직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별로 그럴 마음이 없는데도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 의무감으로 남을 도운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결코 아니지 않는가? 그분은 이미, 정확하게는 항상, 자신부터 충족해진 상태에서 당신의 충족함을 남에게 나눠주셨다. 더 정확하게는 그리스도로서 자신의 충족한 은혜와 권능 안으로 인간을 동참 시켜서 함께 누렸다.

신자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신앙 연륜이 많이 쌓이는 것과 교회에서의 종교 행위에 능수능란하게 되는 일과 관련지어선 안 된다. 자기를 비우고서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이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의 최우선 내지 전부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단순히 자기를 비울 것이 아니라 그 빈자리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워야 하며 그 채워진 것으로 나누어야 한다. 신자가 자신의 노력으로 자기의 것으로 채웠다면 금방 고갈이 되고 지치게 마련이다. 반면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우면 그 한계가 없으며 주위에 나누면 나눌수록 도리어 더욱 강하고도 넘치게 샘솟는다.

신자의 평생 소명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돕는 배필 이브를 만들었다. 최초의 남녀 간에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게 한 것만이 아니다. 아담은 남자라는 뜻 이전에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이 이 부분을 특별히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 기록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서로 돕는 배필 즉, 서로 돕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길 원하셨다. 또 그러기 위해선 아담의 후손이 많아져야 했기에 결혼이란 제도가 필수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웃을 사랑할 때만이 정말로 참 인간다워진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모든 인간의,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신자의 생존 목적이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장 큰 계명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와 동일하게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을 꼽았지 않는가?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은 이미 사랑하게 되었기에 평생을 두고 이웃 사랑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소명이자 천국을 실현하는 방도가 된다.

이웃 사랑이 신자의 선택 사항이 아니다. 사랑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법은 없다. 또 엄밀히 말하면 사랑하면 믿음이 더 좋고 또 은혜를 더 받는 것도 아니다. 그 반대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믿음이 나쁘거나 은혜를 덜 받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믿음이 있다면 이웃 사랑은 아주 자연스럽게 따라와야 한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에 비추어보면 단지 자기를 비우는 것만을 평생 수양의 목표로 삼는 것은 참으로 가난한 인생이다. 아니 제대로 성공할 가능성마저 거의 없다. 창조주 하나님을 배제하고는 인간 스스로 아무리 수양과 고행을 거듭해도 절대 자신을 완전히 비울 수 없다. 원래부터 인간은 서로 사랑하게끔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자신을 텅텅 비운 상태로는 절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순식간에 정욕과 죄악이 파고들어 그 자리를 차지하고야 만다.

그 비워진 자리에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 넣어야 한다. 아니 하나님의 사랑을 채우지 않고는 아예 자신을 비울 수조차 없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오직 내면의 정욕과 죄악을 스스로 죽여 없애는 것만 평생 목표를 삼고 있다. 다른 말로 그런 것들로 야기되는 온갖 추악한 감정상의 기복만 없애겠다는 뜻이다. 무념무상이 궁극적 도착점이다. 속이 완전히 텅 비어진 상태를 만들지 못해 안달복달한다.  

