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로 사흘 길을 떠난 적이 있는가?

출애굽기 강해 (12)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가 가도록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출3:18-22)

 

거짓말하라고 시키는 하나님?

 

모세는 하나님에게 출애굽의 소명을 받았지만 자기를 미워하는 동족들을 통솔할 자신이 없었다. 하나님은 히브리 선조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자세기 가르쳐 주고 그대로 설득하면 그들이 네 말을 들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젠 출애굽 소명을 실현할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할 차례다.

 

하나님은 먼저 모세더러 바로에게 찾아가 히브리인의 하나님 여호와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광야로 사흘 길을 가게 해달라고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또 그 이후의 전개될 상황에 대해 예언했다. 그런데 지금 애굽에서 탈출이 목표인데 마치 제사를 마치면 돌아올 것 같은 뉘앙스를 지닌다. 하나님이 다른 핑계 즉 거짓말을 하라고 시킨 것 같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상대와 여건에 따라 영악하게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유일한 존재다. 항상 완전한 선만 행하신다. 당신의 뜻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수행하는 방법도 거룩하다. 그것이 바로 “스스로 있는 자”라는 당신의 이름 야훼가 갖는 또 다른 의미다.

 

그러나 당신의 일을 당신께서 직접 나서서 행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당신의 종으로 부른 인간을 통해 일하신다. 인간관계 안에서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관습 제도 예의상식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금 모세가 바로에게 우리가 탈출할 테니 막을 생각하지 말라고 대놓고 말하면 격분을 살 것이고 대화는 완전히 단절될 것이다. 나중에 하나님이 주신 율법 신명기 20:10에도 전쟁을 칠 일이 있으면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고 명했다. 화답하지 않는 경우에만 전쟁을 치라는 것이다.

 

또 구약성경에 ‘사흘 길’이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당시 교통편이 열악해 말을 타거나 도보로 걸어야 하는데 사흘 길이라는 추적이 불가능한 먼 거리라는 뜻의 관용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로가 사흘 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 이미 노예생활을 종식시켜 달라는 요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한 그 말씀 그대로 순전한 당신의 뜻이었다. 털 끝 만큼의 인간적 계략이란 없었다. 바로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려고 부드럽게 표현할 의도도 없었다.

 

하나님의 순전하신 의도

 

하나님이 모세더러 바로에게 어떻게 말하라고 지시했는가? 가장 먼저 히브리인의 하나님 여호와가 우리에게 임했다고 통보해야 했다. 말하자면 이런 요청이 우리 히브리인들끼리 회의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애굽은 사백년 넘게 우리 노역으로 큰 이익을 보았지 않느냐? 우리가 공짜로 봉사해주었지만 지금 와서 보상을 요구하지 않겠다. 이쯤에서 제발 풀어주기만 해달라고 바로의 인간적 양심에 호소하여 선처를 바라는 뜻이 아니다. 상천하지의 유일하신 하나님 그분의 뜻이자 명령이고 우리는 그분의 말을 대변할 뿐이라는 뜻이다.

 

고대에는 각 나라마다 신들이 있었다. 그 신들끼리 다툼으로 민족의 흥망성쇠가 결정된다고 믿었다. 모세가 바로에게 전하는 말은 여호와라는 히브리인의 신이 애굽의 신들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셈이다. 여호와가 너희의 신들을 이길 수 있으니 이 말을 듣지 않으면 앞으로 생길 모든 사태는 너희의 책임이라고 사전에 분명하게 못을 박은 것이다.

 

이 말은 인간적인 영악한 계교와 거짓말과는 전혀 무관하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고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모세로서도 스스로는 상상도 못할 선언이었다. 그 말을 들은 바로의 심경이 어떠했겠는가? 한마디로 너무나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지난 사백년간 히브리인들은 속수무책으로 자기들에게 굴종해왔다. 히브리인들에게 신이 없다고까지 여겼을 것이다. 만약 있어도 자기들의 수많은 신들 중의 하나와도 대적을 하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바로로선 히브리 노예의 숫자가 창성해졌지만 군대조직은커녕 무기 하나 갖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통제해왔다. 그 동안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구태여 자기들 신에게 기도하며 신탁을 의뢰할 필요가 없었다. 만약 반역이나 탈출을 시도하면 세계 최강의 군사력으로 단숨에 분쇄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런 판국에 40년 전에 현상수배 되었던 살인범이자 애굽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아는 모세가 80 노인이 되어서 나타났다. 양치는 막대기 하나 달랑 들고서 지금 우리가 애굽을 탈출할 테니 막지 말라고 한다. 바로가 화가 치밀긴 커녕 콧방귀도 안 뀌었을 것이다. 이 노인이 실성(失性)했나 싶었을 것이다.

