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구별을 분별해야 신자다.

출애굽기 강해 (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고 억지로 잡아두면 여호와의 손이 들에 있는 네 가축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에게 더하리니 심한 돌림병이 있을 것이며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기한을 정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가 내일 이 땅에서 이 일을 행하리라 하시더니 이튿날에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시니 애굽의 모든 가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한지라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본즉 이스라엘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라.”(출9:1-7)

 

인간생존의 333 법칙

 

바로는 애굽의 장자가 모두 죽는 열 번째 재앙에는 어쩔 수 없이 출애굽을 허락했다. 그러나 다시 번복하고 홍해까지 추격했는데 그 집요함은 무서울 정도다. 공짜 노동력을 놓치기 싫다는 첫째 이유 외에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음을 지난주에 살펴봤다.

 

우선 아홉 번째까지 재앙을 일상적으로 겪는 자연현상으로 그 의미를 축소한 영적 어리석음 때문이다. 무식하면 고집이 세다고 흔히 하는 말 그대로다. 둘째는 스스로 애굽 최고의 신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나라와 군대도 없이 자기들에게 4백 년간이나 노예로 봉사했던 무리에게 세계 최강국 애굽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세우려 들면 들수록 사람은 오히려 점점 초라하고 불쌍해진다는 점을 정작 본인만 모른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구출하려들었다면 10번은커녕 둘째 재앙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첫 번째 물로 피로 변하는 재앙만으로 충분했다. 인간생존의 333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호흡을 3분만 못하면, 물을 3일만 못 마시면, 음식을 3개월만 전혀 섭취 못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7일 만에 첫째 재앙을 거둔 뜻은 바로가 아무리 신의 행세를 하고 애굽 전 국민의 숭배를 받아도 물을 일주일만 못 마셔도 미이라 신세로 변할 수밖에 없는 연약하고 비천한 피조물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너는 신이 아니라 네가 멸시 학대하는 히브리 노예와 하나 다를 바 없다는 점을 깨달으라는 하나님의 바로를 향한 신앙 교육이었다.

 

물을 피로 만드는 이적을 애굽의 술사도 행했지만 그들과 모세 중에 누구의 능력이 더 신령한지 시합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런 정도를 가지고 인간과 시합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애굽 술사가 핏빛 물감으로 속일 수 있었고 사탄의 힘을 빌려 요술을 부렸을 수 있다. 그러나 피를 다시 물로 변화시키는 것은 전혀 흉내도 못 내었다.

 

피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죽음이다. 물은 생명이다. 사람들이 온 땅에 흘러넘치는 물을 맘껏 예사로 마신다. 그러나 그 물 안에 찬하 만민의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신성과 영원한 능력을 명확하고도 넘치도록 계시해 놓았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오늘날의 불신자들은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자기를 세운다. 스스로 자기를 자신의 신으로 모신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물만 끊기면 그 왕의 나라가 삼일천하로 끝난다. 또 그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간단한 진리를 자신의 연약함과는 연결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고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기를 자신의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놓아야 한다. 하나님을 인정해야 하고 또 그럼 지금껏 자기 멋대로 살던 삶을 청산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기 때문이다. 예수 믿기 전의 바로 제 모습이다.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기독교의 하나님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이 바로와 오늘날의 불신자들에게 제발 그 어리석고 초라한 고집을 버리라고 간절하게 호소하는 내용이다. 다섯 번째 재앙으로 애굽의 모든 가축에 전염병이 생겼으나 이스라엘의 가축에는 전혀 생기지 않았다.

 

전염병을 날짜를 정해서 사람이 발병케 할 수는 없다. 병균은 물과 공기로 전염되기에 인위적으로 중지시킬 수 없다. 오염된 가축을 땅에 파묻거나 불에 태워 죽여야 한다. 애굽은 목축을 비천한 일로 간주했기에 꼭 필요한 것 말고는 기르지 않았다. 본문 3절에서 말 나귀 약대를 먼저 거론한다. 말은 전쟁 무기요, 나귀와 약대는 운반수단이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목축을 주업으로 삼았다. 가축의 개체수가 훨씬 많았다. 노예 살이를 하므로 생활환경이 위생적으로 훨씬 열악했다. 그렇다면 고센 땅에 전염병이 생길 확률이 훨씬 높았다. 하나님은 애굽 가축에만 돌림병이 생긴다니 상식적으로 도무지 말이 안 되었다. 바로가 사람을 보내 사실임을 확인까지 했지만(7절) 앞에서 말씀 드린 이유로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본문은 물론 열 재앙을 통해 애굽만 피해를 보게 했다. 또 가나안 정복 때는 그 칠족을 멸하고 아이까지 진멸케 했다. 그러니 기독교 외부에선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방족속을 무자비하게 심판하고 자기 백성만 편애하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신이라고 비난한다. 애굽과 가나안 족속을 인종 문화 종교가 다른 이유로 차별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기독교 신자들은 타 종교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전도를 하니 예의도 상식도 모르고 교세 확장에 눈이 먼 광신자 취급한다. 그 하나님에 그 신자라는 식이다.

