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悔改)와 변상
회개는 막연한 흐느낌이나 울컥거림이 아닙니다. 혹은 자기 연민이나 한(恨)의 표출은 더욱이 아닙니다. 다만 회개는 죄에 대한 고백이며 옛 삶으로부터의 단절과 분리요 새로운 삶을 향한 전환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철저한 변상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명하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17:30)
회개는 성경의 근본적인 교리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내가 믿기로 그것은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거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진리들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다른 교리들보다도 회개(悔改, 메타노이아 - 헬, 마음을 돌이킴 - 참고), 중생(重生, regeneration, 거듭남 - 참고), 구속 등과 이와 같은 근본적인 교리들을 더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우리는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심사숙고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회개에 대해 정의하라고 요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이상하고 잘못된 정의들을 내릴 것입니다. 오히려 근본적인 진리에 있어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것들로부터 돌아서지 않는다면 복음을 믿거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침례 요한이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까지 그는 오직 한 구절,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라는 말씀에 의지하였습니다. 만약에 그가 계속적으로 이 진리를 말하여 어린 양되신 그리스도를 지시하는데 실패하였다면, 그는 많은 것을 결코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까
그리스도가 당도했을 때, 그리스도도 역시 동일한 광야의 외침을 던졌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그리고 우리 주님이 그의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도 동일한 진리, "사람들로 회개케 하라"(막6:12)는 지침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 분이 영광을 받으시고 성령이 임하셨을 때에도 우리는 베드로가 그 오순절에 동일한 외침, "회개하라"는 말씀을 외쳤던 것입니다. 그 당시 그러한 경이적인 결과(행2:38-47)를 가져온 것도 이 설교 -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그는 "이제 어디서든지 사람을 다 명하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17:30)라는 진리를 전심으로 외쳤음을 봅니다.
내가 회개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기 전에 먼저 간단하게 회개가 아닌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합니다. 회개는 공포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서로 혼동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놀라고 두려워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에게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 임하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진실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두려움이 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사람들을 모욕하며 악을 행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만 갑자기 위험이 닥치게 되면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들이 회개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폭풍우가 지나가면 그들은 이전같이 동일하게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와 애굽땅에 재앙으로 치실 때에는 바로는 회개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떠나자마자 바로의 마음은 이전보다 더 강퍅해졌습니다. 그는 죄로부터 돌이키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동일한 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속에는 참된 회개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종종 죽음이 한 가정에 닥치게 될 때 그 사건은 그 가정 안에 있는 사람들을 회개로 이끌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6개월 정도가 지나면 모든 것은 잊혀지고 맙니다. 아마 이것을 읽은 독자들도 이러한 경험을 했을 줄 압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들에게 임할 때 마치 그들은 회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련이 제거되면 그 인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맙니다.
회개는 감정(feeling, 느낌 - 참고)이 아닙니다
또한 회개는 감정이 아닙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일종의 이상한 감정의 자극을 기다리는 사례를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이키고자 할 때 야릇한 감정이 오기까지는 회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볼티모어(Baltimore)에서 사역했을 때 나는 약 900명의 죄수들에게 매 주일 회개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 당시에 통회 자복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풍성한 감정들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매주에 감옥 속에서 울음소리가 반시간 정도 계속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형을 마치고 석방되었을 때 그들 대부분은 다시 그들의 옛 삶의 방식으로 돌아갔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에 슬픔을 느낀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또한 당신은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시련의 기간에 슬픈 감정을 보이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죄를 범한 사실 때문에 혹은 하나님의 면전에서의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문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그것은 마치 그 시련이 참된 회개로 결과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감정은 너무나 자주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회개는 금식이나 신체적인 고행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상당 기간 동안 금식하지만 한 가지의 죄도 회개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회개는 후회가 아닙니다. 유다는 가서 목을 매어 죽을 만큼 철저한 후회를 했지만 그것은 결코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믿기로 만약에 그가 주님에게로 가서 자신의 얼굴을 땅에 파묻고 자신의 죄를 회개했었다면 그는 분명히 용서함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제사장들에게 갔고 그후에 결국 자신의 생명을 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모든 종류의 참회를 했다 할지라도 거기에 참된 회개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이 사실을 명심하셔야 됩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죄를 위하여 당신의 몸의 열매를 드려도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이런 환상에서 벗어나십시요.
