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누군가를 믿는다고 할 때 혼자만의 다짐으로 믿지는 않습니다. '누구누구는 믿음직하다'거나 '그 사람은 나에게 믿음을 준다'와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의 평소 행실과,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 그리고 다른 이를 대하는 태도등이 일관성이 있으며, 예측 가능한 사람일 때 우리는 그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즉 믿음은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믿음의 대상으로부터 옵니다.
물론 우리는 일방적으로 '나는 너를 믿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얼핏 믿음이 주관적이거나 주체적일 수도 있다는 착각이 들게 하지만, 기실 이 말은 격려와 소망을 함께 담아 기대를 표현하는 관용적 수사에 불과합니다.
믿음이 믿음의 대상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모든 믿음을 부정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나만의 열심으로 믿은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그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하고 '내게서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아야 하는 까닭이 거기 있습니다. 믿음의 확신을 가지려 애쓰는 신자가 있는가 하면., 스스로의 믿음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찬 신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태도를 취하든 믿음을 오해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을 소망하는 자에게 믿음의 확신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육신을 입은 채 참 믿음 안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믿는 자는 언제나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화평코자 하고 의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흔히 '팔복'이라고 일컬어지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자기의'로 충만한 우리 모두의 믿음을 지적합니다. 일방적이고 편협한 지식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고, 나아가 율법의 열심으로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던 유대인들에게 주신 이 가르침은, 오늘날 주일성수로 대표되는 각종 종교적 이벤트로 신자연하는 우리에게 똑같이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은 대부분 소망과 기대를 담은 우리만의 믿음입니다. 이생에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세상의 복을 누리고 궁극에는 구원받아 천국에 가고픈 우리의 욕심이 반영된 가짜 믿음입니다. 참 믿음은 죄와 악에 찌들어 구제받을 길 없는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한 자에게만 은혜로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긍휼, 성령의 간섭으로 참 믿음을 알게 된 악한 죄인은, 믿음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진리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각오와 열심, 희생과 봉사는 믿음의 본령이 아닙니다.
믿음은 한없이 타락하고 끝없이 추악한 피조물인 나에게 일방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삶의 질을 개선해주는 수단이 아니라, 세상과 존재에 대한 본질적 의문과 갈증을 해소해주고, 삶의 참된 목적을 알게 해주는 궁극적 해답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