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가라 내가 함께 하리라.” 

출애굽기 강해(14)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4:10-12)

 

너무나 버릇없는 모세

 

한국에선 손위 어른이 말씀하실 때 꼬박꼬박 말대꾸하면 아주 버릇없다고 야단맞는다. 하나님이 지금 모세에게 출애굽 소명을 계시해주고 있는데 모세는 벌써 네 번째 반문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직통계시를 받고 있다면 두려워서라도 첫마디에 곧바로 예하고 순종할 것이다.

 

모세는 아무래도 좀 심한 것 같고 하나님도 이렇게 주저하는 믿음이 약한 그를 꼭 애굽으로 돌려보내야 하는지 의아스럽다. 알다시피 모세는 지난 80평생에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머나먼 선조 아브라함에게서 대대로 구두로 전해 내려오는 그분의 약속만 겨우 알고 있다. 그러니 하나님에게 차근차근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거기다 모세의 말대꾸에는 일관된 논리의 흐름이 있었다. 첫째 질문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것은 자기 눈앞에 임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었다. 둘째 질문 동족들이 자기를 안 따르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은 동족에 대한 의심이었다. 셋째 바로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은 애굽에 대한 의심이었다.

 

이제 네 번째 의심으로 제가 저를 못 믿는데 어떻게 이 큰일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셋째까진 외부 여건이 너무 버겁다는 것이며 본문의 넷째는 그 큰 문제들에 대비해보면 자신이 너무 외소해보여 도무지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나름대로 합리적 판단이지 거짓과 핑계는 아니었다. 하나님도 모세의 네 반문 모두가 일리 있다고 여기고 문제를 삼지 않았다.

 

모세의 자존감이 떨어지는 첫째 약점이 무엇인가?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고 했다.(10절) 그런데 스데반이 순교하기 전에 설교한 것에 따르면 모세는 애굽의 학술을 다 배워 말과 행사에 능하다고 했다.(행7:22)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은 고대 왕자들의 반드시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과제는 웅변술, 수사학, 논리학 등인데 신하를 설득하고 부하를 통솔하려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는 이미 살펴본 대로 바로의 궁정에서 많은 왕자들 사이에 시기와 모함을 많이 받아 무슨 말이든 잘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기질적으로도 성격이 급하여 말보다 행동이 앞선 자였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대로 말을 더듬었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다 젖을 떼자 바로의 궁정에서 살았기에 정작 히브리어에는 능통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 이민 오면 1.5세 아이들은 한국을 떠날 때의 어휘 숫자와 문장력 수준에 머무르는 것과 같다. 실제로 전승에 따르면 모세는 발음과 악센트가 좋지 않아 아주 천천히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세가 직접 상대할 자는 바로와 애굽의 술사들이다. 히브리인 중에 애굽의 언어 문화 관습에 최고 전문가는 모세다. 그렇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는데 지난 40년 간 제3의 언어인 미디안어만 사용해서 애굽 말도 많이 까먹었을 것이다.

 

성령의 놀랍고 신기한 역사

 

정작 모세가 더 크게 염려한 사항은 따로 있다. 하나님은 지금 모세더러 바로와 애굽 술사와 순전히 말로만 대적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애굽 술사처럼 신령한 주문을 외우던지 뭔가 경건한 신탁이나 제사 예식에 대한 지시는 전혀 없다. 장엄한 형상의 신상도 주지 않았다. 말하자면 도깨비 방망이나 요술 램프 같은 것을 주지 않았다.

 

기껏해야 손 때 묻은 양 치던 지팡이만 그것도 이미 모세가 갖고 있는 것을 들고 가라고 한 것뿐이다. 가뜩이나 80 노인에 말마저 더듬으니 얼마나 초라해 보이겠는가? 자칫 웃음거리가 될 것 같으니 저는 도무지 적임자가 아닌 것 같다는 하소연이었다.

 

하나님의 그에 대한 해법은 무엇인가?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12절) 상대가 어떤 반박 무시 조롱도 못하도록 예리하게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게 해주겠으니 아무 염려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갖는 네 가지 염려 의심을 모두 제거했다. 그래서 12절 서두의 말처럼 “이제는 (안심하고) 가라”는 것이다.

 

제가 목사로서 한 가지 소원이 있다. 여러분들이 오케이하면 모두 다 설교나 성경공부 인도를 시키는 것이다. 직접 가르쳐야 자기 것이 되고 준비하고 리뷰 하는 동안에 본인이 더 은혜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제 뜻은 실제로 12절 말씀대로 하나님이 직접 전할 말을 심어주는 은혜를 체험해보라는 것이다.

