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받을 일밖에 남지 않았다.” 

출애굽기 강해 (28)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그 백성을 재촉하여 그 땅에서 속히 내보내려 하므로 그 백성이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12:29-36)

 

 

그저 하나님 은혜로 살지요.

 

이스라엘이 애굽의 우상숭배의 죄에 동참했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했으나 양의 피로 구별해서 죽음의 벌을 내리지 않은 것은 대단한 긍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에 출애굽은 이미 보장된 것이다. 당신의 자녀로 선택해놓고 심판을 할 리는 만무하다. 출애굽은 하나님 쪽에서 보면 당신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할 책임을 다한 셈이다.

 

따라서 출애굽 당일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추가로 받은 축복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은 긍휼 위에 은혜(영어로는 grace)를 받았다. 은혜란 받을 조건 자격 공로가 전무한데도 무상으로 받는 좋은 선물이다. 직접적으로는 애굽의 금은패물과 의복을 취득한 것이다.(35,36절) 간접적으로는 애굽의 철권통치에서 벗어났으니 그날 밤 이후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만 받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영적인 원리는 예수를 믿는 신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8:1)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거듭나는 순간 하나님의 완전한 긍휼 안에 잠긴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인해 사망과 죄의 법에서 해방된 것이다.(롬8:2)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는 더 이상 심판이 없고 성령의 보호와 인도 하에 새 생명이 충만하게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신자가 된 후로는 평생토록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 은혜는 출애굽의 이스라엘의 경우처럼 하나님 쪽에서 반드시 베풀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여러분은 실감할 수 있는가? 예수 믿은 후에도 문제와 고난이 그치지 않고 때로 나태하여 죄에 넘어지면 하나님께 벌도 받는데 어떻게 은혜 받을 일밖에 없다고 하는가? 교리적으로 옳은 진술일지라도 심정적으로 흔쾌히 납득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여러분이 실제로 그렇다고 자주 고백하고 있다. 신자들끼리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물으면 십중팔구 하나님 은혜로 살고 있다고 대답하지 않는가? 살고 있다는 것은 항상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다는 뜻이지 않는가?

 

그런데 문제는 거의 대부분 그 앞에 ‘그저’ 혹은 ‘그냥’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는 것이다. 현재 받고 있는 은혜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격하시킨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없었다면 벌써 좌절 내지 포기했을 텐데 억지로 견디고 있는 중이라는 뉘앙스가 더 강하다.

 

기도하여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인내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차원에서 은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믿음으로 잘 견디고 있는 것이다. 은혜는 아무 공로 없이 공짜로 받은 축복인데 은혜를 받고 있다면 반드시 기쁘고 신나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입술로는 은혜로 살고 있다고 하면서 얼굴 표정이 정반대라면 그 원인은 둘 뿐이다. 사실은 은혜를 받고 있지 않는데도 종교적 수사로 답한 것이다. 아니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고 있는데도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출애굽 당일 이스라엘이 받은 은금패물 같이 가시적 현실적 차원으로만 은혜에 접근한 것이다.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실제로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은혜가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인데 성경은 그것을 두고 불신앙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이 받은 정작 큰 은혜

 

대부분의 신자가 출애굽에서 놓치고 있는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있다. 은금패물과는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은혜가 정작 따로 있다. 지난 사백 년간 노예로 살고 있었던 것 자체가 바로 그것이다. 연단과 고난을 겪지 않으면 인격과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는 불신자들도 다 아는 진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야곱 가문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이주했고 잃어버린 막내아들 요셉과 재상봉 했다. 그럼 기근이 끝났으면, 최소한 요셉이 총리에서 은퇴했으면 가나안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업을 차지해야하지 않는가? 당시까진 이스라엘에게 호의적인 바로가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러지 않았다.

 

그럼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려고 의도적으로 남아 있었는가? 하나님은 그에게 후손이 이방의 객이 되고 이방은 네 자손을 괴롭게 할 것이지만 사백 년이 지나야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했다.(창15:13) 그래서 우리가 노예가 되더라도 이 땅에 남아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드리자 각오 헌신했을까? 아무래도 그랬을 리는 없는 것 같다.