 

본문 4절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선언했는가? 이스라엘의 가축을 애굽의 가축과 구별(區別)했다고 한다. 차별(差別)했다고 하지 않았다. 넷째 파리 재앙 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해 파리 떼가 생기지 않게 했다.(출8:22) 사실은 첫째 재앙부터 열 번째까지 다 구별하셨다. 구원의 대상인 이스라엘에 재앙이 미치지 않게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므로 구태여 일일이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 차별과 구별의 차이는 무엇인가? 차별은 동일한 신분과 자격의 사람을 개인적 친밀도 선호도 상대로부터 보상 유무 등으로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다. 목사가 자기 말에 고분고분 순종하고 죄송하지만 심방을 가면 가끔 돈 봉투도 찔러 주는 사람을 교회 중직에 임명하여 설교 중에도 칭찬하면 같은 교인들 중에서 차별한 것이다.

 

저는 불신자와 식사교제 할 때에 식사기도를 하지 않는다. 목사가 기도도 하지 않고 밥을 먹는다는 오해를 사지 않을 정도로만 잠시 눈을 감고 속으로 기도한다. 그렇다고 목사가 예수 믿지 않는다고 기도도 안 해주면 차별하는 것 아니냐고 따질 수 없다. 믿음이 없는 자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해야 의미도 없고 응답도 되지 않는다. 피치 못할 경우는 그 불신자가 예수 십자가 구원의 은혜 안에 어서 빨리 들게 해달라는 기도를 반드시 한다. 이는 불신자라고 차별한 것이 아니라 신자와 구별한 것이다.

 

차별은 사람을 외적 조건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반면에 구별은 사람의 내적 정체성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다. 같은 반 학생을 부잣집 아들이라고 특별대우하면 차별이다. 학교 밖의 갱들에게 선생이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고 아무도 차별했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먼저 학교에 입학하여야 한다. 동등한 신분이 된 후라야 차별의 문제가 제기된다.

 

어쨌든 본문에서 애굽만 피해를 보았으니 결과적으로 차별한 것 아닌가라는 반발은 성립되지 않는다. 애굽은 지난 사백 년간 이스라엘을 임금 한 푼 안 주고 학대했다. 바로가 히브리인을 차별한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그 잘못에 당장 벌하지 않고 따지지도 않았다. 대신에 내 백성을 나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요청했고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벌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열 번의 재앙을 내렸어도 죽지 않을 정도 수준에서 멈춰주기를 반복했다. 애굽이 자기들도 여호와를 경배하면 안 되느냐고 요청했는데도 하나님이 거절했다면 차별이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

 

요한복음 8장에 잘 아시는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의 율법 레위기 20:10에 따르면 반드시 죽여야 하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어떻게 처리할까 물었다. 예수님을 시험할 목적이었다. 풀어주라고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어긴 것이고, 죽이라고 하면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당신의 가르침에 위배되기에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자라고 매도할 참이었다.

 

그들의 흉계를 모를 리 없는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답했다.(요8:7) 죄인이 아닌 자만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정죄 심판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들 유사한 혹은 더 심한 죄가 생각나서 물러가버리고 여인만 남았다. 주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했다.

 

간음이 죄가 아니라거나, 사형 당할 정도의 죄가 아니라거나, 털어서 먼지 안 날 사람은 한 명도 없으니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거나, 너는 죄인이 아니라는 등의 의미는 전혀 없다. 당신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죄 없는 자의 신분 즉, 구원과 심판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권위를 갖고 선포하신 것이다. 율법의 공의로는 돌로 쳐 죽여야 하지만 하나님만의 사랑으로 죄를 사해주는 구원의 은혜를 베푼 것이다.

 

물러간 유대인들과 당신 앞에 어쩔 수 없이 엎드려 있는 그 여인과 외적 조건에선 동일하다는 뜻이다. 그들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말이다. 결코 누가 더 선하거나 더 악하다고 따질 수 없다. 이 여인을 심판하려면 모든 유대인을 다 심판해야만 된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간과해버리는 아주 중요한 사항이 하나 있다. 여인의 생사가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달린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돌로 치라 하면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풀어주라고 하면 당장 그 자리는 모면할 수 있어도 나중에 어차피 유대인들에게 잡혀 율법에 따라 사형 당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어차피 사형당할 이 여인에겐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고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온 것이지 않는가?

