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무엇인지 몰라도 신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말이나 글로 조리있게 표현할 수 있거나, 상대방을 이해시키고 설득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교리가 대신하면 됩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세상의 다른 어떤 인간,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악하고 타락한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그 진리와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지 못하는 자는 아직 복음을 모르는 자입니다.
극히 뻔뻔한 몇몇을 빼고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에 대한 인식은 언제나 상대적입니다. 다른 이들의 죄와 비교하고, 상황과 처지에 따른 부분적 합리화를 통해 죄책에서 벗어나거나 최소화하는 것이 우리 대부분의 본능적인 생존전략입니다. 마치 중한 병에 걸리거나 커다란 상처를 입었을 때 병원에서 만난 더한 처지의 사람들을 보며 위로를 받는 것처럼.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죄와 악을 똑바로 볼 것을 요구합니다. 성경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근본적인 이유가 그것입니다.
관절과 골수를 쪼개듯 우리 죄와 악의 본질을 꿰뚫는 성경의 찔림은 자신의 죄와 악을 참으로 아는 자에게만 생명수가 됩니다. 죄와 악에 대한 막연하고 피상적인 우리의 인식과 태도로는 절대로 진리를 감당할 수 없기에, 불신자처럼 거부하거나, 신자라고 해도 기껏해야 우회로를 찾게 될 뿐입니다.
유대인들이 찾은 우회로는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죄를 알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죄를 이겼다고 믿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찾은 우회로는 양심입니다. 양심적으로 착하게 사는 것, 혹은 적어도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것을 선이자 의로 여기고, 교회 출석과 헌금과 봉사를 그 최소한의 증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성경은 우리가 의로워지려고 몸부림칠수록, 의를 행하려 애쓰면 애쓸수록, 의에서 멀어질 뿐이라고 말합니다. 신자의 당혹감은 거기서 비롯됩니다. 성경이 어렵다거나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오는 까닭은, 말씀이 우리의 상식과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과 기대는 무너져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너나없이 악한 죄인이니까요.
우리 각자의 상식과 기대가 무너진 그 폐허 위에라야 말씀이 진리로 섭니다. 우리의 상식과 기대를 보정하고 보충하여 더 나은 방향이나 더 좋은 것으로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 그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에게 복음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남다른 열심으로 의를 추구하는 자 역시 자기의 죄를 참으로 알지 못한다면 회심하기 이전의 바울이 그랬듯이 복음은 결코 복음이 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