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낙원(失樂園) 이후의 영성 훈련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3,24)
답답하셨던 하나님
어떤 신자가 주일 예배만 건성으로 보다 보니 자꾸만 정서적으로 안정이 안 되며 뭔가 갈급해졌다. 영적인 충만감이 없어진 것이다. 동료 신자의 권유로 그 동안 게을리 했던 새벽 경건의 시간을 정말 오랜만에 다시 시작했다. 첫날 아침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하는데 문득 "하나님이 그 동안 얼마나 갑갑했을까? 내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참 많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신자들이 경건의 시간을 잘하고 있다가도 얼마 안 가 자기도 모르게 게을러진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영성 훈련의 목적을 스스로 믿음을 키우려는 측면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영성 훈련을 잘 해보고자 시작했던 동기가 오히려 그것을 망치는 원인이 된다는 뜻이다.
신자들은 사실 너무 거룩하고 온전해지려고만 한다. 자꾸 자신의 죄를 없애고 도덕적으로 선해지고 인격적으로도 거룩해지는 일에 모든 신경을 쏟는다. 그러다 보니 기도하고 말씀 보는 만큼 그런 부분에 상당한 진전이 있어야 한다고 기대한다. 그러나 현실의 삶에서 부닥치는 자신의 실제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에 자연히 갈등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도저히 절제가 안 되어 속에서부터 솟구치는 정욕과 죄성이 시도 때도 없이 자기를 넘어트리고 세상의 아주 작은 유혹도 믿음으로 이기기는커녕 순식간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너무나 자주 경험한다. 그러면 오늘 아침에 그렇게 열심히 말씀보고 기도했는데도 왜 이렇게 되는지 알 수 없어 힘이 빠진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자라려고 너무 애를 쓰다가 오히려 지치고 실족한다.
영성 훈련을 해야 할 참된 목적과 이유는 우리 자신이 거룩해지는 것보다 사실 딴데 있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그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겠는가? 아직 죄가 들어오기 전이라 정말 순수하고도 단순하게 하나님을 믿고 사랑했을 것이다. 한 치의 의심이나 불만이나 의심이 없이 그랬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것이 가능했는가?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고 동행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동산 중앙에 서 있는 선악과가 언제든 그분의 상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죄 한 후에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벌을 받았다. 언제나 볼 수 있던 하나님이 아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마에 땀을 흘리는 고생과 수고가 끝이 없다는 것만이 실낙원(失樂園) 징벌의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항상 직접 뵈올 수 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지 못하게 된 것이 인간에겐 가장 큰 벌이었다.
따라서 범죄 이후의 인간에게 절대적인 과제 두개가 생겼다. 첫째는 선악과를 다시 자신의 영혼의 동산 중앙에 심는 일과 둘째는 그 나무를 항상 쳐다보는 일이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매일 그분과 동행하여야 한다. 그런데 신자의 경우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셨다. 오직 그분의 뜻대로 살기로 했다. 이제 남은 일은 두 번째 과제뿐이다.
영성 훈련의 바른 출발점
그리스도를 닮아감에 있어 신자들은 자꾸만 도덕적 종교적으로 접근하려 든다. 윤리적으로 선해져서 이웃을 사랑하며 교회에서 성실히 봉사하는 일에 주력해야만 신자로서 책임을 다하고 믿음이 성숙한 양 믿는다. 그래서 영적 훈련도 그런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을 쌓고 실천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선악과를 다시 자신의 삶의 중앙에 모셨다면 이제는 그 선악과를 매순간 쳐다보는 일만 남았다. 하나님을 직접보고 듣고 해야 한다는 말이다. 신자가 고상해지거나 신령해지는 것이 영성 훈련의 일차적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을 매일 만나는 것이 더 급선무다. 영성 훈련은 문자 그대로 영이신 하나님과 영으로 대화를 하는 훈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말씀 보고 기도하는 일이 신자의 지정의 범위 내에서 자신의 노력으로만 일방적으로 이뤄져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시간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나아가 더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오랜 만에 경건의 시간을 가졌던 그 신자가 "하나님이 그 동안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텐데 들으려고 그분 앞에 나가지도 않았으니 얼마나 갑갑했을까"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영성 훈련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렸으니 바로 그분을 듣고 본 것이지 않는가?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가장 첫번째 일은 하나님 당신을 더 잘 알아가는 것이다. 모든 신자는 이 땅에서 자기가 속한 어떤 공동체이든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서 있다. 그분의 뜻대로 살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 할 부름을 받았다. 그분의 뜻을 더 잘 실현하기 위해선 그분에게 더 많이 듣는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아담이 범죄 한 이후에 생명나무를 옮겨서 그 가는 길을 막았다는 것은 인간이 가만히 있다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은 그분의 일방적 은혜로 가능하지만 그 후에는 반드시 보고 들으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만 그렇게 해 주신다.