 

여인으로선 자신은 아무래도 죽은 몸이라 지레 체념하고 포기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켜 주어야만 살 수 있다는 실 날 같은 소망만 남았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도 제로에 가깝다. 여인은 어쩌면 이름도 모르는 이 랍비가 자기 때문에 애꿎게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미안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태는 전혀 엉뚱하게 그 현장에 있는 어떤 인간도 예상치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곳에는 분명히 유대 최고 지성인이자 종교인들인 바리새인과 제사장들도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여인은 육신의 생명까지 구했다. 물러간 유대인들은 전부 자기와 동일한 죄인이라고 인정한 셈이니 앞으로 다시 시비 걸 일은 없을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름 모를 이 랍비가 기적을 일으켰다. 그는 하나님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예수님의 한 마디는 그 의미나 파급 효과에서 다른 유대 랍비의 가르침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간음한 자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죽어 마땅한 자라고 저주하기 바빴다. 그들은 지금 온 데 간 데 없다.

 

반면에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킨 눈앞에 서있는 이 랍비는 바리새인이나 나 같은 자나 외적 조건으로 차별하지 않고 동일한 죄인으로 똑 같이 취급했다. 자기나 자기를 정죄한 그들이나 하나님의 구원이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가 절실한 불쌍하고 초라한 인간으로 대우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차별만 당하신 예수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근본 의미가 무엇인가? 너희 중에 너희 죄를 스스로 씻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 사상 철학 종교로 죄를 절대 깨끗케 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는 의인은 단 한명도 없고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관점에선 모든 인간이 영적으로 무지하고 완악하기는 애굽의 바로와 같다. 점수로 완전히 제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다.

 

그래서 너희가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처럼 죄 중에 있던 우상숭배를 하며 하나님을 거역한 원수가 되어 있더라도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가 절실함을 시인하면 언제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인종 문화 종교가 달라도 그것으로 구원은 물론 상벌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영적 바보를 넘어 시체인데 똑같이 대할 수밖에 없다. 외적 조건으로는 차이가 하나도 없다.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이 차별하려 해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분으로도 어쩔 수 없이, 그분의 잘못이 아니라 인간의 상황이 그러니 구별할 수밖에 없다. 오직 예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완악했는지 겸손히 인정했는지 아닌지 하나로 말이다. 쉽게 말해 사람들이 다르지 않고 모두 동일하다는 것을 시인한 것으로 말이다.

 

그런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은 막상 어떠했는가? 당신의 외모 때문에 온갖 차별을 받았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으로 정통 유대 랍비의 배경이 없다고 무시당했다. 안식일 규정을 어기며 병자를 고쳤다고 미움을 받았다. 유대 사회에서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다고 아예 제쳐둔 세리 죄인 창녀 불구자 귀신들린 자들과 주로 교제했다. 예수님 스스로 유대인의 차별을 자초하였고 기꺼이 그들과 동일한 부류로 취급받았다.

 

심지어 귀신의 왕 바알세블의 도움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난을 받았다. 대놓고 사탄의 부하라고 매도당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선을 베풀었고 가장 고상하고 경건한 윤리를 가르친 자가 가장 억울한 재판을 받았다. 최고로 고통스럽고 수치스런 십자가에 달리셨다. 인간이 겪어야 할 차별을 전부 다 감당하시고 죽으셨다.

 

십자가의 양면성

 

그런데도 죽으실 때 성부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드리셨는가? 저들이 자기들 하는 짓이 무엇인지도 모르니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했다. 무엇을 모른다는 것인가? 차별과 구별의 차이도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민족의 영웅이자 여호와 하나님의 최고 선지자였던 모세에게 1500년 전에 정확하게 계시해준 내용을 몰랐다. 이백만이 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의 열 재앙을 통해 생생하게 체험했고 출애굽기로 기록으로 남겼는데도 그랬다.

 

하나님은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일으켰으나 계속해서 중도에 풀어주었다. 애굽 자체를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당신의 백성과 아닌 자들을 구별만 한 것이다. 당신의 백성을 당신의 백성이 아닌 자, 사탄에게 미혹된 자들로부터 떼어놓는 일이 그분의 구원 방식이다.

 

일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로마를 완전히 멸망시켜 달라고 바랐지만 애굽을 멸망시키지 않은 하나님처럼 로마를 멸망시키지 않았다. 유대 지도자들은 실은 그런 요구도 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세운 종교 규정으로 사람을 차별해서 이득을 챙기기 바빴다. 예수님이 그 일로 인해 그들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정죄했기에 미워했고 돈벌이가 떨어지니까 죽였다.