 

형상도 없는 여호와

 

알다시피 애굽에는 많은 신들이 있었다. 다들 거창한 이름과 장엄하고 위대한 형상의 조각도 세웠다. 지금껏 히브리인을 지켜봤지만 자기들 신의 형상을 세우지 않았다. 신의 이름도 없었다. 바로가 알고 있었는지 몰랐는지 불명하지만 자기들 선조에게 준 말뿐인 언약 하나 붙들고 있었다. 바로로선 히브리인들은 자기들 신도 없는 무식하고 미개한 종족이라고 여기고 천시했을 것이다.

 

모세는 바로의 궁정에서 40년을 보냈다. 애굽 신들에 대한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이 히브리 동족을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러나 그 외에도 바로와 애굽의 신들을 상대하려면 그들 신처럼 뭔가 거창한 이름을 앞세워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다.

 

모세는 바로에게 우리(히브리인)의 신이라고만 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내다’의 의미를 지닌 야훼라는 이름을 가르쳐 줄 수 없었다. 드라빔처럼 조금만 우상 조각상도 보여줄 것이 없었다. 그런 신이 사백년 넘게 침묵하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났다고 한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바로에게 공갈을 치려면 좀 그럴싸하게 치라는 마음이 들 것이다.

 

히브리 족속의 대표들이 격식을 갖추고 면담을 신청했다고 해서 그들의 체면을 봐서 우리 신들의 뜻을 물어보고 내일 답을 해주겠다고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바로의 첫 반응은 “야훼가 도대체 누구냐?”였다.(출5:2) “너희들 맘대로 해봐라 내가 눈 하나 깜짝하나.”의 의미로 아예 그들의 요청을 무시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여러 이적으로 보여야만 겨우 허락해줄 것이라고 예언했다.(19절) 먼저 화친을 청하는 인간적 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으니 하나님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실제로 그렇게 진행되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일으킨 열 가지 재앙의 대부분이 애굽의 우상 신들을 하나씩 패배시키는 의미였다. 애굽의 신들은 대적은커녕 손가락 하나 꼼작 못하고 완전히 박살이 났다. 사실 그 신들은 실존(實存)조차 하지 않기에 어떤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바로가 그렇게 완악하게 버틴 이유가 물론 첫째는 히브리인들의 공짜 노동력을 놓치기 싫어서였다. 그 위에 이름도 없이 사백 년간 꿈적도 않던 형상도 없고 눈에 안 보이는 히브리 신에게 자기들의 위대한 신들이 패배한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측면도 있다.

 

어리석은 인간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우리에게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대로 애굽에서 당신의 백성을 이끌어내어 시내 산에서 당신에게 예배드리게 했다. 그 후에 십계명을 주셨다. 첫째 계명은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신들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당신의 이름은 없다고 한다. 이름이 없으니 가르쳐 주지 않았다. 모세에게 말한 그대로 ‘내다’라고 재확인한 셈이다.

 

둘째 계명은 너희는 어떤 형상으로든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당신께선 아예 형상이 없을 뿐 아니라 우상신들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또 애굽의 우상 신들은 무참하게 10전 10패하는 것을 너희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 않느냐는 뜻이다. 팔십 노인 한 명에게 열 번이나 졌다는 사실이 바로 우상 신들이 없다는 증거이지 않는가?

 

그 첫째 둘째 계명과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할 때처럼 우리에게도 아예 탈출이 불가능하고 꿈도 꾸지 못하는 고난이 살다보면 닥칠 때가 있다. 일방적으로 오래 동안 억울하게 당하고 손해만 볼 때도 있다. 그래도 절대 낙망하고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지팡이도 제대로 휘두르지 않고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한 마디로 세계 최강 애굽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구약성경 내내 하나님은 이스라엘더러 당신을 출애굽의 하나님으로 기억하라고 명했다. 내가 너희를 출애굽 시킨 하나님이라는 사실만 잊지 말라는 것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상황이 사방이 다 막혀 탈출구 하나 없더라도, 빛이 새어 들어올 틈이 바늘구멍만큼도 없더라도 그분은 우리와 정녕 함께 하신다. 사방이 아무리 캄캄하게 막혀 있어도 그 배후에는 당신의 엄청난 영광의 빛이 비취고 있음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자주 드는 비유이지만 너무 정확해서 다시 들겠다. 땅에는 먹장구름이 잔뜩 끼워서 어두컴컴하고 폭풍우가 몰아치더라도 비행기를 타고 조금만 올라가면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 있다. 그리고 태양은 항상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지 않는가?

