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과 예수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인 세례 요한이 광야 에서 외쳤습니다. 마태는 요한을 가리켜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이 사람을 두고서,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마3:3)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 만에 이스라엘에 큰 변화의 시작이 꿈틀거린 것입니다. 예수가 등장하는 시대가 유대인들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심각한 공황기 였었습니다. 로마의 폭력과 힘에 철저하게 유린당한 주권과 빼앗긴 영토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만큼 심각하게 망가져 버린 것입니다.
한가지 유일한 자유는 유대인들의 마지막 보루인 신앙의 자유였습니다. 종교적인 행위만큼은 로마의 권위에 손상시키지만 않는다면 보장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당대를 호령한 로마 정치의 특색이랄 수있는 소수민족들이 억압에 불만을 품고 혁명으로 도발할 수 있는 싹을 잠재우기 위한 정치적인 정책이었겠지만 고통과 울분을 해소할 수 있는 마지막 숨통이 각 나라들의 종교를 인정해 주는 아량 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사람이 인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작용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종교적인 자유를 간섭하지 않게 되자 유대인들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성전으로 모였고 성전에서 제사장들의 입지는 높아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선지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목소리를 들은지 수백년이 지나버린 유대 백성들에게 오직 서기관들의 가르침만이 그나마 위로가 될 수 밖에 없었겠지요. 종교가 성행할 수록 주류들과 비주류들의 반목은 골이 깊어 가는 것이고 거기에는 정권과 종교가 결탁하는 부정이 관행이 되는 현상이 증가하는 것이고 의식있는 백성들은 종교에 회의를 느껴서 일탈해 버립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재 생산되어 왔고 한때나마 그 연결 고리를 끊고자 투쟁하며 개혁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번번히 뒤로 물러가는 퇴향적인 현상들의 반복은 이제 방관을 넘어서서 무시하는 것으로까지 일반화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종교적인 부정에 대하여 소리를 내고 항쟁을 한다는 것은 일말의 소망이 있다는 증거는 아닐까요? 그것마져도 쓸데없는 짓이라고 윽박지르면서 나홀로 독야 청청 하리라를 가르치고 뒤로 물러나 산으로 동굴속으로 들어가 버린다면 본인은 어느정도 영성을 누릴수는 있겠지만 준엄한 하나님의 책망을 피할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간에 세례자 요한의 등장은 잠자고 있던 유대인들의 가슴을 충동질 하는데 충분했었습니다. 모든것을 체념하고서 그저 주어지는 것을 견디느라 목석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겨울 동면기에 들어선 개구리처럼 죽은듯이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마음을 두드리는 천둥과도 같았고 벼락을 맞은듯한 충격속에서 눈이 열려지는 것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깨우는 작업을 요한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추상 같은 소리와 카리스마는 충분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말하였다.(마3:2)
요한의 등장은 온 유대에 큰 사건이었고 알 수 없는 흥분과 기대와 함께 유대를 들썩이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영향은 얼마나 컸던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부근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3:5-6) 절망과 좌절에서 모든것을 체념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구약에서 예언한 오리라 하던 그 메시아가 나타난것은 아닌가 라는 기대와 감격을 안고서 달려와서 세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과 핍박과 가난에 찌들었던 일반 백성들에게 구약의 율법을 제대로 지켜서 행하기에는 거리가 너무나 벌어진 것입니다.
갈수록 제도화 되고 규격화된 유대교의 율법적인 제사법과 성전의 규칙들을 따라 가기에 사회적으로 신분적으로 너무나 벅차서 성전을 떠나 산으로 들로 거리로 다니며 오직 먹고 살궁리에 허덕이는 하층민들에게 종교는 사치였고 거북한 문화였으며 상대적인 빈곤의 원인으로 보는 적대감으로 분노의 감정만 쌓일 뿐인것입니다. 그런 민초들의 깊은 상처들을 외면한 제사장 그룹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위에 자신들을 올려놓고 재판관들이 되어서 횡포를 일삼았던 것입니다. 유대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대적하는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경이 되어서 엄격한 댓가를 치뤄야 했으니 겉으로는 존경을 하나 뒤돌아서서 침을 뱉는 형국이 당시의 배경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역사적인 전통과 특별함은 민초들이라고 다를게 없었으니 마음을 가다듬고 제사장들에게 가서 희생 제사를 드리고 세례를 받고자 하였으나 갈수록 복잡해지고 무엇인가 쓸모있는 것들을 내어 놓아야만 출입을 할 수 있는 성전 제도로 인하여 마음을 졸이면서도 결국은 성전을 멀리 떠나갈 수 밖에 없는 민초들이었는데 어느날 선지자와 같은 이가 광야에서부터 나타나서 회개의 세례를 준다고 하는 소식이 들리니 귀가 번뜩이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빈 손으로 가도 마음으로 자복하기만 하면 세례를 준다는데 이번 기회에 받아야 하지 언제 또 받겠는가 하며 요단강으로 몰려 간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예수
오늘날은 교회도 돈이 있어야 다닌다 라고 푸념을 하는게 일반화 된것이 사실입니다. 그때도 그랬나 봅니다. 요한의 권위는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도 인정을 할 정도 였습니다. 얼마나 요한의 인기가 높았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온 백성들은 요한을 선지자로 믿었습니다. 당시의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들도 인정을 하고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온것입니다. 아니면 그들이 성전에서 제사장에게 받았던 세례로는 부족하다고 생각을 한 것일까요?