 

야곱이 죽을 때에 열두 아들에게 유언을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4백 년을 참고 기다리라는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다. 모두가 가나안 땅을 차지한 후의 축복과 경고뿐이었다.(창49장) 자기가 죽으면 제발 아브라함과 함께 묻어달라고 당부했는데 너희도 빨리 돌아가라는 뜻이다.

 

이주 초기에 이스라엘은 애굽의 환대를 받았다. 목축을 비천하게 여기는 애굽 사람들에게 치즈 우유 등을 팔았을 것이다. 차츰 애굽에서 삶이 가나안보다 훨씬 풍요롭고 안락해지기 시작하니까 눌러 앉은 것이다. 이스라엘은 돌아가는 모든 형편에 따라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애굽이 지금 잘 대해주고 있고 우리가 베푼 은혜도 있는데 설마 우리를 해코지 하지 않겠지 안일하게 판단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 중에서 사백 년간 괴로움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는 외면하고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해주신다는 구절에만 관심을 쏟은 것이다. 돈을 좀 벌어서 언제든 돌아가면 되지 판단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기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들은 것이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이사야서 40장 이후의 메시야가 수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예언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것과 같다. 대신에 다윗 왕국의 영광만 재현해줄 것만 잔뜩 기대했다. 듣고 싶은 말에만 귀 기울이는 영적 어리석음이 이전과 단 한 치의 차이가 없다.

 

독립 시도하다 실패한 유타주

 

한국에 아프리가 빈국에서 어떤 대가족이 이민 와서 자기들 고유의 문화 관습 종교를 실현하는 나라를 세우려 들면 한국 정부가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오래 전 유타 주가 몰몬교의 나라를 세워 독립하려 시도했으나 연방군에게 무참히 패배했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에서도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이름이 꽤 창대해졌다. 가나안 연합국과 전쟁에서 승리한 큰 세도가 재력가가 되었다. 그러나 후손들이 언제 복수를 당할지 모르는데 아들이라곤 이삭 하나뿐이었다. 삼대 째 야곱에게 가서야 열두 아들을 얻었다.

 

알다시피 야곱은 처세술과 재테크에 천재였다. 지금 유대인들이 전 세계 돈 줄을 쥐고 흔드는 것도 야곱의 피가 흐리기 때문일 것이다. 죄송하지만 유대인들은 수전노라는 대명사를 얻었고 반유대주의가 나치 독일만의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보편적 현상으로 이어졌다. 말하자면 야곱의 후손이 가나안 땅에서 번창은커녕 생존도 힘들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처럼 돈으로 집에 용병을 길러야 하고 그럼 계속 전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후손이 하늘의 뭇 별처럼 될 여유가 없다. 이방 용병이 승리해도 또 승리할수록 여호와 신앙이 오염될 위험만 늘어난다. 결국 가나안 땅에서 번창은 물론 생존이라도 하려면 가나안 시민권을 획득하는 길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다. 세계 최강 애굽에 노예가 되게 했다. 또 고센 땅에서 자치공동체를 유지하며 살 수 있게 했다. 히브리인의 정체성과 여호와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가나안 족속들이 아브라함에 대한 원망은물론 그런 가문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먹었을 것이다. 또 애굽에겐 노예로 철저히 통제 받는 한 비천한 족속이었을 뿐이다.

 

출애굽기가 어떻게 시작하는가?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 가문이 겨우 70명이었지만(1-6절), 후손이 심히 창대해졌다고 한다.(7-10절) 애굽으로선 노예로 부려먹으니까 전혀 신경도 안 쓰는 사이에 이스라엘은 어느 듯 완전히 창성해졌다. 가나안 족속들이 대적 못하고 애굽도 크게 두려워할 정도가 되었다.

 

애굽은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것이다. 자기들의 대적이 될 수 있는 민족을 자기들이 먹여 살리고 보호까지 해주었다. 호랑이 새끼를 품 안에서 키운 셈이다. 실제로 모세를 바로의 왕자로 40년간이나 양육 훈련시켰다. 바로 그 모세의 말 한마디로 열 가지 재앙이 임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그분의 약속을 온전히 믿기는커녕 이해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준행하셨다. 나아가 인간이 기대하고 상상하는 것 이상의 은혜를 예비해 놓으셨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인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면 우선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인구가 창성해야 했다. 세상 어떤 나라도 관심도 갖지 않는 외딴 곳에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이스라엘을 숨겨 놓으시고 당신의 손바닥으로 가려 보호하셨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낼 때부터 당신의 경륜에 포함된 당신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그분 고유의 절묘한 방식이다.