 

믿음의 가장 기본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만 문제나 고난이 닥치면 금방 함께 하시는 믿음의 가장 기본부터 흔들리고 불안해한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가난한지 모른다. 신자가 이럴진대 바로가 열 번의 재앙을 당해도 거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신자들에게 열 번을 전도해도 믿지 않는 까닭이다.

 

성경기록 상으로 아니 인류 역사상 최대의 기적이 출애굽이다. 하나님에게는 그런 기적은 정말 식은 죽 먹기(a peace of cake)이다. 그분은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행한 것뿐이다. 모세가 전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야기를 세상 최고의 권력자 바로는 전혀 이해하지도 못했다. 완전히 헛소리로 취급했다.

 

하나님의 엄청난 약속

 

실은 지금 이 단계의 모세로서도 하나님의 출애굽의 약속은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그래서 출애굽 후에 시내 산에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약속의 증거를 들었듯이(출3:12), 애굽의 모든 금은보화를 챙겨서 나오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21,22절)

 

이는 참으로 대단한 약속이다. 광야 방황을 비롯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까지 다양하고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앞으로 출애굽 강해를 진행하면서 차츰 하나씩 알아보기로 하고 오늘은 가장 기본적인 뜻만 살펴보자.

 

바로와 애굽인들은 지금 히브리들을 노예로 삼아 학대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자기들이 은혜를 베풀어주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기근에 굶어죽을 한 가문을 살려주고 그 후손들도 거주지를 주어서 먹고 살게 해준다는 것이다. 또 그래서 당연히 노역으로 그 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요셉이 애굽을 기근에서 구해준 공로에는 감사했고 또 그래서 그를 이방인임에도 총리로 삼아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었다. 또 그 형제 친척들에게도 잘 보상하여 충분히 은혜를 갚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요셉을 모르는 바로가 즉위한 후로 그 후손들까지 돌볼 책임은 없다고 봤을 것이다.

 

옛날 한국 부잣집의 머슴은 대대로 봉사했다.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하던 시절이라 굶지 않고 가끔 고기도 먹는 머슴을 당시의 다른 모든 천민들이 오히려 부러워했다. 양반집 머슴은 주인을 등에 업고 행세깨나 부렸다. 그 집에서 장가도 보내주어 머슴을 그만 둘 생각은 전혀 않고 감지덕지하며 살았다. 사회구조와 인간의 이성과 도덕성이 미성숙한 탓이었다.

 

지금 애굽과 히브리인들의 관계가 바로 그와 비슷하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에도 수시로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이 그립다고 불평한 것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런 머슴 근성이 계속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바로는 히브리인들을 학대하면서도 은혜를 베푼다고 믿었을 것이다. 모세가 출애굽 하겠다는 것은 배은망덕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그런 존재밖에 안 된다. 자기가 행한 악을 악이라고 전혀 생각지 않고 도리어 선이라고 여길 정도다.

 

나아가 눈에 보이지 않고 이름도 없는 히브리 신이 자기들 신에게 선전포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자기들 신뿐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이 절대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존심을 겨루는 것이니까 열 번을 당하고도 끝까지 버틴 것이다. 또 모세도 그냥 계속 살려두고 상대를 해준 것이다. 말하자면 누가 이기나 갈 데까지 가보자는 고집이었다.

 

하나님으로선 어쩔 수 없이 열 가지 재앙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가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연약한 인간인 주제에 헛된 자존심과 고집을 세웠다. 그 바람에 결국 제발 속히 나가달라고 사정할 정도로 무참히 패배했다.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재촉하여 그 지경에서 속히 보내려”(출12:33) 했다. 이스라엘 백성도 모세가 전해준 하나님의 약속대로 은금 패물을 요구했고 애굽인들은 순순히 다 내어주었다.

 

가장 치사하고 사악한 죄악

 

인간이 얼마나 완악하고 비참하고 불쌍한가? 어리석기 짝이 없다. 눈에 안 보이고 이름이 없다는 한 가지 이유로 여호와 하나님께 10전 10패를 하고도 여전히 항복하지 않는다. 금은보화를 포기할지라도 자기들 우상은 포기하지 않겠다고 한다. 여전히 실존조차 하지 않는 허상인 우상들이 자기들 금은보화를 책임져 줄 것으로 믿었다. 아니 자기들 힘으로 얼마든지 다시 재물을 쌓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함에 즉, 출애굽의 구원을 베푸는데 금은보화가 구태여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애굽인들로 히브리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생각이 너무나 틀렸음을 깨우쳐 주려는 뜻이었다.