 

제가 설교와 성경공부를 준비할 때에 제가 미처 몰랐고 생각지도 않았던 본문에 대한 더 세밀하고 심오한 의미가 절로 떠오르는 때가 많다. 심지어 설교하고 가르치는 중에 말이 먼저 나오는 경우도 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지 제 스스로 놀라면서도 제가 준비해온 것보다 더 풍성한 내용임을 깨닫고 신기하기만 하다. 내가 전하고 있지만 내 속에 임재하신 성령 하나님이 내 생각은 물론 입술까지 주관하심을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다.

 

여러분 중에 이와 비슷한 체험을 성도 교제나 불신자 전도할 때에 이미 해본 자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러 가기 전에 잠시라도 간절히 기도하면 서로 마음을 털어놓고 진솔한 대화가 진행된다. 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혹시라도 서로 잘못해 상처를 주고받아 사이가 서먹해졌더라도 그래서 거의 원수가 되기 직전까지 갔어도 누구랄 것 없이 먼저 잘못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고 눈물로 화해할 수 있다.

 

예수님 ‘예’자(字)도 꺼내지 못하게 했던 완악한 불신자가 신자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자기 고민을 털어놓는다. 이럴 경우 신자라면 어떻게 하는지 상담과 기도를 요청해온다. 신기하게도 내가 상담과 기도에 이렇게 은사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 술술 잘 풀리고 상대에 영적인 감동까지 끼친다.

 

신자가 잘난 것 때문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반대로 만나러 가기 전에 기도를 하지 않았고 또 상대에 대해 진정으로 긍휼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말하는 것마다 거꾸로 쓴 뿌리가 되고 그 관계가 더 뒤틀어짐을 경험할 수 있다. 순전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만 그런 열매가 열린다는 것은 오로지 성도와 함께 하는 성령이 상대의 심령 깊숙한 밑바닥까지 역사했기 때문이다.

 

모세의 결점은 사실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니다. 한두 가지 남들보다 월등 뒤떨어지는 약점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그 약점으로 인해 크게 실패한 체험이 트라우마로 남을 때다. 모세는 바로의 궁정에서 여러 번 말 때문에 참담한 낭패를 겪은 것 같다. 애굽 관원을 죽인 후에도 행동이 앞서지 말고 차라리 말로 차분히 타일렀더라면 하는 후회를 틀림없이 했을 것이다.

 

누구나 자기 약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모세가 말로 담판을 지어야 하는 지금 같은 경우는 가능한 피하려 든다. 모세도 나름 자기 약점을 고치려 최선의 노력을 했겠지만 번번이 실패했기에 더 큰 두려움으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자들마저 포함해서 결점은 항상 자기에게 손해를 입히고 부정적 결과를 낳는다고만 여긴다. 그 반대의 경우는 생각조차 않는다.

 

믿음 만능 주의

 

그러나 성경의 모든 인물들이 허물과 약점이 많았다. 우리보다 더 엄청난 죄들을 지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로 당신의 종으로 세웠다. 그 약점마저 사용해서 긍정적이고 풍성한 열매를 맺으셨다. 당신의 자녀의 일에는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자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

 

바울의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12:9) 고백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응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신자들이 이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내 능력이 약해지는데도 하나님이 당신의 큰 능력으로 모두 다 긍정적으로 바꾸신다는 점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도무지 자기가 할 수 없는 일, 자기 힘에 아주 버거운 일들은 하나님이 당연히 해주셔야 한다고 믿고 또 그렇게 기대한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의 크기만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여기까진 그런대로 괜찮다. 그래서 자신의 소망과 계획을 가능한 크게 세워야 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이뤄주신다고 믿는다. 또 그 사실을 입증하는 성경구절로 여러분 모두가 잘 알고 좋아하는 빌립보서 4:13을 든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무엇이든 기도하면 이뤄주신다고 한다. 응답이 되지 않은 것은 믿음이 약한 탓이거나 아직 기도의 양이 다 차지 않은 까닭이라고 한다. 언뜻 들으면 아주 순전한 믿음 같다. 아무 의심 없이 믿어야 하는데 자기는 그렇지 못하니 자꾸 자신의 신앙이 잘못된 것 같은 자책감만 든다.

 

죄송하지만 그런 가르침은 목사가 완전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신자를 속이는 것이다. 믿음과 기도라는 종교적 용어로 포장했지만 잘못된 가르침이다. 온전히 믿고 기도하면 다 이뤄주시면 내가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나의 종이 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절대로 도깨비 방망이나 요술 램프 같은 분이 아니다. 그러니까 모세에게 그런 것들은 전혀 주지 않은 것이다.

 

앞뒤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그 한 구절만 따로 떼어 내어서 그것도 문자적으로 주입식 신앙을 강요한 것이다. 순진한 신자들에게 정신적 영적 멍에를 씌우는 꼴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했던 행태를 되풀이하고 있다. 제 개인적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전혀 다르다.

