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룻4:12)
이 구절이 눈에 들어 오고 나서 또 발동 걸렸다.
왜?
아마도 예수님의 족보 중 가장 읽기 거북한 부분이 이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 믿음의 조상 중 가장 읽기 거북한 부분 두 가지를 꼽으라면 유다와 다말이야기 그리고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 딸들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 해 본다.
그래서 늘 가졌던 생각이 성경에서는 이 부분의 이야기를 생략하고
다른 족보와 똑 같이 '유다는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라는 언급만 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성경은 이 부끄러운 사건을 정확하게 언급함으로써
성경의 모든 사건이 100% 정확한 사건임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로 이 사건이 언급될 수 있다. 라고 생각 하였다.
아마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비록 후손이 번창하기는 했으나 결과가 좋다고 과정까지 다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런 생각을 완전히 뒤업는다.
부끄러운 사건이기는 커녕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하고 축복하고 있다.
이 사건이 왜 축복일까?
그 당시 사람은 아직 다윗이나 예수님이 나지 않았는데도 이 사건을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자손들이 이 사건을 축복의 사건으로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대대손손 결혼을 하며 새로운 가정을 이룰 때마다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하며 축복하고 있다.
이제 그 당시 시대로 돌아가 보자 알다시피 그 당시에는 계대결혼법이 있다.
그래서 유다는 자기 며느리에게 첫째 아들이 죽자 둘째 아들을 주었다.
그리고 첫째 아들, 둘째 아들 모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 벌을 받아 죽었다.
유다는 세째 아들도 죽을까 봐 다말에게 주지 않았다.
유다의 이기심이다. 당시법을 따르지 않는 불법을 하였다.
결과에서 추측 해 보건데 그 당시 여자에게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자기 생명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자기 친정으로 쫓겨난 다말은 창녀로 변신하여 어느날 자기 고향 부근에 나타난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
오로지 다말은 어떻든지 자신도 자식을 낳아야겠다는 그 일념 하나만으로 이런 획기적인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이 사건을 두고 유다는 다말이 자기보다 옳았다고 평가하고 떠났다.
이는 곧 성경의 판단이기도하다.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다말이 지혜롭고 현숙한 여인 이었다는 것이다.
다말의 이런 지혜롭고 현숙한 행동으로 인해 유다의 자손이 완전히 끊길 수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유다 자손이 번창하게 되었고 그 후손들은 자손대대로 이 사건을 축복으로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 행동 하나로 인해 다윗도 나오고 예수님도 나오게 되었다.
다말은 이제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은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절망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이제 다말은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때 당시로서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합법적인 방법(잘은 몰라도 아마 그럴 것이다. 어쨋든 가족 안에서 해결했다.)으로 해결했다.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4:8)
세상 속담도 하늘이 무너져도 쏫아날 구멍이 잇다고 하지 않았나?
다말은 진퇴양난의 위기 속에서도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아주 기발하고도 현숙한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족보에 정확하게 기록하여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읽혀지고 있다.
만일 다말이 시아버지의 부당한 대우에 항거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았다면 유다의 자손은 거기에서 끝이었다.
다윗도 예수님도 유다의 자손이 될 수 없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두번째로, 그런데 성경은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는 표현을 쓴다.
유다가 한 일이라고는 창녀에게로 가서 동침한 것 밖에 없다.
유다의 입장에서는 진짜 부끄러운 것 밖에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주체가 유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장자도 아니고, 요셉같은 의로운 인물도 아니었다.
이 사건 외에도 유다의 일생을 보면 아무 내세울 것이 없다.
설교말씀에서는 애굽에서의 의로운 행동이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지만,
그가 저지른 죄에 비하면 그리 결정적인 행동이 될만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창녀에게나 들어 갔을 뿐인데 얼떨결에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다.
성경에서는 이런 자의 축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의 받을 복에 대하여 이르되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 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행2:35)
네 원수가 너에게 무릎 꿇을 때까지 너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내 우편에 앉아만 있으라 하는 내용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건 속에서 전전인 그 분의 은혜만으로 우리 인류 역사를 이끌어 가시겠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유다를 통해서, 부끄럽고 창피한 일만 한 유다를 통해서 그 분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나가시겠다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의 메세지이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오히려 부끄럽고 창피한 일만 하는 우리들을 통해서 그 분은 그 분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전적으로 우리에게 값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세번째로 하나님의 사건은 항상 극적이다.
그냥 평범하게 유다의 장자에게서 후손이 이어지고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게 할 수는 없었을까?
유다의 둘째까지 죽이고,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동침하고 난 이후에야 유다에게 자손을 주셔야 했을까?
이 극단적인 사건 속에서 유다의 역할은 아무 것도 없다.
홍해 사건을 비롯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일하실 때에는 사건을 극단적으로 만드셔서 인간의 개입을 완전히 차단하신 후 오직 자신만이 그 일을 행하셨음을 언제나 드러내신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아멘 주님 감사합니다.
아무한 일 없고 부끄러운 일만 한 우리들을 통해서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는 다 멸망의 자식으로 죽고 말았을 죄인 중의괴수이온데
이러한 죄인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를 값없이 구원 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로지 당신의 은혜에 감사하는 우리의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배승형님 계속해서 귀한 은혜의 말씀을 나눠주시니 운영자로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게시판에 잠시 떴다가 잊혀지기에는 아까운 마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