회개는 죄에 대한 정죄가 아닙니다. 이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깊은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온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 끼의 식사도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런 상태로 몇 개월 동안 하였습니다. 그러나 회심은 결코 일어나지 아니했으며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정죄 의식과 회개를 혼돈하지 마셔야 합니다.
기도가 회개는 아닙니다
이 말 역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혼의 구원문제에 대하여 염려하면서"나는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어"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이들은 이러한 행위가 자기가 소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지만 그것이 결코 회개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르짖을 수 있지만 그것이 곧 회개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회개는 어떤 한 가지의 죄를 끊는 것과 동일시할 수 없습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이 맹세하고 술을 끊었습니다. 한 가지의 죄를 끊는다고 해서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가지 악을 버린다는 것은 꺽어야 할 전체 가지 중에 다만 한 개의 가지를 꺽은 것에 불과합니다. 남에게 모욕을 잘주는 사람이 남을 저주하는 것을 중단했더라도 그가 그 모든 죄로부터 돌이키지 않는다면 결국 철저한 회개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그 영혼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결과라고 볼 수 없습니다.
회개는 전 영역에 파급되는 충격 그 자체입니다. 회개를 한 부분에 제한시키는 것은 인간의 기만이요 속임수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그 나무 전체를 절단하여 토막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모든 죄로부터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만약에 내가 바다에서 배를 타고 항해를 한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런데 배의 세 네 군데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하여 한 군데를 땜질을 하였지만 다른 곳을 조처를 못했다고 합시다. 결국 그 배는 물 속에 침몰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내가 세 네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고 가정합시다. 내가 한 곳은 응급조치를 하여 치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두 세 군데 상처가 간과되어 치료를 하지 못했다면 내 생명은 곧 끝장나게 될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단지 한 두가지 죄만을 제거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러면 회개는 무엇입니까?
아마 당신은 그러면 도대체 회개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을 것입니다. 나는 "완전히 돌아서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아일랜드 언어에서 "회개"라는 단어는 "온전히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한 방향으로 걷던 사람이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정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돌아서십시오. 돌아서십시오. 만약에 돌아서지 않는다면 당신은 죽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너무 감정을 많이 가지고 있든지 아니면 너무 적은 감정을 가지고 있든지 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가 죄로부터 온전히 돌아서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것입니다. 회개는 역시 "마음의 변화"라고 묘사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 교훈하신 비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되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마21:28-29)
맏아들이 "가겠나이다"라고 대답하고 곰곰히 생각하고 마음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아마 그는 스스로 이렇게 중얼거렸는지 모릅니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존경심을 가지고 순종하지 못했어. 그는 나에게 가서 일하라고 했는데 나는 일하러 가지 아니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것 같애." 그러나 그는 비록 이렇게 이야기했을지라도 결국 일하러 가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결코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면 실제로 밭에 나가 괭이를 잡고 일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에 대한 그리스도의 정의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죄를 버릴 것이며 그분의 뜻을 행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회개는 돌아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얼굴을 하나님으로부터 돌린다고 합니다. 만약에 그가 만약에 진실로 회개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바르게 돌아설 것이며 자신의 옛 삶을 가차없이 포기할 것입니다.
인간은 단번에 회개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단번에 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돌아서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마음을 바꾸는데 6개월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뉴펀들랜드 연안을 항해하는 배 한 척이 있었습니다. 그 배가 해안선에 가까이 진입하고 있을 때 선장이 방향을 바꾸고 다시 돌아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만약에 그때 뱃머리를 돌렸다면, 그 배는 침몰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돌이키기가 이미 늦어버린 때가 있습니다. 내가 믿기에 우리 인생에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과 파멸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나는 이 시간 내 죄를 회개하고 그것들로부터 돌아서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할 때가 있다고 봅니다.이때는 하나님의 간섭의 때요 부르시는 때인데 만약에 이 때 결단하기를 주저한다면 결국 기회는 떠나가고 맙니다.