 

세상 어느 민족이 먼 미래를 보고 남의 나라의 노예로 자청하는 법은 없다. 중국을 이기기 위해서 노예로 섬기며 사백년 후를 기약하자고 주장했다간 그 자리에서 돌로 맞아죽을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항상 목소리가 큰 강경파가 득세하거나 도무지 힘으로 승산이 없을 때는 비겁하게 굴종하는 것 밖에 모른다.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 사회에선 권세를 잡은 지배 계급과 권세를 잡지 못한 피지배 계급 사이의 투쟁만 반복될 뿐이다. 출애굽은 바로 그런 구조를 최초로 깨트리는 사건이었다. 세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세워라.

 

출애굽 당일 애굽에는 장자의 죽음으로 전무후무한 곡성이 있었다. 이스라엘은 그럴 능력도 없었고 그럴 의도도 전혀 없었다. 또 이스라엘에는 전무후무한 양의 울음소리가 있었고 그로 인해 구원 받았다.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참 하나님 창조주로 천하 만물을 다스리는 여호와는 어떤 형상도 이름도 없다. 오직 말씀만으로 역사하신다. 그 말씀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개인의 삶과 인생에 실제 체험적으로 실현되었다. 이름이 없으신 대신에 또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만 기억되길 바라신다.

 

당신께서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당신의 실체를 보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 필연적으로 한 밤중에 출애굽 시키듯이 은밀히 눈에 보이지 않게 당신 혼자서 당신만의 방식으로 은혜를 베푸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설령 당신을 보여주고도 죽이지 않는다 해도 인간은 제대로 그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분을 보았다는 사실만으로 자기가 뛰어난 줄 착각하고 영적 교만에 빠지니까 더더욱 보여주시지 않는다.

 

지난 사백 년간 고센 땅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세워져 있었다. 이스라엘이 알던 모르던 심지어 당신을 거역하며 노예근성에 젖어 있었어도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미치지 않는 한 순간 한 장소라곤 없었다. 당신께서 이스라엘이 애굽에 동화될 가능성과 위험을 최대한 제거했다. 현실에 궁핍과 고난을 당할지라도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당신만을 소망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뜻은 그들로 안락하고 풍요롭게 살게 하려고 주변 여건을 바꿔주는 것이 아니다. 죄와 사탄과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한 사람 한 사람씩 죄인에서 의인으로 거룩하게 바꾸어주신다. 또 그렇게 변화된 사람들로 당신을 왕으로 모시는 공동체를 건설 확장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모습인가? 아주 간단하다. 애굽과 정반대면 된다. 타민족을 수탈 핍박해서라도 자기들만 강성해지는 세상 나라와 달라야 한다. 이스라엘의 경내로 여행하는 나그네는 물론 우거하는 이방인도 외적 조건으로 절대 차별하지 않고 진심으로 여호와를 경배한다면 히브리인과 동일하게 대우하고 사랑해주는 왕국이다.

 

과일이나 곡식을 추수할 때에 그런 자들이 먹도록 일부를 수확하지 않고 남겨두어야 했다. 희년, 매 50년마다 이방의 종과 노예를 아무 조건 없이 풀어주는 나라였다. 사백 년 넘게 학대하여 최대의 이익을 얻었고, 하나님의 열 번의 경고를 끝까지 거역했으며, 공짜 노동력을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 들었던 죄에 찌든 인간들로선 결코 계획은커녕 꿈도 꾸지 못하는 나라다.