요한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이 많이들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3:7-10)
전혀 요한을 인정할 수 없는 부류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입니다. 분명 요한은 그들이 세례를 받으려고 온 것을 알았습니다. 고마워서 얼른 특별히 순서를 당겨서 해주어도 시원찮을 판에 모욕적인 욕설을 거침없이 내 뱉습니다. 가장 치욕적인 욕이 어쩌면 '독사의 자식들'이 아닐까요? 요한의 독설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아하~ 그래서 요즘은 모르겠지만 예전에 부흥강사들이 듣기 거북한 말들을 했다는 출처가 불분명한 카더라 통신을 들은 기억이 나는군요. 요한이 설마 원조?는 아니겠지요.
그렇게 당당한 요한이 한 사람이 자기에게 오는것을 보고서 완전히 기세가 꺽여 버립니다. 도대체 누가 왔길래 그런 것일까요? 당시 기득권 세력들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마져 안중에도 두지 않고 멸시했던 요한이 말입니다. 세례를 받고 감격하던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래집니다. 저 사람이 누군가?
그 때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오셨다.(마3:13)
예수가 와서 머리를 숙이고 세례를 받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인가를 아는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라며 저도 세례를 받고자 왔구나 하며 보는데 요한이 머뭇 거리며 쩔쩔매는 것이 아닙니까? 참으로 기이한 풍경입니다. 총독이나 왕이 와도 굽신 거리거나 위축되지 않을 것 같은 세례 요한이 왜 저리 어정쩡하게 행동을 하는 것일까요? 천하에 요한으로 하여금 순한 양처럼 만즐수 있는 저 사람이 누군가?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하며 사람들이 휘둥그래집니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는 손에 키를 들었으니,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마3:11-12)
요한의 고백을 들었는데 그렇다면 저 사람이 그 사람인가 하며 놀라는 것입니다.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곁에 있던 아이가 소곤 거립니다. '아빠 저사람이 누군데 요한 아저씨가 저러는 거예요?' '쉿, 조용히 하렴 세례를 받는구나. 좀 보자' 하며 아이의 질문을 잠시 비껴갑니다. 이어서 요한의 다음 말이 귓가에 들려 옵니다.
그러나 요한은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말렸다.(마3:14)
저는 세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오히려 세례를 예수님께 받고 싶습니다. 저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세요 하며 뒤로 물러갑니다. 의외의 행동에 사람들이 꿀걱하며 한껏 의혹의 눈으로 현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진행이 될것인가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강력하게 거절하는 요한에게 다시 예수는 이렇게 조용히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 그제서야 요한이 허락하였다.(마3:15)
나그네버전: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 형, 지금은 그냥 세례를 제게 해주십시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저는 세례받고자 왔습니다. 요한 형이 도와줘야 합니다. 주께서 그것을 원하시며 나를 보낸 것입니다. 어서 해주십시오. 괜찮습니다.
지금까지는 굉장히 엄숙하고 중요한 우주적인 세례식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별거 아니지만 예수의 특별한 세례는 요한의 물 세례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인으로서 죄인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것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이며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복입니다. 그 놀라운 복을 우리에게 나눠 주시려고 회개할 것이 없으신 예수께서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례자는 꼭 하나님의 보내신 자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난자이며 나실인으로서 모든 삶을 하나님께 드린 자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요한의 만남은 우연히 만난것이 아니며 창세전부터 준비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나누면서 다음부터는 예수의 이미지를 완전히 성경으로 조명해 보려는 무리한 일을 해보려고 합니다. 얼마나 계속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아직까지는 제가 스스로 계획해서 하는 일이란 얼마 못가서 중단이 되었던 경험들이 있습니다만 어떤 식으로든 방향은 조금씩 수정될 지언정 지속되리라 생각합니다. 만일 그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저의 발상이나 욕심이라면 곧 중단되겠지요.
어떻게 어떤 길로 이끌어 가실지를 전혀 예상할 순 없지만 주의 이끄심에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8-10-05.[나그네 칼럼] 제 11 호 http://cafe.naver.com/pray153/741
계획하신대로 예수님의 이미지를 성경으로 조명하시는 글들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계속해서 잘 진행되길 바라는 마음간절하네요.
힘내셔서 좋은글들 앞으로도 많이많이 부탁드립니다. 주안에서 평안하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