당신은 감정이 풍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당신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깨달음이 있다면, 곧바로 돌아서서 "나는 더 이상 이전처럼 반역과 죄의 길을 걷지 않기를 원합니다"라고 외치십시요. 그리고 그 후에 당신이 기꺼이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돌린다면 구원은 당신의 것일 것입니다.
나는 성경에 기록된 회심의 모든 경우가 즉각적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회개와 믿음은 매우 돌변적으로 옵니다.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결정하는 그 순간 하나님은 그에게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힘을 주시지 않으면서 그 어느 것을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회개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회심은 30초 안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히오 지방에 있는 주도적인 복음 전도자들 중의 한 사람이 얼마 전에 자신의 회심에 대한 편지를 나에게 보내왔습니다. 그것은 즉각적인 회심의 순간에 대하여 매우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19세 때에 벨몬트에서 기독 법률가와 함께 법률서적을 읽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그가 외출을 하자 그의 아내가 나에게 '나는 당신이 나와 함께 오늘 밤에 모임에 같이 가서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여 당신이 우리 집에 올 때마다 가정예배를 함께 드렸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다시 그의 집에 오자마자 나의 약속이 아직도 유효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당신과의 만남이 계속되는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모임에 줄곧 나가게 되었습니다. 약 12명의 사람들이 조그마한 교실에 모여 있었습니다. 모임의 지도자는 나와 다른 두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그는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 불현듯 나는 그가 내게도 말을 건네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혼자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가끔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스쳐가자마자 그는 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친근하게 '찰스 형제님,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아주 침착하게 '예, 있습니다. 나는 방금 30초 사이에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하였으며 또한 당신이 나를 위하여 기도해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나의 침착함이 그를 매우 당황하게 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나의 신실성을 의심하는 듯하였습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별 말을 하지 아니했으며 다른 두 사람과 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 공부를 마칠 무렵에 그는 나를 바라보면서 '찰스 형제님, 마감 기도를 해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내가 공기도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 순간까지도 아무 감정이 없었습니다. 나는 두 가지 생각 사이에서 고민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 생각은 내가 기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생각은 내가 이미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이야기 했기 때문에 기도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나는 후자의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 기도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무릎을 꿇기 시작한 순간과 내 무릎이 마루바닥에 닿은 순간의 아주 짧은 시간 사이에 주님은 나의 영혼을 회심시켜버린 것입니다.
내가 기도 시에 첫 번째 언급한 내용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나는 기도가 끝난 후에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아니했습니다. 왜냐하면 내 영혼이 너무 충만해서 다만 '영광'! 밖에는 달리 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 이후 마귀는 감히 나의 회심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찬양할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다만 일종의 신비로운 감정, 즉 어떤 신비로운 종류의 믿음이 임하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어떤 사람ㅇ게 몇 년전부터 전도를 해왔는데 그는 나에게 항상 동일한 답변을 하였습니다. 무려 5년 동안 나는 그를 회심시켜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매년 그는 항상 "아직 감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니, 무슨 뜻입니까? 무슨 감동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는 "글쎄 나는 무엇인가 내 마음 속에 부딪치는 것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 감동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이 보는 것처럼 볼 수가 없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예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 위에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 즉 용서하심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십니까? 그분은 당신이 회개하고 그분께 나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그러나 그 사람은 항상 이런 자기의 논리 속에 빠져 있어서 도무지 그 생각을 바꾸지 아니했습니다.
아, 가련한 사람! 그는 결국 이러한 미지근한 상태로 살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60년 동안 하나님은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내뱉은 말은 "아직 감동이 일어나지 아니했어"라는 무책임한 변명이었습니다.
막연한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성경 어느 곳에도 사람에게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하나님은 지금 회개하라고 긴급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용서받기를 원치 않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하나님이 이런 상태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용서하셨다면 그는 과연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간다면, 하늘이 그에게 지옥과도 같을 것입니다. 천국은 준비하는 백성을 위하여 준비된 곳입니다. 만약 당신의 자녀가 나쁜 짓을 하고 회개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를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당신의 서랍을 열어 10달러를 훔쳐 다 허비하였다고 생각해봅시다. 당신이 집에 들어왔을 때 당신의 하인은 당신의 자녀가 행한 일을 다 고했습니다. 드디어 자녀가 돌아왔습니다. 당신은 그에게 사실 여부를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부정합니다. 결국 당신은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죄를 실토하지 않고 회개의 빛을 보이지 않게 될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신은 "그래, 내가 용서하마, 이 문제는 잊어버리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회개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주정뱅이, 도둑놈, 창녀, 뚜쟁이에 상관없이 -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너무 자비하셔"라고 좋아합니다.