 

양반이 머슴을 자기 집에 기거시키는 것은 한 밤 중이라도 시도 때도 없이 부려먹을 목적 때문이다. 장가를 보내주는 것은 대대로 노예로 묶어 놓으려는 뜻이다. 고기를 주는 것은 힘 쓸 일이 많기 때문이다. 순전히 자기들 욕망을 채우려는 의도다. 잘못된 사회구조 탓 때문에 나면서부터 머슴이 되었고 대대로 그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양반과 부자들이 자기가 가진 즉, 인간사회 잘못된 체계로 얻게 된 권세를 이용해서 먹고 마시는 생존에 필수적인 것으로 다른 이를 위협하고 조종하고 맘껏 부려먹는 것만큼 치사하고 사악한 죄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돕는 배필로 만들어서 서로 사랑하게 한 인간실존의 첫째 목적을 어긴 너무나 큰 죄악이다.

 

엘에이에선 한인들이 페인트나 집수리 같은 건축 관계 일을 많이 한다. 주로 히스패닉 불법체류자들을 보조일꾼으로 데리고 쓰는데 불체자인지라 가난해서 차가 없다. 주인이 태워줄 수밖에 없는데 워낙 트래픽이 심해서 시간과 경비가 많이 든다. 그래서 아예 자기 집 차고에 야전침대와 전기버너 같이 간이 취사도구를 마련해주고 재워준다.

 

문제는 불체자인지라 임금 자체가 높지 않은데 숙박비 조로 임금에서 또 일부를 떼고 준다. 주인의 필요 때문에 그랬으면 오히려 절약한 경비 중에 일부를 더 주어야 합당할 텐데 더 깎는다. 같은 한국 사람이지만 솔직히 얼굴이 화끈거린다. 지금 애굽 사람이 히브리인을 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한국 주인은 어쨌든 임금을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지불했다. 지금 애굽은 아예 지불하지 않고 공짜로 노동력만 착취했다. 하나님은 간단하게 단번에 사백 년간 밀린 임금을 되찾아 주었다. 어쩌면 이자까지 쳐서 받게 했을 지도 모른다.

 

출애굽의 목적

 

하나님이 금은보화를 찾게 해주신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한 뜻은 먹고 마시고 입는 기본 의식주를 책임져 주는 존재가 애굽의 바로가 아니고 하나님 당신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 모두에게 인간은 단순히 이 땅에서 먹고 사는 것이 목적인 존재가 아님을 알게 해주려는 것이다.

 

애굽은 히브리인들의 숙식을 책임져 준다고 자부했다. 히브리인들은 숙식을 제공해주는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하고 있다. 이 둘 다 인간의 한계이자 인간의 근본적 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먹고 마시는 것은 한 순간에 해결해 줄 수 있다. 그야말로 당신에겐 다시 말하지만 식은 죽 먹기다.

 

대신에 너희들은, 애굽인이나 히브리인 모두 당신의 형상을 닮게 지음을 받은 거룩한 존재임을 제발 깨달으라는 것이다. 당신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라. 그렇지 않으면 살아도, 아무리 부족한 것 없이 높은 자리에서 떵떵거리며 살아도 죽은 것과 하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더러 사흘 길을 가서 당신께 제사 지내게 해달라고 바로에게 요청하라고 했다. 그 말씀 그대로다. 출애굽의 목적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노예 생활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만 목적이면 구태여 사흘 길을 광야로 갈 필요가 없다. 그 있는 자리에세 애굽을 멸망시키고 거꾸로 애굽인들을 히브리인의 노예로도 만들어 줄 수 있다.

 

출애굽의 근본 뜻은 말씀 그대로 하나님 당신께 경배 드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은혜를 얻고 그분을 평생 기뻐하며 그분과 교제 동행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에 매달리면 이 땅이 전부라고 믿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없다고 선언하는 셈이 된다.

 

세상에서 형통하고 안락을 얻는 것이 내 실력과 지성이 남보다 뛰어난 탓이지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 자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으니 구원 밖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 이 땅에서 편안하게 살다 죽었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것이 목표다. 본능을 충족하여 생존과 번식만 목표로 하는 동물과 방불하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기다리는 것은 실패뿐이다. 출애굽 당시의 바로는 인간 세상에서 인간이 판단하기에는 최고로 성공한 자였다.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끝까지 살아 역사하는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를 거역하는 바람에 역사상 최고로 비참한 패배를 당했지 않는가?