 

인간을 구별만 했지 차별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예수님이었다. 그분의 메시아 되심은 안중에도 없었다. 모세오경을 암송하는 그들이 하나님마저 하나님의 외적 조건만으로 즉, 돈을 많이 주느냐 아니냐로만 판단하여 하나님 그분까지 차별했다. 나중에 일반 유대인들도 동일한 한 가지 이유로 지도자들과 한통속이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외적 조건으로만 차별하는 인간 죄악의 극치였다. 그와 동시에 그런 무지하고 완악한 죄인들을 절대 차별하지 않고 오직 당신께 진심으로 순복하느냐 아니냐로만 구분하는 하나님 사랑의 극치였다. 전자를 후자로 완전히 덮지 않고는 인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과연 인간에게 이 십자가에 외에 다른 소망이 있을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영적 무지의 극치일 뿐이다.

 

뒤로 호박씨 까는 예수쟁이들

 

출애굽의 바로나 예수님 십자가의 빌라도, 가야바, 헤롯 모두 하나님 앞에 분명히 극악무도한 죄인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라. 만약에 제가 간음한 여인의 형장에 있었다면 죄 없는 자 먼저 치라는 말을 듣고는 슬그머니, 그것도 가장 죄 없는 척하려고 마지막에 물러갔을 것이다. 빌라도 재판정에 있었다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아우성쳤을 것이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을 때 다들 물러갔다는 사실은 무슨 뜻인가? 알기 쉬운 시쳇말로 바꾸면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예수쟁이들은 자기들 삶은 전도하는 내용과 전혀 다르면서 말로만 경건한 척한다. 교회 안에 벌어지는 행태는 세상보다 더 난장판이니 뒤로 호박씨나 까지 않으면 밉지나 않지?” 불신자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지 않는가?

 

그들의 비난이 하나 틀린 것 없고 정당하다. 제가 예수를 믿은 지, 아니 목사가 된지 20년이 지났으나 아직 이 문제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죽을 때까지 그럴 수 있으리라는 자신도 전혀 없다.

 

예수를 믿어 감히 확실히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다. 예수를 알기 전의 나는 “뒤로 호박씨 까는 그런 비겁한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최소한 예수쟁이들보다는 도덕적 점수로 몇 배는 된다. 간혹 그런 실수나 잘못을 해도 내 스스로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고 장담했었다.

 

그런 생각과 큰소리가 얼마나 교만하고 완악하며 어리석다 못해 초라하고 비참한 억지인지 알게 된 것이다. 바로가 홍해까지 추적하는 것 같은 무서울 정도의 집념으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예수 믿는 신자를 비난하고 거부했다.

 

그러는 중에 예수님이 성령의 은혜 가운데 먼저 찾아오셔서 제 심령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십자가의 진리, 생명, 사랑 앞에 제 자신을 완전히 벌거벗겨 엎드리게 했다. 인간은 평생 가도 뒤로 호박씨 까는 존재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고 시인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곤고한 사망의 몸에서 예수님 제발 저를 건져주시옵소서!”라는 고백이 눈물과 함께 나도 모르게 절로 나왔다.

 

너무나 귀하고 감사한 은혜

 

감히 말하건대 세상의 모든 도덕 사상 종교는 하나님을 고의로 부인하는 강퍅함만 주입해서 하나님과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게 할 뿐이다. 예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외에는 인간의 이 죽을 고질병을 치유할 방도는 없다.

 

삼일만 물을 안 마셔도, 아니 삼분만 숨을 안 쉬어도 죽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렇게 지으신 하나님마저 차별하는 하나님이라고 매도한다. 또 그런 하나님이라고 인간은 그분을 차별해서 홍해까지 몰아낸다. 하나님이 당장 몽땅 죽여야 마땅한 죄인인줄 모른다. 또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러지 않고 계신 줄도 모른다.

 

남들은 다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지만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호박씨 까기인데도 모르는 것이 인간이다. 그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철저한 심판뿐이다. 극렬하고도 고통스런 형벌을 보너스처럼 추가로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전혀 받지 못할 뿐이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온 것 즉, 차별하지 않고 구별만 하는 하나님이신 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감사한지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인간에게 죽을 고질병이 둘 있다. 첫째 고질병인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믿고 자기를 신으로 모시는 완악한 고집인데 예수 믿을 때에 완전히 고쳤다. 물론 옛날 습성이 가끔 나오긴 해도 어쨌든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게 되었다.

 

우리가 고쳐나가야 할 둘째 고질병은 뒤로 호박씨 까는 습성이다. 내가 나를 봐도 스스로 부끄럽지만 이 또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차츰 나아질 수 있다. 십자가에서 모든 차별을 다 당하신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뜻과 계획을 깊이 묵상하면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도록 그분이 우리를 이끌어주신다.

 

바로 이것이 예수 믿는 복이요 특권이다. 종교적 의무 행위가 아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닮아가며 사노라면 세상과 다른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또 그 길 외에 인생을 참되게 살아갈 수 있는 길도 없다.

 

7/16/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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