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은 누구입니까?
[질문]
“사람이 땅 위에서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창6:1-4)
상기 구절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은 대체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것입니까? 실제 천사라고 하는 자도 있고 또 용사라고도 해석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은 경건한 셋 계통의 사람이라고 하는데 어떤 해석을 받아들여야 하는가요?
[답변]
상기 본문은 성경 중에 가장 난해한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신학자와 주석가들 중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당연히 일반 신자들은 어느 해석을 따라야할지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한 사항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악에 빠짐으로써 노아 홍수의 심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 원인을 밝히는 구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직접적 원인이 어떤 비정상적인 결혼에서부터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은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이 과연 누구인지 여부입니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문제가 됩니다. 사람의 딸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없이 외모만 뛰어나고 세상의 향락을 쫓는 죄인을 상징한다는 데에 큰 의견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과 순서는 당연히 단어, 문장, 문단, 문맥에서의 의미를 먼저 밝힌 후에는 각 개별 책과 성경 전체에 일관된 뜻과 맞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논리 추론에 있어서 연역적, 귀납적 방법이 동시에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문단 안에서의 문자적인 해석이 기독교 교리와 합당한지 역으로도 따져 봐야 합니다. 마치 산수에서 검산을 하는 것과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선 대표적으로 귀족, 타락한 천사, 네피림, 셋 계열의 경건한 자의 네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각각이 주장하는 바를 문맥에 비추어 재검토하고 또 기독교 교리에 견주어 보도록 합시다. 만약 논리적 흐름이 부자연스럽고 교리에 비추어 부족하거나 모순되는 점이 파생하면 아무래도 그 해석은 미비한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귀족의 자녀
유대교에선 전통적으로 귀족의 자녀들과 천민의 딸들로 봅니다. 이는 문맥상은 물론 성경 전체의 뜻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해석입니다. 우선 성경은 사람을 귀족과 천민으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다 같이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로 하나님 안에서 평등할 뿐입니다. 구약시대에 비록 왕이나 귀족들이 있었고 또 사회적 특권을 누리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필요에 의한 인위적 제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엔 모든 인간이 동일할 뿐입니다.
나아가 본문은 인류를 모두 멸망시켜야할 만큼 죄가 만연된 이유를 밝히는 내용입니다. 그럼 그런 결혼 이전에는 천민에게만 죄가 있거나 많았고, 귀족에게는 죄가 없었거나 적었다는 이상한 뜻이 되어버립니다. 귀족이 천민과 결혼하는 것 자체로도 죄가 되지 않는데 그로 인해 전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면 성경은 이상한 사교(邪敎)의 경전으로, 성경의 하나님은 어리석은 인간의 상식조차 무시하는 독재자로 전락할 뿐입니다.
타락한 천사
일부 개신교단과 유대랍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타락한 천사 같은 영적 존재로 해석합니다. 천사가 인간 여성과 성적 관계를 가졌고 그 사이에 네피림이라는 거인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문자적 해석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몇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우선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대구적(對句的)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대표적 예로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욥1:6)나,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네 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단3:25)를 듭니다. 이 구절들에선 하나님의 아들들 혹은 신들의 아들은 분명 천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단 혹은 사람과 대조시킨 표현인데 본문에서도 같은 용례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또 영계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누리던 아침의 아들 계명성, 루시퍼 천사 즉, 사탄은 스스로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타락하는 바람에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습니다.(겔28장, 사14장) 이때 사탄은 수많은 부하 천사들을 끌고 나왔는데 바로 이 타락한 천사들 중 일부가 사람의 딸들과 관계를 맺어 네피림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 앞에 너무나 큰 죄인지라 하나님께 벌을 받아 드러나게 활동을 못하고 현재 구덩이에 갇혀 있다고 봅니다.(눅8:31, 계9:2) 그러다 마지막 대환난 때에 옥에서 풀려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은 자들을 괴롭힌다고(계9:3-11) 해석합니다.
