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19:14-20:6 세상이 듣기 싫은 말을 하는가? 10/26/2017
“바스홀아 포로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하셨느니라.”(20:6)
예레미야는 장로와 제사장들 앞에서 임박한 심판의 상징으로 도벳의 골짜기에서 옹기를 깨트려 보인 후에 여호와의 집 뜰에서 모든 백성에게 다시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했다. 제사장으로 성전 총감독인 바스홀이 그를 때리고 나무 고랑에 채워 하루를 가두어두었다.
풀려난 예레미야는 여호와가 주신 말씀을 바스홀에게 선포하는데 그로 인해 그의 모든 친구들이 그가 보는 앞에서 외적의 칼에 죽는다고 한다.(4절a) 흥미롭게도 잘못은 바스홀이 했는데 벌은 친구들이 받는다. 친구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바스홀에게 부화뇌동한 거짓 선지자와 백성들이다. 제사장들이 백성을 바로 가르치지 않고 거짓으로 예언한 잘못에 대한 책임을 엄하게 물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백성들도 그 거짓 예언을 듣기 더 좋아했기, 정확하게는 그것만 들었기 때문이다. 백성이 심판 메시지는 듣기 싫어하니까 선지자들이 그에 맞춘 것인지, 선지자들이 자기 지위를 보전하고 왕과 귀족들의 후원을 더 많이 받으려는 욕심에 거짓을 말한 것이지, 어느 쪽이 먼저인지 따질 필요는 전혀 없다.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저 나태하게 고난 없이 쾌락을 즐기는 것만 추구하기 때문이다. 죄를 회개하라는 메시지는 동서고금을 통해 결코 환영 받지 못한다.
바스홀이 목숨은 건지고 포로생활이 불편하기 해도 평안히 죽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제된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범했던 죄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임한다. 본인은 물론 모든 이로 어떤 죄로 심판받는지와. 당신의 공의가 완전함을 깨닫게 해주려는 목적이다. 나아가 심판 자체를 남은 자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로 삼는다. 요컨대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고 구원만이 그분 사역의 종착점이다.
바스홀은 시종일관 바벨론의 침공은 없고 하나님이 선민 유다를 심판할 리도 없다고 예언해왔다. 강대국 앗수르에 조공을 잘 바쳐왔고 또 그들 우상도 열심히 섬겼기에 앗수르가 어떤 대적도 막아줄 것이라고 착각했다. 문제는 자기들이 지은 죄는 전혀 회개할 생각이 없었다. 하나님은 무조건 자기편이고 거기다 다른 우상들과 세상 왕들에게 혹시 몰라서 적금 내지 보험을 들어놓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고 그분 뜻대로 행하는 것에는 아예 관심도 쏟지 않는다. 그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일이 절대 없다고 큰 소리쳤으니 그 반대로 벌을 받는 것이다. 그곳에서 평안히 죽는 것이 복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 큰 벌이다.
오늘날 많은 목자들과 신자들이 바스홀과 그의 친구들 같다. 진정한 거듭남은 없고 믿으면 구원받고 그 취소도 없다는 교리 하나만 동의 내지 믿는 척한다. 남은 일은 하나님께 복 받는 것뿐이다. 그분 뜻을 삶에 실현하는 데는 아예 관심이 없다. 세상 사람과 똑 같이 때로는 더 악하게 살고 있다. 목사가 신자들이 듣기 좋은 말만 했는지 신자가 그렇게 요구했는지 따질 필요도 이유도 없다. 진정으로 거듭난 목자와 신자라면 예레미야처럼 사람들의 핍박은 물론 반응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