 

간단히 이렇게만 생각해보라. 바울이 능력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여겼던 내용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가 출세하고 형통하고 안락하게 지내는 것을 바랐겠는가? 돈을 벌고 자기 이름을 높여주는 일을 위해서 기도했겠는가? 아니지 않는가?

 

또 설령 그런 기도를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들어주었겠는가? 아니지 않는가? 현재의 우리 믿음 수준으로도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 않는가? 그런데 왜 믿음으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가르침에 속아 넘어 가는가? 우리의 진짜 속내가 무엇이든 하나님을 부려 먹고 싶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바울이 소망한 한 가지.

 

심지어 바울은 고난에서 구출해 달라고 핍박을 중지해달라는 기도조차 안 한 것으로 봐야 한다. 만약 그런 기도를 했고 하나님도 그런 능력으로 응답하셨다면 왜 그가 고후 11:23-27에서 그 많은 고난과 핍박을 열거했겠는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죽을 고비를 밥 먹듯이 넘겼다. 그런 기도를 간절히 해서 응답 받았다면 한두 번은 몰라도 다섯 번까지는 안 당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바울이 소원하고 기도하며 행동했던 것, 그래서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여 주신 능력의 일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이었다. 예수님의 거룩한 통치가 사탄에 미혹된 단 한 명의 영혼에게라도 확장해달라는 기도였다. 그 일에 그는 일 년 365일 하루 24시간을 다 바쳐 헌신 충성했다.

 

유대인을 만나면 유대인처럼, 헬라인을 만나면 헬라인처럼 되어서 교제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었다. 자신의 현실적 위치 신분 상태가 부유하든 궁핍하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신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예수를 믿은 후로는 사나 죽으나 자기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서만 살았다. 로마 자택에 연금 되었고 지하 감옥에 투옥이 된 일 조차도 그럼으로써 로마의 귀족 왕족 군병들에게 복음이 확장되니까 더 기뻐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의 안위에 대해선 전혀 염려하지 말고 너희들도 환난 중에 더 기뻐하라고 권했다.

 

바울은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 이미 들어와 있고 특별히 부활 생명이 보장되어 있음에 전혀 의심이 없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핍박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하나님께 받은 내 소명을 달성하는데 전혀 방해되지 않음을 확신했다.

 

물론 그도 인간인지라 때로 궁핍하고 육신의 고통이 심할 때는 연약해지고 힘이 빠질 때도 있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지랴 탄식했다. 그럴 때마다 자기 속에 성령이 채워주시는 위로 권면 능력으로 다시 세상 앞에 시바가 군병으로 당당히 설 수 있었다. 예수님도 제자들더러 세상에서 환난을 받으나 담대하라고 했다. 환난은 기정사실이었다. 환난을 없애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이 닥쳐도 담대해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바울을 들어 사용하여 당신의 일을 함에 있어서 바울 자신의 외적 여건이나 내면의 상처 갈등 의심은 물론 심지어 믿음 까지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무엇이든 이루시더라는 믿음을 가졌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당신의 일을 못 이루실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진짜 의미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 아닌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 당신께서 행하시는데 어느 누가 방해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바울도 고린도 교회 교인들로부터 모세처럼 말솜씨가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고린도 교회를 두 번 방문했고 최하 네 번의 편지를 보냈다. 오늘날에 부패한 교회들의 모든 잘못을 다 망라하고도 더 문제가 많았던 교회를 엄하게 꾸짖었다. 말썽부리는 교인을 출교시켰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교회를 어떻게 치리 운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 지침을 마련했다. 또 그래서 그는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 성령의 능력에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고전4:20)

 

짓궂으신 하나님

 

지금 하나님은 모세를 자기의 가장 큰 약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어서 가능한 피하고 싶은 일을 시키려고 한다. 하나님이 모세의 약점이나 두려운 심정을 모를 리도 없다. 차라리 다른 일이라면 잘 순종하겠는데 꼭 그런 일을 맡기시려면 화끈한 능력을 미리 주시든가 싶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모세더러 그 일을 맡도록 그 장소로 억지로 밀어 넣고 있다. 그러니까 더더욱 당신께서 반드시 함께 하시고 그의 입술을 주장하실 것이다. 모세 네가 상대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내가 그를 대적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귀머거리 벙어리도 만들었다고 한다.(11절) 일부러 고통을 주려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당신께서 관여하지 않는 일이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가끔 하나님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을 시킬 때가 있다. 우리가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니까 당연히 당신만의 계획과 해답을 사전에 갖고 계시지 않고는 시킬 리가 없지 않는가? 다시 12절의 말씀을 보라. 모세의 약점을 다 고쳐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출애굽 이후에도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급한 성격은 여전했지 않는가?