그러나 우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사람들, 특별히 하나님과 계약 관계에 있는 경건한 자들을 가리키는 용례로도 종종 등장합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틀을 밀지 말라.”(신14:1)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신32:5) 이스라엘을 두고 여호와 혹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던들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시73:15) 이 시편의 저자는 세상에 악인이 형통하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굽는 것 같아 보여 잠시 믿음에 흔들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그런 생각을 주위에 발설했더라면 온전한 믿음의 세대들에게 크게 잘못을 범할 뻔 했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분명히 “주의 아들들”은 악인들에 동조해서 배교했던 자들(10절)과 대조되는 표현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심지어 인간을 신이라고 칭한 경우마저 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시82:6) 본 시편은 재판장들이 공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 주제로서 당시 재판장들을 높여서 신, 지존자의 아들 등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이에 대하여는 성경문답 사이트 #116 “요10:33-36의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의 글을 참조바랍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구약성경에선 오히려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로 더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또 천사는 영적 존재로 육체적 몸이 없기에 인간 여자와 성적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인간과 유사한 육체로 나타나긴 해도 인간에게 하나님 내지는 사탄의 뜻을 계시해주는 것이 목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천사로 신자를 섬기게 하거나(히1;14), 욥의 경우에서 보듯이 악한 천사로 신자의 믿음을 성숙시키기 위한 연단을 조성하는 일 두 가지 외에는 신자에게 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합니다. 만에 하나 인간과 육체적 교섭이 가능하다 쳐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사탄의 졸개를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표현할 리도 없고, 또 그렇게 표현한 적도 전혀 없습니다.
만약 사탄의 부하 천사와 인간의 성관계가 가능했다면, 선악과 타락 사건에서 이브와 뱀이 성관계를 갖는 바람에 죄가 들어왔다는 이단의 주장도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그런 비슷한 종류의 사탄 숭배 종교에게도 타당성의 빌미를 제공합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의 의미가 축소, 왜곡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타락한) 천사와 마리아 사이에 성관계가 있었고 예수님은 그 자녀라는 주장까지 제기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타락한 천사가 인간과 성관계를 맺어 노아 홍수 심판의 원인이 되었다면 성경 전체의 구속사가 이상하게 바뀌거나 새로운 해석이 첨가되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성경은 천사의 타락 역사가 되거나, 인간의 죄악이 천사로부터, 그것도 생물학적 유전으로 온 것이 됩니다. 또 천사가 사람의 딸을 취할 때에 인간은 도무지 거역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타락에 대한 책임이 인간에게는 없어집니다.
성경은 죄의 발단을 아담이 사탄의 꾐에 넘어가 스스로 하나님을 거역한 것에 둡니다. 또 그 결과로 영혼이 타락되었고 그 후손 또한 모두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상태로 태어나 진정으로 그분을 경배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구속의 방안도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타락된 인간의 영을 새롭게 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네피림
장부(丈夫)요, 용사요(싸움에 능한 자), 유명한 자들이 힘과 부와 명성으로 자기 마음에 드는 모든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다고 해석합니다. 또 이로 인해서 일부일처제가 붕괴되고 일부다처제가 성행했으며 그 여파로 결혼을 못하게 된 자들 사이에 동성애가 초래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적문란이 극해 달했던 노아홍수 당시의 사회상을 고발하는 단적인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문맥상 하나님의 아들, 네피림, 장부, 용사, 유명한 자들 모두가 일관되게 같은 사람들을 지칭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4절에서 네피림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문법적으로도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에 처음부터 그 타당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 주장을 가장 확실하게 변증해주어야 할 구절이 오히려 그 반대의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에도 나와 있듯이 네피림이 먼저 있었고 그 후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해서 용사를 낳았습니다. 그 용어들이 모두 같은 사람이라고 치면 이 구절은 결국 이런 말이 됩니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네피림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네피림이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 즉) 네피림이었더라.” 성경이 네피림이 이미 있었는데 다시 네피림이 태어난 연유를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면 이전의 네피림보다 더 강력한 네피림이 나타났다는 뜻을 여실하게 드러내어야만 합니다.
