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시작
에덴 동산에서
안식일은 분명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첫사람 아담을 지으시고는 만족하셔서 안식하셨다고 합니다. 안식일의 기원이 하나님께서 쉬셨기에 유대인들의 사고에서는 피조된 사람들은 당연하게 쉬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때만해도 안식일은 율법적인 조항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아브라함 이후에 약 430 년만에 모세를 통해서 시내산에서 돌판에다가 세겨서 언약을 맺고 주신 것입니다. 원래 안식일은 강제조항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2:2-3)
하나님께서 쉬셨다는 것은 사람처럼 힘이 들어서 쉬는것으로 보면 옳지 않습니다. 이 날에 안식하셨다는 것은 창조하신 작품에 더 이상 따로 보충하거나 수정할 것이 없이 완전했다는 의미에서의 쉼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시며 만족하셔서 창조하실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소설을 쓰는 작가는 더 이상 원고에 손을 댈 필요가 없으면 작업을 그만하고 쉬는 것과 같습니다. 뭔가 부족하고 찝찝하면 계속 수정을 하고 고치느라 밤을 새울것인데 그럴필요없이 스스로 만족해서 웃으면서 그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의 쉼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날을 복주셨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동물들과 식물들과 공중나는 새들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 하라고 복을 주셨습니다. 땅도 복을 주어서 씨를 맺는 열매를 나게 하시고 복을 주심으로 자연 만물들에게 번성의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이 모든것들을 첫 사람 아담에게 주시며 다스리고 보존하도록 위임을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에게만 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들에게 생명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복을 허락하신 것이지요. 이때의 아담은 오늘날처럼 자연 환경을 보존하기 위하여 땅을 파고 거름을 주는등의 노동을 하는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삶이었습니다.
일의 개념이 지금처럼 노동을 동반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막힘이 없는 관계속에서의 자유함 이었습니다. 이때는 물론 죄가 들어오기 전이었지요. 하나님과 관계를 가로 막는 죄가 나타나기 전이었으니까 아담이 할수 있는것은 누림을 통한 안식함이었지 노동을 동반한 일의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물론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들에게 주신 복을 유지하고 있다는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만물을 소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복은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자연 스스로가 자생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비록 타락한 죄인들 이지만 반드시 회복 되어야 하고 도로 찾아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보존하시고 다스리시고 태양이 계속 비취면서 은혜를 공급하도록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출19:3-8)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표준새번역-출20:8-11)
너희는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의 소와 나귀도 쉴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여종의 아들과 몸붙여 사는 나그네도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출23:12)-표준새번역-
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에게 주의 말씀과 법규를 모두 전하니, 온 백성이 한 목소리로 주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을 지키겠다고 대답하였다.(출24:3)-표준새번역-
그리고 그가 '언약의 책'을 들고 백성에게 낭독하니, 그들은 "주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을 받들어 지키겠다"고 말하였다.(출24:7)-표준새번역-
안식일이 에덴동산에서와 모세에게 준 십계명에 재정한 안식일이 다르게 적용이 되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죄가 들어 오기전에 안식일과 죄가 들어와서 타락한 시대의 사람들중에 아브라함과 새운 언약으로 특별하게 구속하신 이스라엘 백성들과 시내산에서 다시 갱신하는 장면입니다. 분명하게 율법으로서 반드시 지켜야할 계명으로서 준 법입니다. 그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지켜야할 안식일의 원래의 뜻은 "너희는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의 소와 나귀도 쉴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여종의 아들과 몸붙여 사는 나그네도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출23:12)-표준새번역- "라고 분명하게 소와 나귀와 종들과 나그네를 위한 배려 때문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은 또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의 법이 본질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연약한 사람을 위하여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언약에 기초한 율법입니다.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간 조건을 이행하겠다는 서약에 동의함으로써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언제부터 있었을까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아마도 성경에서 말하는 최초의 율법이라면 아담에게 명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는 계명일 것입니다. 이 명령은 첫 사람 아담에게 주신 명령이며 최초의 율법입니다. 관련 성경을 찾아본다면 아래와 같습니다.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창2:15-17)-표준새번역-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아담이 필요한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창조 세계는 사실은 아담을 위하여 만드신 것이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완전하시고 충만하시고 뛰어나시고 풍성하십니다. 부족함이 없으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모든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자유 의지까지도 허락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민중에서 죄악으로 멸망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만이 참 신이며 창조주이심을 알게 해주시려고 택한 족속이 이스라엘입니다. 제사장 나라로서 본을 보여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섬기는가를 실제 삶속에서 보여서 그들로 돌아와서 구원을 받기를 원하심 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아갈 때 이미 죄악과 우상 숭배와 타락한 풍속에 빠지거나 혼합되지 않고 성별된 민족으로서 당당하게 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와 법도는 반드시 지켜져야만 했었고 이방에서 빛을 발해야만 했었다는 것입니다만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은 엉뚱하게 율법으로 오히려 이방인들을 정죄하고 자기들을 의롭게 들어내는 도구로 이용을 하고 만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형식화되고 규범화되고 철저해질 수록 율법은 죄를 범할수 밖에 없는 올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거룩해지고 구별되어지기 위하여 율법을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은 이방의 풍속들이 더 좋아 보여서 조금씩 섞이고 혼합되어서 그들과 언약을 맺거나 서로 결혼을 하거나 화합하지 말라는 계명을 자연스럽게 무시해 버리면서 급기야는 율법의 근본 정신마저 왜곡시키고 변질시켜서 겉모양은 엄숙한데 속은 텅 비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부패가 언제까지 되었는가하면 예수께서 오셨을 때까지 그렇게 전통화 되고 관습화 되어서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들이 지키는 율법은 생명이 없는 이방인들이 우상에게 행하는 제사와 동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안식일과 예수
