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로 큰 죄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3:8,9)
아버지가 잔디를 깎다가 급한 전화가 와서 잠시 외출해야 했습니다. 잔디 깎는 기계를 정원 곁에 두고 아들에게 갖다 올 동안 절대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는 제대로 작동도 못하면서 잔디를 깎아 기계는 고장 나고 정원도 완전히 망쳐버렸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와 아들에게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정원을 망치려 한 적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기계가 고장 나고 정원이 망쳐진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언제든 다시 고치고 새로 심으면 되었습니다. 아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 가슴 아팠기에 그것을 따지려 한 것입니다. 기계가 고장 나고 정원을 망친 것은 죄가 아니라 죄의 결과입니다. 그보다 아버지 말을 듣지 않은 불순종이 죄의 본질입니다.
아들은 왜 잔디 깎는 기계를 못 만지게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밀기만 하면 얼마든지 쉽게 작동되고 잘 깎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재미있어 보이는 일을 못하게 하다니 나를 골탕 먹이려나보다 오해했습니다. 나아가 잔디를 잘 깎아 아빠가 오면 놀라게 해주어야겠다고 자신만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빠는 아들이 기계를 만지면 어떤 결과가 되리라는 것을 빤히 짐작했었고 또 자칫 잘못 작동해 아들이 다칠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선악과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들 “선악과를 먹은 것이 무슨 큰 죄가 되느냐? 왜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어 열매가 항상 보이게 해놓고선 못 먹게 했느냐?”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마치 잔디 깎는 기계를 정원 바로 곁에 두고 간 아버지에게 잘못이 있는 양 불만을 가지는 아이와 같습니다. 정원이나 기계를 망친 것보다 근본적으로 아버지 말을 안 들은 것이 문제이듯이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보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또 불순종 이전에 거역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 연유가 더 문제입니다. 아들은 그 신나는 일을 아빠 혼자서 하려고 자기에게 잔디 깎지 못하게 했다고 아빠를 불신하고 원망까지 했습니다. 아담도 선악과를 먹어서 당신 같이 되는 것을 시기해서 하나님이 억지로 금지시켰다고 의심하고 불평했던 것이 불순종의 죄를 범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범죄하자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기는커녕 인간으로서의 자존감마저 무참히 깨어지고 두렵고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동산 구석에 숨은 그를 하나님이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았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었거나 숨바꼭질의 술래를 찾은 것도 아닙니다. “네가 항상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전혀 엉뚱한 곳에 가 있지 않느냐?”라고 물은 것입니다.
그럼 그 자리는 어디입니까? 아담은 불순종의 자리에 빠졌기에 당연히 그 이전에 있었던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리입니다. 그가 동산의 어디에 숨었던 지리적 위치는 아무 문제 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라고 말한 대로 아담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 낯을 피했습니다. 자신이 꼭 있어야 할 위치에서 고의로 벗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이 반드시 서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피하지 않는 곳입니다. 아니 피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분의 낯을 보러 기쁨과 감사함으로 뛰어나가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축복받은 은혜의 장소이자 참 인간이 서 있어야 할 곳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반역을 하나님은 이미 다 아시고도 아담이 돌아오기를 날이 서늘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괜찮았지만 이제 사단의 하수인이 된 그들이 해가 지면 더 고통스러워진다는 것까지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으로 인도코자 회개를 촉구했지만 인간은 오히려 숨었습니다. 혹시 지금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낯을 피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하나님이 오히려 더 안타깝게 찾고 계심을, 그것도 날이 서늘할 때에, 잊지 마셔야 합니다. 또 숨는 것은 불순종 다음으로 큰 죄라는 것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10/16/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