다시 잘 따져 봅시다. 이 결혼 사건이 있기 전에 이미 네피림이 있었습니다. 그럼 이전에는 네피림은 네피림끼리만 결혼하다가 이제는 네피림이 아닌 여자들과도 결혼했는데 여전히 네피림이 나왔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거인 족속이 소인 족속, 아니면 최소한 신체 크기에 상관없이 미녀들만 골라 결혼했는데 여전히 거인 족속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우생학적 실험 내지 유전자 변형을 이때에 이미 시도한 셈입니다.
무엇보다 본문은 죄악이 관영하여 전 인류가 심판을 받아야만 할 연유를 밝히는 내용입니다. 네피림이 이미 있었다면 그들은 벌써부터 외모, 신체에서 출중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이 역시 외모, 신체가 뛰어난 여자들을 취해 아내로 삼은 것이 심판을 부를 만한 큰 죄가 될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으로선 당연한 일이자 어찌 보면 선한 일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잘못은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질서인 일부일처제를 붕괴시키고 일부다처제를 시행했으며 그 부작용으로 동성애를 만들어낸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폭력성과 일부다처제의 기원은 창세기 4장의 가인의 족보 가운데 라멕의 검가에서 이미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또 라멕의 아내들의 이름의 뜻이 ‘아다’는 ‘꾸미는 자’를, ‘씰라’는 ‘딸랑거리는 자’를 말하듯이 세속적인 외모와 조건을 중시하는 풍조도 이미 성행했습니다.
성경이 본문에 와서 다시 그런 뜻을 기록했다면 일부다처제가 더 번창하게 되었다는 설명 밖에 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위반한 성적 죄악을 가장 중요하고도 대표적인 죄의 예로 다시 들었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적 죄악을 유독 강조하게 되면 당시에도 노아 가족 외에 일부일처로 사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며, 결혼 못한 싱글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인류가 몽땅 심판을 받을만한 원인으론 아무래도 부족합니다.
또 외모와 신체만 중시하는 네피림은 사실상 이미 죄 가운데 있었던 셈입니다. 말하자면 죄인이 다시 죄를 짓는다고 해서, 아무리 큰 죄라도 그 새로 지은 죄 때문에 심판하신다는 것은 아무래도 하나님의 심판 원리에 대한 불합리한 설명이 됩니다. 나아가 문맥의 흐름 상 “사람의 딸들”이 죄인의 대명사로 표현된 것은 확실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와 반대의 뜻으로 해석해야만 자연스럽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죄인의 아들들이 죄인의 딸들과 결혼하여 죄인들을 낳았기에” 노아 홍수로 멸하기로 했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당신을 경외하는 자를 통해서만 다스립니다. 구원과 심판의 원리도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먼저 적용됩니다. 죄악에 빠진 자는 그 불의하고 상실한 마음에 그냥 버려두시는 것이 심판의 원칙입니다. 아담의 원죄로 인해 모든 피조세계는 이미 하나님의 저주를 크게 받았습니다. 가인이 친동생을 살인했어도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고 단지 알고만 있다는 이유로 보호해주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 했습니다. 즉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여 구원한 백성들로 이 땅을 다스리려는 뜻이었습니다. 처음 창조 때에도 하나님의 뜻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고 당신 뜻에 순종하는 자녀를 통해 이 땅을 당신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리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당신의 백성에게 집중되어 있고 그들을 통해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한 마디로 당신이 택하여 당신을 아는 자들까지 우상종교와 간음하여 철두철미하게 타락해가는 과정을 일관되게 밝혀 놓은 책입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어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본문의 하나님의 아들이 네피림이라면 이미 죄에 완전히 빠져 있는 특정 종족의 인간이 성적 타락을 더 심하게 했기에 전 인류를 몽땅 물로 심판하기로 했다는 제한적인 뜻이 됩니다.
노아 가족을 구원해주신 이유를 역으로 따지면 자연히 다른 이들을 심판한 원인도 알 수 있습니다. 노아 가문은 당대에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믿은 유일한 의인들이었습니다. 그럼 심판의 원인은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아무도 하나님을 믿기는커녕 찾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본문은 반드시 이 땅에 노아를 제외하고는 의로운 자들이 한 명도 없었던 이유를 밝혀주는 기록이어야만 합니다.
