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낙원 같은 삶을 살 수 있는가?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
아담이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 받은 벌에 대하여 오해하는 신자들이 꽤 있습니다. 우선 범죄 전에는 바닷가에서 여름휴가 보내듯이 에덴동산에서 아무 하는 일 없이 편안하게만 지냈다고 봅니다. 노동을 범죄한 후의 벌로 받은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범죄 전에도 아담은 노동을 했습니다.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2:20) 동산의 모든 생물들을 하나님 대신에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돕는 배필, 즉 함께 일할 동반자로 이브를 만드신 것만 봐도 그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범죄로 인해선 노동의 질과 성격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벌 받았기에 노동이 더욱 과중하고 고통스러워졌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물론 피조 세계도 함께 벌을 받아서 이전에는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2:9)하신 하나님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했습니다. 분명히 노동이 에덴에서보다는 더 힘들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작 더 큰 고통은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 오직 사리사욕만 채우는 노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것은 평생을 일해야만 할 뿐 아니라 자기가 먹는 목적으로만 노동 하게 된다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다스려야 할 노동의 참 목적은 사라졌습니다.
유흥 및 휴식을 뜻하는 leisure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콜레’인데 나중에 영어 School(학교)이라는 단어로 발전되었습니다. 고대에는 배우는 일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또 즐겁게 배우며 일하는 것이 바로 참 휴식이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범죄 전의 아담은 일하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배웠고 또 그것이 자신의 기쁨이었습니다. 창조에 드러난 그분의 완전한 진선미(眞善美)가 자기가 대신 다스리는 동식물에서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니 얼마나 즐겁고 신이 났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낙원은 인간의 일터가 노동 현장을 넘어 실습 교육장과 참된 휴식처가 될 때에 비로소 성취됩니다.
그러나 범죄 후로는 오직 자기 힘으로 개인적 목적만 달성하려 노동하니까 힘에 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 지식과 능력에만 의존하니까 열매도 풍성히 맺지 못하고 맺혀도 기쁨이 없습니다.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을 위해 노동하니까 경쟁이 격심해지고 각종 시기와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나 살게 된 땅은 헛된 열매를 맺으며 아무 배움도 없이 고통만 양산하는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어떻게 구원으로 초대했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8-30) 창조 당시의 에덴동산으로 다시 초대한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여전히 멍에는 져야하지만 예수님께 배워서 쉽고 가벼워지며 마음의 쉼도 얻을 수 있습니다. 노동, 학습, 휴식 셋을 삶의 현장에서 자기 일을 하면서 달성하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범죄 이전의 아담이 하나님이 시킨 일을 하였듯이 신자는 반드시 예수님이 지어주는 멍에를 메어야만 합니다. 즉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즐거워지려면 주님이 주시는 소명으로 알고 또 일을 통해 실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 뜻 안에서 하지 않는 노동은 괴롭기만 하고 그분의 이 땅을 향한 구원의 진리를 전혀 배울 수 없습니다. 그분의 영광이 실종되어서 아무리 일해도 참 휴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육신적 병이 없는데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괴롭다면 소명 없이 오직 자기 목적만 채우려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10/17/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