 

단지 할 말을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바로하고 상대할 때에 막히지 않게 전할 말만 심어준다는 것이다. 바로와 상대하는 즉, 하나님의 일을 할 때만 하나님이 알아서 다 책임져 주신다는 뜻이다. 바울이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한 그대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모세처럼 뭔가 억지로 시키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내 본성과 취향에 맞지 않고 심지어 내 약점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이다. 내가 현재 가진 편안하고 좋은 것들을 포기하게끔 강요당하는 느낌도 갖는다. 모세처럼 “저는 도무지 적임자가 아닙니다. 제 코가 석자라서 이 문제부터 해결하고 또 믿음을 다시 키워서 하나님 일 하겠습니다.”라는 변명부터 나온다.

 

그렇게 자꾸 주저하다간 대단히 죄송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흔히들 나이 들어 은퇴하면 해외선교사로 헌신하겠다는 사람이 많다. 선교자금도 마련할 겸 온갖 수단을 동원해 죽기 살기로 돈을 번다. 그런데 막상 은퇴하고 나니까 몸이 아프거나 생각이 바뀌어 선교를 가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꼭 벽에는 예의 빌립보서 그 성구 액자를 걸어놓는다. 그럼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평생 동안 한 일이 무엇인가? 돈 버는 일 뿐이지 않는가? 그게 과연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일인가?

 

하나님이 정말로 바라시는 것

 

하나님은 우리 모두 바울처럼 순교하라고 하지 않는다. 해외 선교를 가라고 하지 않고 심지어 불신자를 전도하라고 강권하지도 않는다. 신자에게 요구하는 믿음은 하나다. 정말로 하나님의 일을 당신께서 나의 현재 형편과 상황에 관계없이 반드시 이루시고야 만다는 확신을 가지라는 것이다. “이제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말씀의 참 의미라도 알고 있는지 물으신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당장 그 일을 모른다면 최소한 내가 기도하는 제목들 모두가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서 별달리 어렵지 않다. 간단하다.

 

내가 속해 있는 모든 공동체에 예수님을 정말로 주인으로 모시면 된다. 예수님의 사랑이 구성원 모두에게 넘치도록 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다른 모든 사람을 예수님의 사랑으로만 섬길 수 있게 해야 한다. 아무리 선한 의도가 있다할지라도 내 잘난 능력으로 남을 조종하거나 영향을 끼치려 해선 안 된다. 주님의 긍휼과 선하심이 이 공동체에 차고 넘치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구하고 또 그러도록 실천해야 한다.

 

주님의 심장으로 내 남편을, 내 아내를, 내 자녀를, 내 동료 성도들을, 내 직장 동료들을, 내 이웃들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구해야 한다. 정말로 자신부터 예수님을 닮아서 자라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현재 당면한 고난과 문제를 없애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더 간절한 소원과 더 뜨거운 열정을 갖고 그 일부터 기도해야 한다.

 

실제로 바울이 그랬지 않는가? 자기가 당한 그 많은 죽을 고비를 열거한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8) 그는 현실의 고통 핍박보다 교회와 성도가 연약한 것이 더 괴로웠다고 한다. 당연히 고난을 없애달라기보다 교회를 위해서 더 간절히 기도했지 않겠는가? 우리도 주님의 사람으로 바뀌고 주님의 심장으로 주위 사람을 섬기게 해달라는 기도를 고난을 없애달라는 기도보다 더 간절하게 뜨겁게 하고 실천하려 노력하면 하나님이 안 들어주실 리가 없지 않는가? 그럼 하나님의 직무태만이지 않는가?

 

정말로 내 가정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예수님이 주인 되게 바꾸어보라. 불신자들이 그런 우리 가정을 보고 역시 예수 믿는 분들 다르고 저도 예수 믿고 싶다고 부러워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로 가장 효과적이고 성경적인 전도다.

 

거창하게 전도까지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되면 구태여 가정 예배를 안 드려도 여러분의 자녀들이 나중에 커서 독립하여 신앙을 버릴까 염려 안 해도 된다. 그마저 바라지 않아도 된다. 정말로 주님의 가정이 되면 당장에 집안에 문제가 없어지거나 훨씬 줄 것 아닌가?

 

신자가 만나는 모든 사건, 모든 사람, 모든 여건이 다 하나님의 일이다. 그래서 무조건 하나님이 책임져 달라고 요구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 모든 일에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행하게 해 달라고 구해야 한다.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면 최소한 하나님의 너무나 고귀한 일을 하고 있다는 확고한 인식은 있어야 한다. 무슨 일이든 지금 내가 하나님 대신에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그럼 그분께서 그 일을 당연히 당신 뜻과 방식대로 거룩하고도 완벽하게 이루실 것 아닌가?

 

4/30/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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