오 친구들이여! 이 세상 신에게 속지 마십시요. 참된 회개와 죄에서의 돌이킴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만나시거나 축복하지 않습니다. 신실한 회개가 일어날 때까지 축복을 보류하실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은 것은 매우 큰 불의를 그에게 행한 것이었습니다. 회개가 없는 곳에는 참된 화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실수를 행치 않습니다. 다윗은 재판의 실수로 인하여 문제에 봉착하고 있을 때, 그는 자기의 아버지를 권좌에서 쫓아내고 왕에 등극했습니다.
세인트 루인스의 부르크스 박사(Dr. Brookes)는 회개에 대하여 아주 좋은 정의를 내렸습니다: "회개는 엄격하게 말한다면 마음과 목적의 변화를 의미하며 결과적으로 그것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또한 자기 중심적인 신뢰를 버리고 오직 죄인들의 구세주이신 주님과 관계하여 자신에게 심판을 언도하는 것입니다. 구원하는 회개와 구원하는 믿음은 함께 움직이며 또한 당신이 믿는다면 회개에 대하여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회개'했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간혹 회개를 더 많이 해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신다고 생각하여 이미 회개한 것을 또 반복적으로 회개하는 불신앙적인 사례들이 많습니다.그러나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충분히 보여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이미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우리가 자비를 하나님께 요청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충분하게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또한 만약에 당신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당신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인도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당신의 눈물과 고뇌가 그분을 감동시켰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분의 사랑의 마음에 불명예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을 회개로 인도하는 것'은 당신의 결단이 아니며 다만 하나님의 결단입니다. 회개에 이르는 길, 그것은 결국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의 의로움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회개가 진짜인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참된 회개가 있다면 당연히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웃에게 악을 행했다면 우리가 그 손해 당한 이웃에게 배상하기 전에는 하나님께 우리를 용서해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내가 어떤 사람에게 큰 불의를 행한 후 변상할 수 있을 경우에 그가 그것을 변상하기 전에는 결코 하나님께 용서해달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내가 내 것이 아닌 물건을 취했다고 생각합시다. 나는 그것을 배상하기 전까지는 용서를 기대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큰 도시에서 설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신사처럼 보이는 한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마음이 매우 불행하게 보였습니다. 그는 주저하다가 "사실 나는 사기꾼입니다. 나는 내 고용주의 돈을 사기쳤습니다. 내가 그 돈을 갚지 않고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까?"라고 말을 꺼냈습니다. 나는 그에게 "현재 돈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자 그는 큰 돈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약 1500달러를 탈취했는데 현재는 900달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돈을 가지고 사업을 해서 돈을 번 다음에 다시 갚아도 되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은 사탄의 유혹이며 그 돈을 가지고 결코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에 일단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가지고 그 고용주에게 가서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용서해달라고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나 그들은 나를 감옥에 넣을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라고 애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기대하기 전에 그 돈을 먼저 갚아야 합니다." 그는 "그것은 너무 힘이 들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힘이 드는 일이지요 그러나 그 일을 하니 않을 때에는 더 큰 영적인 짐을 지게 됩니다"라고 나는 권면하였습니다.
그의 짐은 너무 무거운 것이어서 그가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950달러와 몇 센트의 돈을 나에게 건네주고 나에게 그 돈을 그 고용주에게 돌려주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다음날 나는 두 고용주들과 교회의 옆방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돈을 그들 앞에 내놓고 이 돈은 그들의 고용인들 중 한 사람으로부터 취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나는 그 동안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으며 그에게 용서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이 두 고용자들은 두 뺨에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용서하구말구요! 우리는 그를 아주 기쁜 마음으로 용서하겠습니다"라고 흔쾌히 승낙해주었습니다. 나는 계단으로 내려가서 그를 불러왔습니다. 그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무릎을 꿇고 아주 축복스러운 기도 모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만나주셨고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해주셨습니다.