셋 계열의 하나님을 아는 경건한 자
상기의 세 의견들을 분석해보았더니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경건한 자들로 해석하는 것이 그 의미의 흐름상 가장 자연스럽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우선 성경의 기록된 순서에도 반드시 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무작위순이나, 저자 혹은 편집자의 개인적 편의, 선호, 사상에 따라 배열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성령이 영감하여 순서는 물론 일점일획까지 하나님의 뜻이 반영된 무오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본문이 속해 있는 앞뒤 순서를 보십시오. 앞에는 셋 계열의 자손을 밝힌 노아의 족보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직전에는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바로 뒤에는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심판을 하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합니다. 요컨대 본문은 심판이 있게 된 까닭을 노아 계보와 연결시켜서 말씀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창세기가 가인 계보와 셋의 계보를 분명히 구분시킨 의미를 감안해야 합니다. 가인의 계보는 알다시피 물질문명을 추구하고 욕심껏 세속의 쾌락을 탐하는 자들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채 스스로 세상 주인이 되어 인간의 능력으로 먹고 마시는 것에만 안락과 형통을 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성경은 셋 계보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그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5,26)
하나님이 비록 아담과 이브에게 원죄의 대가로 벌을 내렸지만 구원의 은혜를 받을 약속의 씨를 아벨과 셋을 통해 심어주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그 씨를 통해 여자의 후손 즉 예수님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셋 족보에는 죄악의 기록은 없고 두 가지 특징 즉, 나고 죽었다는 것과 에녹의 승천기록이 나타납니다. 인간에게 죄의 삯은 사망임을 보여주되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영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기준은 인간이 저지른 죄의 범과보다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느냐에만 달렸다는 뜻입니다.
그런 약속의 계보에 이어서 본문이 나타나는데 처음 시작한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사람 즉, 약속의 씨와 약속 밖의 사람을 망라하여 인류 전체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홍수심판의 원인은 오직 사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천사가 개입할 여지는 아예 없습니다.
또 3절에서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라고 합니다. 그럼 심판 전에는 하나님의 신이 사람과 함께 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영을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하니까 심판의 직접적인 원인이 하나님의 신이 함께 했던 사람들로 인해 생겼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네피림이 같은 네피림 내지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과 결혼하여 죄가 더 확대되었기에 심판이 왔다면 이전의 네피림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이 또한 아무래도 부자연스런 해석입니다.
다시 성경에 기록된 의미의 흐름을 따져 봅시다. 본문 앞에는 하나님을 아는 경건한 자들이, 그것도 비록 죽음을 맞기 했지만 아주 오래 살았다고 합니다. 또 그 중에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하늘로 데리고 간 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나아가 장수했으므로 당연히 땅 위에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뒤에는 하나님은 사람 지은 것까지 한탄하시고 경건한 자들의 후손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다 멸망시킬 결단을 했습니다.
그럼 중간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전체적으로 그 논리상 자연스런 흐름이 되겠습니까? 그 경건했던 약속의 씨들까지 심판해야만 하는 이유를 반드시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뜻의 흐름은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경건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네피림들로 인해 일부다처제가 생기고 동성애 죄악까지 번창하므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기로 했다.” 아무리 해도 앞뒤가 맞지 않는 설명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태초부터 영원토록 인간의 죄악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이 모이는 곳에는 고대나 지금이나,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죄가 들끓기 마련입니다. 하나님 당신을 진심으로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는 종교적 배타성이 그 이유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해 하나님을 등진 데서 모든 도덕적 죄악이 발발하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도 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인간의 자격, 조건, 공적 하나 없이 오히려 죄악 중에 있었음에도 누구라도 십자가 은혜 앞에 나오는 자는 구원해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심판의 원인이 죄악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무릎 꿇지 않았다는 것 아닙니까?
이는 신구약 성경을 통 털어 일관된 원리입니다. 본문에서도 모든 사람이 육체가 되었기에 심판할 것이라고 합니다. 육체가 생물학적 Body 를 말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사건 전에도 사람은 육체를 가졌습니다.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떠난 상태 즉, 하나님을 자신의 영혼에서 지워버리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순간 육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육체가 되었기에 남은 것은 심판뿐입니다.