이미 어두워질대로 어두워진 유대 땅에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걸어 다녔지만 누구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오신 왕을 알아 볼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모태에서부터 성령으로 태어난 세례자 요한만이 증거를 하였으나 아무도 예수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표적들을 행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정작 대망의 오실 메시아를 그들은 목마르게 기다렸지만 알아볼 수없을 만큼 어두움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더구나 당시의 기득권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갑자기 나타나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갈릴리의 나사렛 출신의 목수의 아들 예수가 달가울리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가 있고 말씀으로 귀신들을 쫒아내시는 권능을 보면서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한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와 제자들을 살피기 시작하였고 고소할 죄목을 잡으려고 비상하게 계획을 짜기에 바빴던 것입니다. 인간이 누리고 있는 풍요로움과 명예와 안락함은 진리를 가로막는 적입니다. 모세의 전한 율법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가르치는 율법사들조차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혀 알지 못한것입니다. 이것은 그리 놀라운 현상은 아닙니다. 어둠에 있으면 빛을 싫어하게 되고 거절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 이라고까지 험악한 소리를 들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전혀 알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자부하는 그들이라해도 탐욕과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니까 진리이신 예수를 못알아보는 것입니다. 똑같은 죄인이라해도 탐욕과 자랑과 교만에 가득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진리를 대하거나 만나는 자세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그 한가지 예로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신것에 대하여 분을 낸 것입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유독 안식일에 주님은 회당이나 성전에서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바리새파의 전통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온 그들은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그 일을 행하셨을까요?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범한 것입니다. 즉 죄인인 것입니다. 한번은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
그 무렵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서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12:1-2)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죄목으로 고소할 거리를 발견한 것이고 얼마나 좋았던지 큰소리로 책망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모세 율법에 돌로 쳐 죽이라고 까지 기록되었으니 이들은 흥분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동안도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주시기도 했지만 직접적으로 손을 사용하거나 하시지 않으시고 말씀으로만 하셨으니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는데 오늘은 제자들이 이삭을 비비는 일을 한것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의외의 반응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 밖에는 먹지 못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범해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책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12:3-6)
예수께서 성전보다 더 크시다는 선언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참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말씀을 하시는 것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권위를 감히 그 순간에 감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도 그런말을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로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어쩌면 고소할 죄목이 더 생겼다고 속으로 좋아라 하느라 반응을 안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사울 왕에게 쫒기던 다윗이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도움을 청한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분명 다윗이 거짓말을 한 것을 제사장은 알았지만 배가 고파서 호소하는 다윗을 안식일이라고해서 성전에서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을 거절하지 않고 주었다는 것입니다. 아히멜렉은 안식일보다 생명을 살리는 것에 더 의미를 두고 실천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건을 잘 알고 있을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안식일의 핵심을 짚어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가 죄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12:7-8)
율법과 안식일의 정신을 도무지 모르는 그들에게는 청천 벽력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곧 하나님이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재정한 사람이다는 것입니다. 법을 만들고 집행할 수 있는 권세가 나에게 있는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고 하십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으시고 다시 회당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안식일에 행하시려고 작정하신듯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어도 괜찮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마12:10) 이에 대하여서"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것을 잡아 끌어올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은 괜찮다." (마12:11-12)
지금 예수께서는 구약의 율법을 완전하게 재해석 하시는 중입니다. 어려워서 고민하며 율법에 매여서 참 하나님의 사랑과 본 뜻을 몰라 무거운 짐을 지느라 곤비한 인생들에게 직접 오셔서 의문을 풀어 주시고 계십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들어 와야만 합니다. 선지자들의 예언과 율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율법을 율법으로 해석하려고 서기관들이 아무리 수 백년동안을 발버둥을 쳤지만 결과는 사망에 이르는 것밖에는 없었고 백성들은 그 것때문에 죽을지경 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해석이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철학으로도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아니면 누구도 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신 것은 우리에게 은혜이며 구원인 것입니다. 예수 밖에서는 도무지 해결이 안되는 것이 율법이며 안식일입니다. 예수와 관계가 없는 유대인들이 하는일이 무엇입니까?
죄 없는자가 돌로 치라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다시 성전으로 들어가시니, 많은 백성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실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일을 놓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요8:2-5)
물론 이들은 간음한 여자에게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하여 고소할까만 궁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빙자해서 예수를 곤란하게 만들고자 시험하려고 꽤를 쓴 것이며 그들의 생각에 절묘할 만한 묘안인 것이며 치밀한 계획인 것입니다. 누구도 이러한 함정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는 완전한 음모였습니다.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리 배우고 똑똑하고 지혜롭다해도 율법을 전혀 모르는 무지한 자로 살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율법의 본래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예수 안에서 적용하지 못하면 오늘 우리들도 여전히 바리새파처럼 독을 머금고 사람들을 옭아매는 역할만 할것입니다. 교회가, 지도자들이 예수 안에 있어야만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것이고 그렇지 않고 구약안에서 율법을 보게되면 여전히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동일한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8:7)
예수안에서만 율법과 안식일이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모든것이 자유함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회당에서 이렇게 자신을 증거 하셨습니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눅4:18-19)
오늘 우리는 예수 안에서 살고 있습니까?
2008-09-29.[나그네 칼럼]- 제 7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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