심지어 일부 신자들마저 예수 믿는 믿음의 훈련을 그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감정을 인간이 없애려 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껏 실패해 온 경험대로 감정을 무조건 부인한다고 절제를 못한 실패를 절대 막지 못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이 주신 뜻대로 감정을 충만케 해서 절제 내지 표출하면서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말로 신자의 평생 목표는 정욕과 죄악으로 흔들리는 감정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감정이 그것들이 끄는 롤러코스터를 타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자기 속에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을 주위에 나눠주어야 한다. 하나님을 채우기 위해 자기를 죽이는 것이지 자기만 죽인다고 자연히 경건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감정을 완벽하게 절제 표출했던 첫째 이유가 평생을 오직 당신의 소명만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일만 했다. 신자의 평생 소명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신자도 이웃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면 자연히 감정을 잘 절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 는 죄와 허물이 많고 연약하여 온전한 사랑을 잘 할 수 없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대신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신자는 자기를 비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예수님으로 채우기 위해서 즉, 자기 것으로 채우지 않기 위해서 자기 것을 비우는 것이다. 신자에게 예수가 충족이 된다는 것은 그분을 닮아서 이웃에게 자기 전부를 던지며 나눠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자기는 이미 다 없어지고 오직 예수만 나누기에 어떤 세상사나 인간관계에서도 감정이 상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신자의 삶은 자기 충족이 목표가 아니기에 자신부터 이미 자기의 것이 아니다. 예수가 충족되면서, 정확히는 구원 받아 성령이 내주하게 됨으로써 이미, 예수님의 것이 되었다. 나아가 이웃 사랑을 평생 소명으로 삼고 있기에 자신을 이웃의 것으로 내어준 것과 진배없다. 쉽게 말해 자신의 존재, 삶, 일생은 이미 아내, 자식들, 성도들, 이웃의 것으로 바뀐 것이다. 이미 내 것이 아니기에 남의 것이다. 따라서 남의 것을 남에게 주는 데 아까워하고 상처 받을 이유는 없지 않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가신 길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다. 단순히 교회에 나와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종교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살았던 인생을 그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 되신 그분을 인간의 의지로 스스로 흉내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성령의 충만을 구하여서 자기에게 주신 그분의 소명을 기쁨으로 실천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그분을 닮을 길이 없다. 또 그랬을 때에 비로소 이웃사랑이 자기 삶 자체로 바뀔 수 있다.

물론 이 일은 아주 고달프고 끝없는 인내를 요구한다. 내 안에 죄의 본성이 살아 꿈틀거리며 외부에선 죄악과 사단의 유혹이 쉴 새 없이 심령의 문을 노크하고 있다. 성령의 전신갑주를 입고 무시로 기도하여 자기 심령의 안팎에서 소리 지르는 구걸 꾼이나 호객꾼의 소음을 잠재워야 한다. 이 땅에서 예수를 믿어서 참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정말로 어떤 의미인지 깨달아 그분의 십자가 진리를 날마다 순간마다 붙들고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같이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7:38) 예수님은 후히 주면 넘치도록 다시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선행을 하면 하나님이 현실적 축복을 신자가 베푼 것의 몇 배로 되갚아 주신다고 알고 실제 그렇게들 가르쳐지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복 받는 방안의 하나로 선을 행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이는 아주 틀린 것이다. 예수님도 그런 잘못을 범하지 말라고 이 말씀 앞에 분명하게 지적하셨다.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依數)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선대하여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33,34절)

미리 보상 받을 것을 의수 즉, 계산하고 선을 행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다. 대신에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원수마저 선대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순전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나중에 천국의 상급으로 예비해 놓으신다. 또 그런 순수한 선이라면 얼마든지 더 행할 수 있는 여유와 기회로 채워주시는 법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36절)고 명하신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만큼 자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여유, 능력, 기회, 마음, 열정이 그분을 도무지 따라갈 수 없지 않는가? 그렇다. 우리를 우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이 신자더러 질적 양적으로 당신을 필적할 정도로 많이 베풀라고, 예컨대 집 팔고 생명을 바쳐가며 선을 행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으신다.

남에게 후히 주라는 명령의 초점은 신자더러 헤아리지 말라는 데에 있다. 많이 주라는 것이 아니라 아끼지 말고 주라는 것이다. 아낀다는 것은 내 것이라는 의식이 있을 때에 응당 나타나는 감정적 반응이다. 신자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단지 잠시 관리하도록 맡겨진 것뿐이다. 언젠가는 다 그 손에서 떠난다. 이런 인식이 확고하다면 아끼는 마음, 귀하게 여기는 아낌이 아니라 집착하여서 망설이는 아낌은 없어질 것이다.