 

실패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

 

하나님은 비록 사백 년간 노예이긴 해도 애굽에 이스라엘을 꽁꽁 숨겨서 그런 나라를 충분히 건설할 수 있게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성장시키려는 했다. 쉽게 말해 이스라엘로 아브라함과 맺은 당신의 언약만 소망하게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하나님의 나라는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하나님의 잘못인가? 결코 아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의 어떤 민족도 받지도 알지도 못하는 큰 은혜를 하나님께 받았다. 하나님으로선 할 바를 다하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이 그립다는 불평만 해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본체 되시는 예수님이 오셨어도 다윗 왕국의 영광만 재현해 달라는 타령만 했다. 당신께서 택한 백성들마저 그 영적 수준이 단 일보도 전진하지 못했다. 출애굽 유월절에 예표 된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리신 피가 아니고는 구원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진정한 유월절의 참 제사를 드리지 않고는 인류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었다.

출애굽 밤에 애굽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긍휼은 엄청났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그렇게 오래도록 유린하고 핍박한 이방 족속을 그렇게 많은 자비를 베푼 적이 없었다. 하나님의 원대하고 오묘하고 완벽한 계획과 섭리에 의하면 어쨌든 그들이 이스라엘이 창성하도록 보호해주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애굽이 받은 긍휼은 이 땅의 육체적 목숨이 일시적으로 연장되는 것에 불과했다. 어린 양의 피를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죽음이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어린 양의 피로 문에 가로 세로 십자가를 그려 영원한 구원을 받았다.

 

그 피는 누차 강조하지만 이스라엘을 식별하는 조치가 아니었다. 우상숭배해서 죽어 마땅한 죄를 씻는 속죄제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은 이미 확보되어 있었다. 그 속죄제로 육신적 생명과 비교도 안 되는 인간의 본질이자 실존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의 생명이 구원 받았다.

 

결국 하나님이 출애굽에서 행한 일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당신의 백성을 죄와 사탄과 사망에 묶인 영적 노예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육체적으로 남의 나라의 노예로 사백 년을 지나게 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최선의 길이었다. 그 길이 아니었다면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라면 차원에서 하나님의 참된 은혜였다.

 

언뜻 보기에는 고생만 죽도록 한 것 같은 사백 년이다. 그러나 고난과 시련을 넘어서 신앙의 연단이었고 나아가 그 노예 살이 자체가 하나님 은혜의 진면목이었는데 이스라엘은 그 은혜를 발견하지 못했다. 신자가 겪는 무슨 일에나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풍성히 넘쳐나고 그것을 찾아 누리는 것이 바로 신앙 실력이다.

 

정말로 큰 하나님의 진짜 은혜.

 

출애굽 날에도 은금 패물을 취하게 한 것만이 은혜가 아니었다. 그런 단순한 외적 측면 배후에는 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숨겨져 있다. 은금 패물을 얻게 한 것에 참으로 심오한 뜻이 많은데 차츰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고 그중 하나만 생각해보자.

 

고대에서 고기는 우상 숭배 제사에 참여해야 먹을 수 있었다. 그 후 시장에 나오지만 돈으로 사먹기에는 여전히 비싸서 서민은 엄두도 못 낸다. 노예로 지낸 이스라엘에게 돈에 여유가 있을 리 없다. 하나님은 지금 앞으로 고기를 먹고 싶으면 우상 숭배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애굽에서 얻은 은금 패물로 얼마든지 시장에서 사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곧바로 고기 타령을 했다. 물론 물과 먹을 것도 없는 광야에서 방황할 때에 그랬긴 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보내어 입에 고기가 씹힐 정도로 베푸셨다. 그 이전에 가데사바네아에서 하나님께 거역하지 않았다면 아예 그런 일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광야 방황 후에 가나안 땅으로 진군할 때에 에돔 지경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율법에 따라 먼저 화친을 청했다. 형제 나라인 에돔과는 전쟁도 하지 말라고 명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에돔 지경에 어떤 피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며 마실 물도 돈을 주고 사먹겠다고 제안했다.(민20:19) 물은 당시 광야에서 생존에 필수적이라 공짜로 나눠주는데도 그랬다.

 

광야 방황 후의 이스라엘 신세대는 율법의 요구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숫자적으로 에돔을 압도하는 군대이었음에도 먼저 화친을 청했고 거절당하자 그 땅을 우회하며 진군했다.