본문을 해석할 때에 자꾸만 결혼이라는 사건과 그에서 태어난 후손들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나의 비정상적인 결혼이 심판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나아가 그 후손도 그 결혼의 영향을 받아 천하에 포악한 죄인이 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연히 이 특정 결혼사건을 구체적 논리적으로 해명해야겠다는 욕심이 앞서게 되며 자연히 하나님의 아들, 결혼, 장부, 네피림, 유명한 자 같은 단어의 문자적 해석에 무리하게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차 강조하듯이 죄의 출발은 하나님을 배역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죄도 이미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자기가 그 자리에 서겠다고 의도적으로 불순종의 마음을 먹은 것이 행동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의 하나님의 아들도 이미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한 죄가 먼저 생긴 결과로 사람의 딸들과 결혼한 것입니다.
분문에서 아들과 딸이라고 해서 나머지 반대쪽 성(性)을 가진 사람은 무죄하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결혼을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딸이라고 하지 않고 구태여 아들이라고 남성을 강조한 이유는 우선 천사가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고, 또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르면 남자에게 권위와 책임이 있으며, 나아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연합하라는 계명대로 결혼의 주도권이 남자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장부, 네피림이라는 말에도 도가 넘치는 흥미를 보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럼 자칫 고대에는 아주 큰 거인족속이 있었는데, 그것도 가인의 후예들이 그런 반면에 셋의 후예들은 소인족속이었다는 이상한 뜻이 되어버립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2,33)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에서 신장이 장대한 대장부 네피림 후손을 보았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족속이 거인이었고 유대인들은 왜소했다는 역사적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흔히 “메뚜기 신드롬”이라 불리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본 것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장부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탐꾼들이 겁에 질려 가나안 족속을 과대 포장하여 묘사한 것입니다.
또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름대로의 이유는 가나안은 이미 철기 문명으로 개화되었고 수많은 전쟁 경험으로 무기체계와 군대가 잘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사백년간 애굽에서 막노동 노예 생활만 하여 변변한 무기 하나 없고 아말렉 족속과의 전쟁(출17장)을 제외하고는 전투 경험도 없었습니다. 누더기를 걸친 거지 떼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연히 가나안 족속이 대장부 같고 신장도 더 커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장대했다고 해도 거인과 소인을 나눌 만큼의 차이는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도 네피림, 장부, 용사, 유명한 자 등을 꼭 거인족속과 연결시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네피림은 가인의 후손들로서 이미 창검을 소지했고, 일부다처제를 시행했고,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욕정을 채우며 세상 쾌락에 물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세상을 움직이고 인간을 높이는 능력이 재물과 권력뿐이었는데 그 둘을 독점한 것입니다. 자연히 커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거인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육신의 크기가 본문의 해석에 별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땅이 전부인줄 알고 눈에 좋고 아름답게 보이는 대로만 살았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의 풍요와 안락만 구했습니다. 이브가 원죄를 범했던 이유대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들만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서로 다투고 죽여 가며 차지했습니다. 또 그런 죄는 가인에서 발단되어 라멕을 거쳐 그 계보 내에선 이미 번질 대로 번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셋 계보 사람들도 가인 계보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너무 부러워진 것입니다. 차츰 그들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닮아가고 또 혼합되어서 결국에는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두 족속의 결혼으로 인해 그런 타락은 더 급속도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이 지면에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자는 노아 가문 밖에 안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말씀드리지만 본문에서 무두가 동의하는 바는 노아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상기 넷의 해석을 각기 대입해도 어쨌든 결과적으로 모든 인간이 완전히 타락했다고 여기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귀족과 천사와 네피림으로 보는 경우는 상기에서 진술한 각각의 구체적인 논리적 신학적 결함은 제쳐두고라도 이미 하나님과 등을 진 존재들이 특정한 결혼을 했고 또 그로 생긴 후손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을 결심했었다는 뜻이 됩니다. 반면에 셋의 후손으로 보는 입장은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는 자들마저 완전히 타락했기에 심판을 했다는 뜻이 됩니다. 둘 중 어느 쪽이 문맥과 성경이 말하는 바와 더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해석인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7/10/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