얼마 전에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한 친구가 자신과 자신의 재산을 하나님께 봉헌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전에 정부를 상대로 거래를 하면서 상당한 돈을 착복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회심하자 이 일이 마음에 걸려 큰 고민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는 내 재산을 헌금하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기쁘게 그것을 받으실 줄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심각한 갈등에 빠졌고 그의 양심이 발동하여 그를 강타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1500달러짜리 수표 한 장을 미국 재무성에 송달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는 이러한 결단을 통하여 하나남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산출한 것입니다. 나는 믿기로 작정한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빛을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도 자신이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빛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봅니다.
나는 일전에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겨우 32세 정도 되어 보이는 머리털리 아주 흰 어떤 사람이 나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당신은 내가 32세밖에 안되었는데 이렇게 머리가 희어진 사정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나는 12년 동안 아주 무거운 짐으로 인해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나는 "아, 그래요. 그 사정 이야기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혹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까 하여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습니다. 그후에 그는 말을 계속 이었습니다.
"나의 부친은 돌아가셨고 나의 어머니에게 시골 신문사를 유산으로 남겨주셨습니다. 그녀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직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신문사는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자금 사정이 상당히 어렵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의 모친이 빚더미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목격할 때마다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문사와 그 건물은 약 1000달러 보험에 들어있었습니다. 결국 내가 20살 때에 그 건물에 불을 놓았고 1000달러의 보험을 타서 모친에게 드렸습니다. 12년 동안 이 죄는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나는 방탕과 쾌락으로 그것을 내 뇌리에서 지워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저주하였습니다. 나는 철저한 죄악의 구렁텅이 속에 빠져들어갔습니다. 성경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믿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저항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이 모든 세월 동안 나는 고문 같은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그 고통으로부터 헤어나올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변상하십시요. 여기 앉아서 그 이자를 계산해봅시다. 그후에 그 돈을 그 보험 회사에 되돌려 주십시요. 사람은 아직도 희망의 빛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결단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 주자 그는 만약에 자신이 용서함을 받을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돈과 이자를 계산하여 갚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오늘날 자신들이 기꺼이 죄로부터 돌아서서 그것들을 고백하고 변상하지 못함으로 어두움과 속박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고서 용서함을 받으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용서와 자비의 시대입니다
당신은 이 말을 너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회개할 수가 있으며 그 무서운 죄악의 전과를 깨끗이 말소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자신에게로 이끌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세상 후에는 결코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간혹 당신에게 죽음 후에도 회개할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성경에서 이러한 사실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성경을 아주 주의 깊게 연구하였지만 사후에 또 다른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왜 또 한번의 기회를 요구할까요? 당신은 지금 회개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신의 죄로부터 돌아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18:32)
그리스도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노라. "당신은 죄인입니까? 그렇다면 회개하라고 부르는 그 요청을 거절하지 마십시요. 당신의 머리를 구세주의 발 앞에 쳐 박고 당신의 죄책을 고백하십시요.세리는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여러분은 그가 얼마나 신속하게 용서함을 받고 축복함을 받았는지를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여러분을 의롭게 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당신의 죄를 위하여 내어 주신 그분의 의를 힘입어 의인으로 간주하실 것입니다.
아마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필요성이 없게 됩니다. 그들은 마치 자기와 다른 사람들, 즉 "토색하는 자 불의한 자 음란한 자 혹은 저 세리와"같은 사람들과 같지 않다고 하나님께 감사한 바리새인과 동일한 사람들입니다. 그 바리새인은 계속하여 말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였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나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 대한 판단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사람 (이 불쌍하고 회개하고 통회하는 세리)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눅18:11-14).
"죄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이 범죄 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3:10,23).
어느 누구도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각자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자리를 찾도록 하십시다. 그것은 바로 죄인의 자리입니다. 그후에 하나님은 그를 높이 들어서 용서함과 의롭게 하심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
하나님이 중심으로 통회하는 자의 참된 회개를 볼 때마다 그분은 그 영혼을 바로 회개의 자리에서 만나 주실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The Way to God And How to find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