 

이처럼 신자가 하나님의 선을 현실의 삶에서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우리 속에서 절로 우러나온 것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죄밖에 저지르지 못하는 자들이었지 않는가? 선을 행할 수 있는 마음, 열정, 힘 모두 하나님께 공짜로 받았으니 이만한 큰 은혜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믿음을 더 강하게 세우기 위해서 때로는, 아니 그럴수록 더욱 정말로 견디기 힘들고 억울하고 상처 받는 일들을 맡긴다. 날이 갈수록 고달파져 거의 좌절 포기하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넣기도 한다. 심지어 사탄의 소굴 한복판에 던져 넣기도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분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만의 역설이다. 그런 중에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은혜가 숨겨져 있다. 욥에게 그런 수난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영적 거인이 될 수 없었다.

 

물론 신자가 고난을 잘 견디고 인내하면 하나님이 보너스 선물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은 주신다. 그러나 그분은 채찍을 가진 냉정한 조련사가 아니다. 거기다 솔직히 고난이 끝나면 구태여 추가로 받을 은혜가 따로 없지 않는가? 우리의 기도도 제발 이 고난을 끝나게만 해 달라고 빌지 않는가? 그럼 기도대로 응답되었으면 그만이다.

 

그저 은혜로 살고 있다고 말은 하되 표정은 어두운채 평생을 보낸다면 너무나 가난한 신앙이지 않는가? 그저 종교적 수사일 뿐이지 참 믿음도 아니다. 신자가 정작 행할 고백은 날마다 은혜가 새롭고 차고 넘쳐서 신나게 살고 있다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인가?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요구하는 종교적 계명이 아니다. 물론 우리 연약하고 어리석고 나태하며 욕심과 죄가 살아 있어서 그렇게 하기는 너무 힘들다. 그렇게 힘들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쉬지 말고 기도하면 된다.

 

그럼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기쁜 일이 생기게, 은금패물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가? 아니다. 자꾸만 육신적 노예로 묶이는 것이 싫어서 이전의 영적인 노예로 되돌아가고 싶은 죄의 노예 된 습성을 죽여 달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 육신적으로 세상에서 핍박과 환난을 겪더라도 내 영혼을 살려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그러면 언제 어디서나 세밀하게 곳곳에 숨겨진 하나님의 절묘한 은혜를 찾아서 누릴 수 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 되는 축복이 그 때에 비로소 넘치도록 임한다.

 

8/27/2017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8 출#31 14:15-20,31출애굽의 영광은 애굽을 위한 것이었다. master 2017-10-05 318
77 출#30 14:10-14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 master 2017-10-05 105
76 출#29 13:17-22 구름과 불기둥은 은혜도 아니다. master 2017-09-15 194
» 출#28 12:29-36 은혜 받을 일밖에 남지 않았다. master 2017-09-15 280
74 출#27 12:29-36 가룟 유다보다 못한 목사 master 2017-09-15 71
73 출#26 12:21-28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master 2017-08-13 594
72 출#25 11:1-8 개의 혀를 움직이지 않게 하는 하나님 master 2017-08-03 74
71 출#24 9:4 기독교 좌파와 우파의 공통된 잘못 master 2017-07-24 46
70 출#23 9:1-7 차별과 구별을 분별해야 신자다. master 2017-07-19 99
69 출#22 7:20-25 현대과학이 풀지 못한 피라미드의 비밀 master 2017-07-19 233
68 출#21 7:8-13 하나님께 맡길 것은 문제와 고난이 아니다. master 2017-07-08 1441
67 출#20 6:1-9 가장 좋아하되 가장 모르는 하나님의 이름 master 2017-06-30 122
66 출#19 5:10-21 사탄이 가장 잘 쓰는 수법 master 2017-06-12 130
65 출#18 5:1-9 거짓말로 전도하고 거짓말로 살아라. master 2017-06-10 181
64 출#17 4:21-26 당신의 종을 죽이려는 하나님 master 2017-06-10 395
63 출#16 4:18-20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는가? master 2017-06-10 113
62 출#15 4:13-17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master 2017-06-10 123
61 출#14 4:10-12 “이제 가라 내가 함께 하리라.” master 2017-05-04 73
60 출#13 4:1-9 쉽고도 간결한 기독교 신앙 master 2017-04-08 102
59 출#12 3:18-22 광야로 사흘 길을 떠난 적이 있는가? master 2017-04-08 472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