신자가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도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 최우선적인 목적이지 자신의 종교적 실력을 높이는 것이 결코 아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주력하는 일, 즉 죄를 씻고 소원을 아뢰며 인격도 거룩하게 바꾸며 또 주위에 그분의 사랑을 나눠주려 해도 그분을 먼저 보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 절차는 생략하고 바로 자기 힘으로 그런 일들을 하려 한다. 그 결과는 뻔하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데 그분의 인도하심이 있을 리 없고 당연히 열매는 전혀 맺히지 않는다. 많은 신자들이 기도와 말씀에 금방 싫증이 날 수 밖에는…
경건의 시간에 하나님을 직접 보고 듣는 절차가 빠져 있거나 등한히 하면 아무리 열심히 오랫동안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하고 말씀 보아도 그분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어쩌면 신자 자신의 감정을 한풀이처럼 쏟아 놓았거나 의지적으로 종교적 의무를 다한 것 밖에 아닐 수 있다.
반면에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듣고 본다면 당장에는 그것이 아무리 작고 미세해 보여도 신자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정말 세상이 주는 평강과 위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능력이 넘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위대하며 그분의 빛이 한 줄기라도 비취면 바뀌지 않을 영혼이 세상에는 없다.
그래서 그 빛에 비추임을 받은 자는 자기도 깜짝 놀랄만한 신령한 열정에 사로 잡혀 그분에게 전인격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자신의 삶과 인생을 그분의 뜻대로만 쓰임 받기를 소원하고 완전히 그 분께 바친다. 나아가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하나님을 보고 듣기를 자꾸 더 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하면 할수록 경건의 시간이 재미 있어 더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먹을 것이 풍족한 곳에 있어서 굶어서 죽는다는 상태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한다. 처음에 굶으면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괴로워 한다. 그러나 차츰 잘 먹지 못해 몸이 쇠약해지고 정신이 무디어지면 식욕마저 떨어진다. 그러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어떤 한계를 넘으면 음식을 눈 앞에 뻔히 보고도 음식을 먹고 싶은 상태가 전혀 되지 않는다. 영적인 기아가 영적 사망으로 옮겨가는 것도 이와 하나 다를 바 없다.
신자의 삶이 현실적으로 형통치 않고 기도하고 말씀 보아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는 것 같아 영적으로 갑갑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말씀 보아도 하나님의 계시는 제대로 보고 듣지 못해 아니 보고 들으려고 하지 않아 영적으로 피폐해졌고, 그 눌려진 영혼이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쳐 갑갑해지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자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하게 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오히려 그런 신자를 보고 더 갑갑해 하신다는 것이다. 정말 들려주고 보여줄 당신만의 은총과 권능이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는데도 제대로 전해 주지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갑갑해 하실까 말이다.
영성 훈련을 너무 거창하고 신비롭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신자가 갑갑해질 때에 하나님이 더 갑갑해 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 출발점에 서서 선악과를 매일 쳐다보는 일 외에는 신자의 영혼이 자랄 수 있는 길은 결코 없다. 우리 영을 충만케 하실 이는 하나님의 영 뿐이기에 그분을 만나 듣고 보지 않고도 영적으로 풍성해지라고 기대하는 것이 더 이상하고 어리석지 않는가?
2/14/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