 

사흘 길을 떠난 적이 있는가?

 

지금 모세나 이스라엘의 고대 영웅담이나 전쟁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너희는 예수를 믿어 구원 얻음으로써 사탄에게서 사흘 길을 떠나 당신께 제사지내는 인생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하나님 뜻 안에서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 사탄이 추적이 불가능한 거리로 옮겨졌다. 하나님이 옮겨주셨다. 더 이상 사탄에게 농락 조절될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이 사역 중에 온갖 이적으로 사탄에게 강한 손으로 침으로써 10전10승 하셨다. 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마지막에 홍해를 가르듯이 사탄으로 재기불능토록 완전히 파멸시킨 후에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었다.

 

그럼 예수 믿은 후에는 세상의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 앞에 선전포고를 하고서 10전10승할 수 있는 싸움을 하고 있는가?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이 그립다고 하나님께 불평불만을 터뜨리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이 나의 형통을 책임져 주기에 여전히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단순히 잘 먹고 잘 살게 하려고 출애굽 시킨 것이 아니다.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기에 기본적 인권과 자유를 보장해주려는 것이다. 또 사백년 간 당한 모든 피해, 특별히 정신적 피해까지 보상해주신 것이다. 민족적 자긍심도 단번에 회복시켜 주었다. 그 무엇보다 언제 어디에 있으나 여호와께 마음 놓고 예배드리고 교제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이다.

 

하나님 구원의 방식과 정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기대한 것 아니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그런 하나님이 지금도 눈에 보이지 않고, 이름도 없고, 침묵하다 못해 부재하는 것 같이 보여도 우리에게 ‘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무 것도 염려 말라고 하신다. 먹고 마시는 것보다 당신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신다.

 

거창하게 종교적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네가 사흘 길의 거리를 두고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것부터 온전히 인식하라는 것이다. 믿음의 아니 인생의 승리는 그 거리를 얼마나 멀리 두느냐에 달렸다. 신자는 흑암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악에서 의로 완전히 옮겨졌다.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이미 올라가 있다.

 

세상에 얼마든지 선전포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영광의 빛을 비춰낼 것이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자세부터 달라져야 한다. 지난주에 세상과 사흘 길을 떨어져 걸음으로써 10전10승 했다는 승리의 보고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예배 마치고 나갈 때에 이번 주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 붙들고서 세상에 10전10승할 자신을 갖고 당당히 교회 문을 나서야 한다.

 

3/26/2017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8 출#31 14:15-20,31출애굽의 영광은 애굽을 위한 것이었다. master 2017-10-05 318
77 출#30 14:10-14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 master 2017-10-05 105
76 출#29 13:17-22 구름과 불기둥은 은혜도 아니다. master 2017-09-15 194
75 출#28 12:29-36 은혜 받을 일밖에 남지 않았다. master 2017-09-15 280
74 출#27 12:29-36 가룟 유다보다 못한 목사 master 2017-09-15 71
73 출#26 12:21-28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master 2017-08-13 594
72 출#25 11:1-8 개의 혀를 움직이지 않게 하는 하나님 master 2017-08-03 74
71 출#24 9:4 기독교 좌파와 우파의 공통된 잘못 master 2017-07-24 46
70 출#23 9:1-7 차별과 구별을 분별해야 신자다. master 2017-07-19 99
69 출#22 7:20-25 현대과학이 풀지 못한 피라미드의 비밀 master 2017-07-19 233
68 출#21 7:8-13 하나님께 맡길 것은 문제와 고난이 아니다. master 2017-07-08 1441
67 출#20 6:1-9 가장 좋아하되 가장 모르는 하나님의 이름 master 2017-06-30 122
66 출#19 5:10-21 사탄이 가장 잘 쓰는 수법 master 2017-06-12 130
65 출#18 5:1-9 거짓말로 전도하고 거짓말로 살아라. master 2017-06-10 181
64 출#17 4:21-26 당신의 종을 죽이려는 하나님 master 2017-06-10 395
63 출#16 4:18-20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는가? master 2017-06-10 113
62 출#15 4:13-17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master 2017-06-10 123
61 출#14 4:10-12 “이제 가라 내가 함께 하리라.” master 2017-05-04 73
60 출#13 4:1-9 쉽고도 간결한 기독교 신앙 master 2017-04-08 102
» 출#12 3:18-22 광야로 사흘 길을 떠난 적이 있는가? master 2017-04-08 472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