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서 나오는 사랑의 감정은 눈빛과 행동, 말투 등등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여간해선 잘 감추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감정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느낌이 다시 서로의 감정을 자극하는 상승작용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떠올릴 때에도 당연히 그런 느낌을 기대합니다. 창조주의 사랑이기에 더 큰 환희와 감정적 고양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거나,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다른 무엇으로도 느낄 수 없는 황홀경을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만드시고 뭇 생명을 정연한 질서 안에서 존재케 하시는 것이 바로 그 분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질서, 창조주의 창조 목적 안에서는 피조물 또한 사랑, 그 자체가 됩니다. 그렇게 존재 자체가 사랑이 된 피조물이라야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따뜻한 위로나 보살핌을 사랑이라고 속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육신의 본성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드러운 말과 너그러운 생각, 양보와 희생이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인본적인 기준에서 비롯된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이 세상과 우리의 존재, 즉 창조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이토록 악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곧 하늘의 위로일 뿐 다른 사랑, 다른 위로는 없습니다.
우리가 과연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곰곰 생각해보면 우리가 원하는 사랑과 위로는 우리의 헛된 욕망이 낳은 사생아일 뿐임을 알게 됩니다.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이 신자는 물론 이 세상에 대해 행하시는 모든 역사에 당신만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신자에겐 현실적인 실패나 환난의 모습으로 다가와도 그분의 풍성한 사랑이 오묘하게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도 신자가 영적으로 정확히 분별하면 당연히 감정적으로도 너무나 감사하고 기쁘며 경이로운 두려움에 빠질 것입니다. 만약 그런 가운데 영적으로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사랑을 베풀었는데도 본인에겐 거꾸로 의심 원망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이 생기는 경우도 생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감정적으로 느낄 수는 없고 오히려 그런 경우는 드뭅니다. 대신에 믿음으로(이성적으로) 그 사랑을 깨달아 누린 후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감정이 따라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