나아가 본문에서 주라는 내용을 자꾸 물질로 간주해선 안 된다. 정작 나눌 것은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이다. 물론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적으로 드러나야 온전한 사랑이 되며 또 그 가장 명료한 표징이 물질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본문의 앞뒤 문맥을 따져보면 주어야 할 것은 하나님 안에서 인간관계를 더 아름답고도 풍성하게 바꿀 수 있는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인간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굶는 사람 하나 없도록 풍요를 주시고 또 어떤 환난도 다 없애 안락하게 만들어주신 것은 아니다. 그분은 문자 그대로 당신만의 자비를 베푸셨다. 하등의 자격과 조건이 안 됨에도 베푸는 사랑이 바로 자비다. 우리 모든 죄와 허물을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그 자비가 완성되었지 않는가?

그분은 우리에게 용서, 화해, 구원, 빛, 생명, 천국, 부활 등 하늘의 모든 좋은 것으로 주시고 대신에 당신께서 받으신 것은 인간의 실패, 좌절, 허물, 상처, 죄악, 흑암, 죽음 등 땅의 모든 나쁜 것이었다. 그런 더러운 실체들을 직접 받은(receive)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실체가 그렇게 더럽고 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여”(accept) 주셨다.

신자더러 하나님의 그런 자비하심처럼 남들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다. 우선 내 것이 아님으로 아무 미련 없이 베풀어야 한다. 나아가  나와 상대의 허물과 죄악 뿐 아니라 그 관계에 장애가 될 만한 것들은 전부 내 쪽에서 감당해야 한다. 대신에 나에게서 상대에게 전해지는 것은 전부 선하고 의로운 것이며 상대의 유익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처럼 자비하라”는 권면과 “후히 주라”는 당부 사이에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곰곰이 살펴보라.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37절) 비판, 정죄, 용서하지 못함 등이 둘 사이를 갈라 온전한 사랑을 방해 하고 있다면 그 모두를 제거하라는 것이다.  

신자가 예수님을 닮은 사랑을 할 수 있는 궁극적 목적지는 원수를 선대하고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주는 자리다. 그 말은 분명히 상대에게 잘못의 원인이 거의 대부분 귀착된다 하더라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라. 당신에게는 잘못이 한 치도 없고 오직 인간들에게 100% 잘못이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 말 없이 그 죽음을 감당하시고 오히려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성부 하나님께 기도했지 않는가?

상대를 비판, 정죄,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기실 그 잘못의 원인으로 따지면 상대에게 더 많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간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나아가 앞으로 겪을 어떤 수모와 비방도 신자가 모두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쁜 것은 신자가 용납하고 상대에게는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이 후히 채워주는 주님의 좋은 것으로 후히 베풀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가 이웃을 사랑하면서 정작 후히 주어야 할 것은 물질보다 용서하는 것, 비판하지 않는 것, 정죄하지 않는 것, 원수를 선대하는 것, 죄인을 사랑하는 것들이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신자가 받을 것도 더 용서하고, 더 이상 비판과 정죄하지 않고, 원수까지 선대할 수 있는 마음, 열정, 능력이다. 또 신자 본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음을 인정받게 즉, 하늘의 면류관이 자신을 위해 예비되어 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신자가 이웃에게 후히 주어서 하나님으로부터 후히 받는 것이 경제적으로 뻥튀기 식 계산이 가능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으로 온전히 들어온 자라면 자연히 이웃에게 후하게 주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여전히 정욕과 죄악의 잔재가 남아 있을지라도 최소한 기도하여 성령의 인도와 충만을 구하면 예수님 닮은 자로 그분이 변화시켜 주시기에 그분의 사랑 또한 주위에 나눌 수 있게 된다.

바꿔 말해 신자만이 현실적 형편과 여유가 남들보다 형편없어도 오히려 나보다 그런 면에서 나은 이웃을 참 사랑과 섬김으로 도울 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은 오직 이 땅의 물질만 추구하지만 그것으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식으로 갈급함을 전혀 해소하지 못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영적 충만 없이는 인간에게 참 기쁨과 만족이 없는데 바로 그것을 신자만이 누리고 또 이웃들에게 나눠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신자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으면 얼마든지 예수님처럼 감정마저 온전하게 표출, 절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생을 거는 소명이 현실적 형편과 여유에 일희일비하는 것에서 하늘의 보물을 이 땅에 옮겨 심는 것으로 이미 바뀌었고 또 그 일을 실제로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3/11/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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